8월 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에서 열린 ‘동북아평화포럼 2014’ 콘퍼런스.
국제정치가 경제 발목 잡아
이 작은 도시국가가 이렇듯 잘사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단 하나다. 중동 산유국과 일본 등 동북아를 잇는 해상수송로 말라카 해협의 꼭짓점에 자리하고 있는 위치 덕분이다. 1970~80년대 급성장한 일본 자본은 한 해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이곳에 퍼부었다. 말라카 해협이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 등 인근 다른 수송로에 비해 가진 격차는 단 사흘. 그 작은 차이가 싱가포르의 반세기 번영사(史)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위치만으로 잘 먹고 잘사는 길, 바로 ‘지경학(geoeconomics)의 힘’이다.
눈길을 돌려 동북아를 살펴보자. 중국, 북한, 러시아 세 나라 국경이 모인 한반도의 동북쪽 끝자락, ‘두만강 유역 황금 삼각지대(Golden Triangle)’. 지구온난화로 북극항로가 열리면 싱가포르를 대신해 그 교차점 구실을 하기에 최적 위치에 자리한 곳이 바로 북한 나진항이다.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말라카 해협을 지나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4일이지만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14일로 줄어든다. ‘전도사’를 자처한 새정치민주연합 이해찬 의원은 “지금은 하절기에만 오갈 수 있는 항로지만,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 때문에 당장 2020년만 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위치’에 한국과 일본의 자본, 중국의 노동력, 러시아의 자원을 결합해 ‘잘 먹고 잘살’ 기회를 만들자는 장밋빛 청사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정치다. 북한의 핵 개발과 그에 따른 경제 협력 프로세스 중단, 그리고 공전하는 6자회담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국제정치가 경제적 잠재력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셈이다. 이름 하여 ‘지정학(geopolitics)의 굴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할 길을 만들고자 각국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8월 20일부터 사흘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다. 고려인이주15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상임대표 정몽준·이해찬)가 주최하고 외교부, 재외동포재단, 동아시아재단이 후원한 ‘동북아평화포럼 2014-유라시아 평화의 길’ 콘퍼런스. 한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전문가들이 패널로 참석한 3개 세션과 여야 국회의원들의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시각이 제기됐다.
북한 핵 문제와 6자회담 공전
회의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논의됐던 것은 단연 박근혜 정부의 나진·하산 철도 프로젝트. 이 지역을 무대로 최근 거론되는 경제 협력 사업 가운데 가장 ‘핫한’이슈다. 북한 나진과 러시아 연해주 하산을 잇는 철도를 개·보수하는 사업에 한국의 주요 기업(KORAIL, 현대상선, 포스코)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한국에서 나진항까지는 배로, 나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는 철도로 잇는 새로운 수송로가 열린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남북한 철도를 이어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육로로 연결하는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발제를 맡은 나희승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말이다.
“아시아 국가 사이의 물동량 증가율은 이미 유럽과 북미를 추월했다. 유럽-아시아-태평양을 잇는 ‘유라시아 철도’는 포화상태에 이른 기존 물류시설을 대체할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경제권을 잇는 가교 구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 프로젝트의 최대 수혜자다. 철도 연결이 한국까지 이어진다면 연해주 일대의 천연자원을 지금보다 한층 저렴하게 수송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경제연구소의 올가 데미나 연구교수는 “현재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은 유럽으로 편중돼 있지만 2030년까지 가스 28%, 석유 39%, 석탄 53%가 동북아를 향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가스관 연결까지 성사된다면 동북아 3국은 이전보다 훨씬 싼값에 에너지를 수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중국은 이미 나진항 1, 2부두를 임차해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 가로막혀 동해로 나가는 출구가 없는 중국은 자기 자본으로 나진항에 4, 5, 6항 부두를 신설해 초대형 컨테이너 하치장을 짓는 사업을 2010년 북한과 합의한 바 있다. 동북3성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창지투(長吉圖) 프로젝트의 해상수송로다. 훈춘과 나진을 짓는 50km 남짓의 도로를 폐쇄형 고속도로로 만들어 나진항 신설부두를 50년간 만주횡단철도(TMR) 종단항으로 독점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북한이 나진을 인근 선봉과 묶어 ‘나선특별시’로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2012년 10월에는 양측 당비서가 위원장을 맡는 북·중 나선시 공동개발 공동관리위원회도 출범했다는 게 안국산 중국 옌볜대 교수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 합의의 북한 측 주체가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는 사실. 당시 북측이 공개한 판결문은 그가 ‘나선 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賣國) 행위’를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장성택을 대체할 인물이 자리 잡을 때까지 중국의 사업 추진 역시 불안정을 거듭하리라는 게 콘퍼런스 참석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였다.
언제나 칼을 이기는 것은 돈
더욱 근본적인 걸림돌은 북한 핵 문제와 6자회담의 공전이다. 각국이 얻게 될 이익은 손에 잡힐 듯 뚜렷하지만, 핵 문제 논의에서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진척을 보기 어렵다고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말한다. 6자회담 재개 없이는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힘을 받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 라운드 테이블 주제였던 5·24조치에 대해 조속한 해제를 주장하는 야당 국회의원 참석자들과 ‘우회적 접근’을 대안으로 제시한 여당 의원의 견해가 맞선 것은 이에 대한 시각 차이가 국내 정치와 고스란히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이 내놓은 대(對)러 경제제재는 이 지역을 무대로 하는 경제 협력 아이디어에 직격탄을 날리는 형국이다. 공교롭게도 콘퍼런스가 열린 8월 21일은 데이비드 코언 미 재무부 테러·금융정보 담당차관이 한국 외교부를 방문해 대러 제재의 한국 동참 의사를 타진한 날이었다. 당장 박근혜 정부의 나진·하산 철도 연결 프로젝트만 해도 그 자장(磁場)을 피해나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콘퍼런스에서 나온 ‘나선포럼’ 아이디어가 참석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중국 보하이포럼이나 스위스 다보스포럼 같은 형식의 경제·경영 다국적 포럼을 나선특별시에서 개최하도록 북한 당국에 제시하자는 그림이다. 평양으로서는 역점사업으로 추진 중인 경제특구를 홍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고, 다른 주변국들로서는 두만강 삼각지대의 경제적 잠재력을 해외 투자자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는 것. 기업인과 투자자들이 모임으로써 북한 개방을 이끌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는 취지다.
2세션 발제를 맡은 김태환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까지 끌어들이는 다자 경제 협력만이 북한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굴레를 넘어서는 길은 경제적 이해를 매개로 여러 나라를 끌어들이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제2의 싱가포르’라는 미래가, 핵무기보다 더 값질 수도 있음을 평양이 깨닫게 유도하는 것만이 북핵 문제의 유일한 출구라는 것. 언제나 칼을 이기는 것은 돈이었고, 상황을 바꾸는 열쇠는 정치가도 학자도 아닌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쥐고 있다는 차가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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