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의바람꽃 군락지를 걷는 풍도 꽃길 탐방객들.
풍도는 수산자원이 풍부하다고 알려졌지만, 정작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섬 주변에 갯벌이 없는 까닭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겨울 몇 달 동안 인근 섬으로 이주해 수산물을 채취하며 생활해야 했다. 풍도의 풍요로움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됐다. 후망산(175m)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야생화가 그것이다.
풍도 야생화는 자생지가 넓고 개체수가 많아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오직 풍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이 2종이나 된다.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이 그 주인공이다. 풍도 야생화 트레킹은 마을 뒤편의 은행나무에서 산길로 접어들면서 시작된다. 후망산 야생화 군락지를 감상하고, 군부대를 지나 풍도대극 군락지와 바위가 아름다운 북배를 거쳐 해안을 따라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이 좋다.
아기곰처럼 귀여운 가지복수초
풍도에는 마을이 선착장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집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남쪽 육지를 바라본다. 마을길로 접어드니 담벼락에 물고기, 문어, 조개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안에 손바닥만한 건물과 운동장이 보인다. 여기가 대남초교 풍도분교다. 학교 역사가 무려 80년이다. 정문 옆 알림판에 아이가 그린 듯한 ‘입학 축하’ 그림이 붙어 있다. 알고 보니, 올해 3년 만에 입학식이 열렸다고 한다. 입학생은 1명. 그 덕에 풍도분교의 전교생은 2명이 됐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몹시 낡았다. 하지만 2012년 8월 ‘2012 경기도 서해 섬 관광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풍도에 물들다’ 프로젝트를 진행해 벽화, 조형물 등이 세워지면서 조금 밝아졌다. 물고기가 그려진 골목길을 휘돌아 산비탈을 오른다. 동무재에 올라서자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핥는다. 앞쪽으로 ‘인조의 은행나무’가 보인다.
400년 묵은 이 은행나무는 이괄의 난을 피해 풍도로 피난 온 인조가 섬에 머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어수거목(御手巨木)이라고 부르며 풍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지나는 배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풍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노란 은행잎이 절정일 때 가장 아름답다고. 나무 아래 은행나무샘이 있다. 은행나무가 수맥을 끌어당겨 만든 특이한 샘으로, 주변 여러 섬 가운데 물맛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샘에서 넘친 물이 은행나무 앞을 늪처럼 만들었다. 그곳을 건너면 산길이 시작된다.
바람의 여신 아네모네
후망산에서 가장 먼저 만난 꽃은 복수초다. 우리나라에는 복수초가 4종 산다. 주로 제주에 자생하는 세복수초, 경기 일대 높은 산에서 자라는 애기복수초, 복수초속의 대표 식물 복수초, 가지가 여러 개로 분지되는 가지복수초 등이다. 풍도에서 유명한 복수초는 가지복수초로 꽃이 크고 색이 진하다. 특히 꽃 아래에 복슬복슬 자라난 진초록 잎과 가지가 노란 꽃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이곳 복수초는 아기곰처럼 귀엽다. 복수초 다음은 노루귀다. 분홍색 노루귀와 흰색 노루귀가 번갈아가며 나타나 특유의 솜털을 자랑한다.
계속 산길을 따르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꽃사진을 찍기 위해서지만, 마치 경이로운 존재를 알현하려는 자세처럼 보인다. 꽃사진을 찍을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꽃 주변에 있는 낙엽을 모두 치우는 경우가 많은데, 꽃에게 낙엽은 이불 같은 존재다. 이불을 치우면 꽃이 얼어 죽거나 피지 않을 수도 있다. 꽃사진보다 꽃 사랑이 먼저다.
가지복수초와 꿩의바람꽃이 어우러져 있다(왼쪽). 붉은대극과 비슷한 풍도 고유 종인 풍도대극.
풍도바람꽃은 예전에는 변산바람꽃으로 알았지만, 식물학자인 오병윤 교수가 다소 틀린 부분을 발견했다. 먼저 꽃이 변산바람꽃보다 크다. 결정적으로는 밀선(蜜腺·꿀샘) 크기에 차이가 있다. 변산바람꽃은 생존을 위한 진화로 꽃잎이 퇴화해 밀선이 2개로 갈라졌다. 반면 풍도바람꽃은 밀선이 변산바람꽃보다 넓은 깔때기 모양이다. 2009년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졌고, 2011년 1월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에서 풍도바람꽃으로 정식 명명했다.
풍도 최고 절경인 북배. 붉은 바위가 이국적이다.
철조망 지대에서 나와 좀 더 오르면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공터 곳곳에 바람꽃과 복수초 군락지가 자리 잡았다. 그곳을 자세히 보면 간혹 꽃이 눈처럼 흰 꿩의바람꽃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여기서 정상처럼 보이는 언덕에 올라 계속 산등성이를 타면 군부대를 만난다. 북배는 군부대 뒤쪽 산비탈로 내려서야 한다. 이 길에 풍도대극이 많다.
풍도대극은 붉은대극과 같은 속에 속하며 생김새도 똑같다. 차이점은 붉은대극은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에 털이 많다는 것. 외형상 차이는 미비하지만, 과학자들은 동위효소분석에 따라 붉은대극과 분명히 구분되는 명확한 특징을 가진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국가표준식물목록에 풍도대극이 정식 명칭으로 등록돼 있다.
제법 가파른 길을 타고 내려오면 북배에 닿는다. 북배는 풍도 서쪽 해안을 이루는, 알려지지 않은 비경으로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인다. 북배의 붉은 바위는 그 색감이 오묘하며 푸른 바다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북배에서 왼쪽 해안길을 따라간다. 흉하게 파헤쳐 놓은 채석장이 폐허로 변해 풍도의 아픔을 전해준다. 상쾌한 파도소리 들으며 길을 따르면 풍도등대 앞이다. 나무계단을 따라 등대로 올라서면 시원하게 바다 조망이 열린다. 후망산 동쪽 정상에 위치한 풍도등대는 인천과 평택, 당진항을 드나드는 선박을 비롯해 인근 해역 여객선과 소형 어선의 안전 항해를 도우려고 1985년 8월 16일 점등했다.
등대에서 내려와 다시 해안을 따라가면, 큰여뿔 산책로를 지나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서는 아낙들이 직접 캔 전호나물(사생이)과 달래를 판다. 풍도의 봄이 오롯이 담긴 귀한 나물들이다. 나물 한 봉지를 사들고 설렁설렁 선착장으로 걸어오는데, 새삼스럽게 ‘왜 풍도에는 예쁜 꽃들이 지천으로 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후망산을 멀그니 바라보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봄의 여신이 풍도와 입맞춤했다고 할 수밖에!’
여행정보
● 풍도 꽃길 가이드
트레킹은 후망산 야생화 군락지와 서쪽 북배를 연결하면 된다. 선착장→풍도분교→풍도마을→은행나무→군부대→북배→풍도등대→선착장 코스로, 5.1km 2시간 30분쯤 걸린다. 꽃사진을 찍으려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한다. 3~4월 초에 볼 수 있는 꽃은 복수초, 노루귀, 풍도바람꽃, 풍도대극이다.
● 교통
풍도랜드의 꽃게탕.
● 숙식
풍도랜드(032-831-0596), 풍도민박(032-831-7637), 풍도횟집민박(032-843-2628) 등이 있다. 숙박비는 2인 기준 5만 원이다. 식사는 한 끼에 7000원쯤으로 다양한 나물 반찬이 잘 나온다. 풍도랜드의 꽃게탕백반이 괜찮다. 1인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