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말리와의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역전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는 손흥민.
A매치 경기에서 선수를 소개할 때 함성 크기는 곧 인기와 비례한다. 과거 가장 열렬하게 환호를 받았던 주인공은 단연 박지성(아인트호벤)이다. 박지성이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뒤 기성용(선덜랜드)과 이청용(볼턴), 구자철이 그 뒤를 이었고, 이제는 손흥민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손흥민은 폭발적인 스피드가 강점이다. 플레이도 시원시원하다. 팬들로 하여금 그가 공을 잡으면 뭔가 멋진 장면이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선수다. 득점 감각과 결정력도 발군이다. 10월 15일 말리와의 평가전을 보자. 후반 1분 이청용이 페널티 박스 정면에서 안쪽으로 패스를 찔러주기 직전 손흥민은 이미 상대 수비 뒤로 절묘하게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것을 두고 ‘골 냄새를 잘 맡는다’고 표현한다. 이어 이청용이 띄워준 공을 손흥민은 가슴으로 침착하게 받은 뒤 돌아서며 그물을 찢을 듯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국가대표팀의 오랜 골 가뭄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통쾌한 골이었다.
손흥민이 지난해 함부르크 시절 터뜨린 주요 골을 다시 보면 팬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수비수 뒤로 절묘하게 빠져 들어간 뒤 마무리(프랑크푸르트-아우크스부르크 전), 중앙선에서부터 40m 이상 드리블해 들어간 뒤 수비수를 제치고 골(도르트문트 전), 각도가 없는 사각지역에서 반대편으로 감아 차는 슛(브레멘 전)까지, 한 마디로 손흥민은 득점에 관한 한 다재다능하다. ‘슈퍼 탤런트’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슈퍼 탤런트’ 그러나 대표팀 입지 좁아
손흥민은 올 시즌을 앞두고 구단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1000만 유로(145억 원)에 레버쿠젠 유니폼을 입었다. 레버쿠젠은 차범근 SBS 해설위원이 뛰었던 팀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하다. 손흥민은 ‘제2 차붐’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올 시즌 프라이부르크와 리그 개막전에서 1골을 터뜨리며 무난한 홈 데뷔전을 치렀다. 레버쿠젠은 지난 시즌 득점왕 슈테판 키슬링(24골)을 중심으로 좌우에 손흥민과 시드니 샘이 포진하는 스리 톱을 주 공격전술로 삼는다. 독일 언론은 손흥민과 샘의 좌우 날개를 ‘샘손(Sam-Son)’라인이라 부른다.
홍명보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홍명보호는 2013 동아시안컵 3경기를 비롯해 페루, 아이티, 크로아티아, 브라질, 말리와 평가전을 치렀다. 월드컵까지는 9개월 이상 남았다. 홍 감독은 대회 직전까지 무한 경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방침이지만 베스트11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동메달 주역과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이 역시 중심에 있다.
오른쪽 측면 공격수 이청용, 중앙 미드필더 기성용, 중앙 수비수 홍정호와 김영권은 부상 등 악재가 없는 한 승선이 유력하다. 좌우 풀백 김진수(알비렉스 니가타), 이용(울산), 중앙 미드필더 한국영(쇼난 벨마레)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는 손흥민은 대표팀에서 입지가 좁다.
홍 감독의 주 포메이션은 4-2-3-1이다. 손흥민은 소속 팀에서와 같이 왼쪽 날개에 포진한다. 손흥민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큰 경쟁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플레이 스타일을 홍명보호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손흥민은 공을 잡았을 때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동료를 활용하는 게 좋을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미숙하다는 게 홍 감독의 생각이다. 손흥민이 득점하는 장면을 자세히 보면 동료들이 더 좋은 위치에 가 있는데도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이 많다. 물론 들어가면 환상적인 골이지만 반대의 경우 귀중한 기회를 날리는 꼴이 된다. 과감하다는 것은 공격수로서 큰 장점이지만, 이것이 이기적인 플레이로 이어지면 곤란하다.
최적의 조합 찾으려는 실험
또한 손흥민은 공간 창출 능력이 부족하다.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도 “손흥민은 공간이 있을 때는 참 잘하는데”라며 그의 단점을 에둘러 지적한 바 있다. 손흥민은 공간이 많을 때 장점을 십분 발휘한다. 관건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동료들이 수비수를 끌고 다니며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손흥민 스스로 공간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더 키워야 한다. 이런 부분을 개선해야 홍 감독이 손흥민을 중용할 수 있다.
앞으로 펼쳐질 손흥민과 김보경(카디프시티)의 주전 경쟁 구도도 흥미롭다. 홍 감독은 “제자 가운데 누가 축구를 가장 잘하느냐”고 물으면 예전부터 주저 없이 김보경을 뽑았다. 김보경은 손흥민처럼 빠르고 화려하진 않지만 축구 센스가 뛰어나고 영리하며 부지런하다. 2009년 FIFA U-20 남자 월드컵부터 광저우 아시안게임, 런던올림픽을 모두 거쳐 홍 감독의 전술에 익숙하다는 것도 김보경의 강점 가운데 하나다. 또한 김보경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 중이다. 어느 것 하나 손흥민에게 뒤질 것이 없다.
김보경은 브라질 전에서 손흥민을 제치고 선발로 낙점됐다. 그는 강한 압박과 전 방위적 수비의 적임자로 꼽힌다. 팀플레이와 협력 수비 측면에서 손흥민보다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이다. 수비는 물론이고 날카로운 드리블 돌파로 기회도 여러 차례 만들어냈다.
사흘 뒤 벌어진 말리 전에서 주전은 손흥민 몫이었다. 공격력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이었다. 손흥민은 이근호(상무), 이청용, 구자철과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후반 1분 통쾌한 역전골도 뽑아냈다. 우려했던 연계 플레이도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손흥민과 김보경은 공존할 수 없는 걸까. 가능성은 있다. 홍 감독은 최적의 조합을 찾으려고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김보경은 말리 전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교체 투입돼 왼쪽 날개 손흥민과 호흡을 맞췄다. 둘은 여러 차례 세밀하고 세련된 패스를 주고받으며 기회를 만들었다. 이 전술을 가동할 경우 구자철의 위치가 변수가 될 수 있다. 홍 감독은 최전방 바로 아래 섀도 스트라이커 자리에 구자철을 염두에 둔다. 구자철은 홍 감독의 신뢰가 가장 큰 주장 후보 1순위다. 구자철이 섀도 스트라이커로 좋은 활약을 보이면 김보경과 손흥민은 왼쪽 날개 한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