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초상’,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1887년, 카드보드지에 파스텔, 54×45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고흐가 동생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 고흐는 ‘인상파’로 불리던 화가의 작품을 한 점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전도사 일을 그만둔 후부터 숙식을 해결할 길마저 막연했던 것이다. 1886년 2월 고흐는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 코르몽의 화실에 학생으로 들어가 베르나르, 러셀, 로트레크 등 젊은 프랑스 화가 그룹에 합류했다.
파리 생활은 순조로이 풀리는 듯싶었다. 고흐는 테오의 집에 기거하며 방 하나를 화실로 사용했다. 다른 젊은 화가들 역시 네덜란드 출신인 신참 화가를 스스럼없이 환영해줬다. 파리에서 모네, 르누아르, 쇠라 등의 그림을 보며 고흐는 색채 사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빨강, 초록, 보라, 노랑 등의 밝은색에 익숙해지려고 여러 장의 꽃 그림을 그렸으며 모네의 바다 풍경에 큰 인상을 받아 풍경화에도 몰두했다. 물결을 묘사한 모네의 짧은 붓터치처럼 자신만의 개성적인 붓터치를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해 5월 열린 제8회 인상파전에서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고 점묘법을 사용한 몇 점의 풍경화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즐겁고 생산적인 파리 생활은 채 2년을 가지 못했다. 어디서나 늘 그랬듯, 파리에서도 고흐는 주변 동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너무도 격정적이고 극단적이며, 쉽게 흥분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을 받아줄 이는 거의 없었다. 고흐와 친분을 맺은 화가들은 이내 그의 성격에 넌더리를 냈다. 고흐 역시 파리 체류 1년 반이 지난 후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양측 모두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됐던 모양이다. 특히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고흐의 분노 때문에 동료 화가들은 그를 반은 혐오하고 반은 두려워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고흐에게 친절하려고 애썼던 이 중 한 명이 ‘난쟁이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다. 고흐는 육체적 장애에도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로트레크에게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술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 화실과 카페에서 자주 어울렸다. 1887년 로트레크가 그린 고흐의 파스텔화 역시 카페에 앉아 있는 고흐의 옆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붉은 턱수염을 기른 고흐는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로트레크의 능란한 스케치 솜씨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 속 고흐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인다. 늘 동료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던 고흐의 모순적 성격이 조금은 엿보이는 초상화다.
1888년 2월 고흐는 자신에 대한 동료 화가들의 몰이해에 치를 떨면서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에 방을 구했다. 아를에서 혼자가 되자 고흐는 이내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햇살 따스한 남프랑스에서 화가들의 공동생활을 꿈꿨다. 그가 가장 부르고 싶어 한 동료는 늘 자신에게 친절하고 초상화도 그려준 로트레크였다. 그는 몇 시간씩 공들여 쓴 편지를 로트레크에게 여러 번 보냈다. 그러나 로트레크는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