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11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2012년 대선의 꿈이 2017년으로 미뤄졌다. 반드시 정권이 교체돼야 한다”면서 “내가 어떤 구실을 해야 한다고 집착하진 않지만 회피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대권 재도전 의사를 내비쳤다.
열흘 뒤 대선 회고록인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통해 “광범위한 관권 선거부정으로 얼룩진 지난 대선에 대해 일말의 미안함도 표시하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미국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시발은 도청사건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며 박 대통령을 정조준했다.
언론은 대선 1주년에 걸맞게 ‘박근혜 vs 문재인’ 대결구도를 정치면 머리기사로 올렸고, 어렵게 국가정보원(국정원) 개혁특위 구성에 합의한 김한길 대표 등 현 민주당 지도부는 김이 빠졌다. 문 의원의 저서는 출간 이틀 만에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권 변호사 활동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이 개봉 전부터 주목받고, 웅크려 있던 참여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들도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는 벌써부터 ‘2017년 문재인 대선 출마지지’ 글이 잇달아 올라오는 등 친노가 다시 유권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감성 자극 ‘바람몰이’ 선수들
정치권은 이런 현상이 나타난 시점이 선거와 연관돼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본격적으로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친노가 대선 1주년에 맞춰 활동을 시작한 것을 두고 민주당의 ‘숙명’인 친노 대 비노(비노무현) 싸움이 막을 올렸다고 보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당장 안철수 신당이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인 친노 진영을 결집해 야권 재편 구도를 선점하겠다는 해석이 나온다.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분명히 한 것도 안 의원의 중도 지향과 차별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문 의원 대변인 격인 윤호중 의원은 “국민에게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시기에 문 의원이 정치활동을 본격화하면서 그 뜻을 알리려는 것으로 해석해달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상당수 친노 인사의 속내와는 온도차가 난다. 친노 민주당 지역위원장은 조심스레 속내를 내비쳤다.
12월 6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한길 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노가 대중의 관심을 먹고 다시 자라난다면, 이들의 정치적 확장력에 따라 지방선거 분위기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 유권자의 감성적 지지 성향, 즉 쏠림 현상이 매우 강한 점을 고려할 때 6개월은 ‘바람’이 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감성마케팅’에 능한 친노 세력이 ‘문재인 깃발론’으로 똘똘 뭉친다면, 안철수 신당과의 야당 재편 과정에서 작지 않은 전투력을 보이리란 전망도 나온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분노한 민심에 힘입어 화려하게 부활한 만큼, 국정원 대선 불법개입 의혹을 지속적으로 띄우면서 ‘억울하게 대선에서 졌다’는 ‘문재인 동정론’을 앞세우면 부활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친노 인사들은 특유의 결집력과 감성마케팅으로 야권 약세지역인 충청남도(안희정), 강원도(이광재)에서 극적으로 승리했고, 서울시장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는 검찰 수사로 위기에 몰렸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열린우리당 출신의 민주당 한 고위당직자는 “벌써 ‘문재인 효과’가 나타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친노 프레임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에서 조직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의 5할 정도는 친노 그룹이다.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민주당 모 관계자도 본인을 친노로 규정하는 것을 재검토 중이다. 왜냐. 일단 당내 공천 경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일단 공천 경쟁에서 이겨야”
12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정애 의원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있는 문재인 민주당 의원.
최근 조경태 민주당 최고위원이 문 의원의 발언에 대해 “신공안 정국이니,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청구를 반민주적이니 하는 주장은 진영 논리에 갇혀 국민을 우습게 보는 발언이다. 국가 부정세력을 두둔하는 분들이 국정 분열세력”이라고 비판하자 친노 정청래, 최민희, 김경협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 원색 비난하고 나선 것이 대표적 사례. 정 의원은 “당신(조 최고위원을 지칭)은 비겁하고 야비한 정신적 새누리당원”이라고 비난했고, “이기적인 자기 정치, 지역감정에 기댄 볼모정치 역겹다”(최민희 의원), “민주당 내 새누리 X맨은 곧 탈당 후 자기 당 찾아갈 것”(김경협 의원) 같은 원색적인 비난 글이 올라왔다.
김한길 대표 역시 “민주당이 뭉쳐 위기를 돌파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각자 자리에서 당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숙고해주길 당부한다”며 은근히 친노 세력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나섰다. 조직 기반이 취약한 김한길 지도부로선 여야 대치정국에서 친노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지면 그만큼 선택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비노 의원 중에는 “안철수 신당이 출현하는 만큼 ‘예선에서 이기는 친노, 본선에서 지는 친노’로는 한계가 많다”고 비판한다.
“친노는 결집력은 강하지만 확장력은 약하다. 그래서 공천에서 이기고 선거에서 진다. 공천 과정에서는 친노 세력이 뭉쳐서 비노 후보를 누르고 승리할 수 있지만,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는 최악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친노, 비노 갈등이 분당 수준에 이른다면, 안 의원 중심의 야권 재편이 이뤄질 수도 있다. 최근 안 의원 측이 ‘폭넓게 사람을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창당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한 것도 민주당을 지켜보겠다는 뜻 아니겠나. 친노 인사들이 고려해야 할 점이다.”
친박과 친노 적대적 공생관계
수도권의 민주당 중진의원은 “계파정치는 존재할 수 있으나, 문제는 ‘자기 정치’를 위해 이를 악용하는 구태가 반복된다는 점”이라며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NLL 논란은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 반성해야 할 사안이다. 새누리당은 민생과 무관한 안보 사안을 꺼내들어 친노를 죽이려다가 오히려 친노를 살린 측면이 있다. 반면 민주당은 이 사안에 매달리지 말아야 했는데, 친노 중심인 문재인 의원이 관련 발언을 하면서 사안이 커졌고, 친노는 이를 확장했다. 이 때문에 당이 주도하려던 민생 정책이 묻혀버렸다. 현 지도부가 친노 세결집을 경계하는 것도 일맥상통한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이에 대해 “새누리당의 친박(친박근혜) 세력과 야권의 친노 세력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적대적 공생관계가 형성됐다”며 “두 세력이 여야 대결국면을 조성해 각 진영 내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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