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봄 김정은 체제가 막 들어선 시점이었다. ‘주간동아’ 902호에서 소개한 A와 마찬가지로 B 역시 북한 고위급 인사다. 그는 내가 만난 북한 사람 가운데 가장 놀랍고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우리가 기존에 가진 북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첫 만남은 B를 잘 아는 지인 덕분에 성사됐다. 우연하고도 갑작스러운 만남에 필자는 바짝 긴장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기자 신분을 감춰야 한다는 부담감(신분을 밝혔다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B의 높은 직위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남을 앞두고 느꼈던 긴장감은 막상 그를 만나자 눈 녹듯 사르르 없어져버렸다. 워낙 편하고 재미있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후 우리는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B는 편안한 중·장년 이미지를 가졌다. 특히 말을 잘한다. 발언이 거침없고 자신감에 차 있다. 표현도 재미있어서 필자를 여러 차례 웃게 했다. 사고는 상상 이상으로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편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 사람과는 대화가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B는 또 항상 일에 쫓겼다. 매번 업무상 통화로 바빴고 외부 일정도 많았다. 식사 약속을 잡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B는 북한 내부 문제점에 대해 과감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때때로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외부 인사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내부 문제점을 성토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언젠가 그가 북한 지도층 인사와 장시간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대화 도중 남북 경제협력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B가 금강산 관광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금강산 때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무슨 뜻일까.
금강산 관광 사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현대그룹이 1998년 11월 시작했다. 북한도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2002년 금강산 지구를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7월 북한군이 남측 관광객 박왕자 씨를 총격 살해하면서 관광 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북한은 재개를 주장했지만, 남한은 관광객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재개는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결국 북한은 2010년 4월 현대아산이 가진 독점사업권을 취소했다. 1년여 뒤인 2011년 11월에는 중국을 통한 금강산 국제관광을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국제사회 비난이 거셌지만, 북측은 책임을 고스란히 남한에게 돌렸다. B가 전화통화에서 언급한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금강산 때 한 번 당했으면 됐지”라는 표현은 국제 거래 관행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떼쓰기에 대해 비판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현대아산으로부터 독점사업권을 빼앗은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북한 지도부에서도 인지한다는 뜻이다.
늘 자유롭게 자기 소신을 얘기한 B이지만 그가 북한의 정치체제까지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발언은 최대한 자제했다. 주요 정치 현안이 대화 소재로 오를 때마다 북한 고위급 인사다운 발언을 했다. 천안함 사건이나 3차 핵실험 등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보인 반응은 북한이 발표한 공식 견해와 정확히 일치했다.
B를 만난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필자는 기자 신분을 감췄다. 만나면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필자가 기자라는 것을 모르는 그는 허심탄회하게 북한 현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다. 그의 얘기는 필자가 모르던, 그리고 많은 남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북한의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가 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가 시간이 흐른 뒤 사실로 확인됐다. 공연히 허풍을 떤 게 아니었던 셈이다.
대를 이어가며 외국서 교육
B 같은 인물이 요직에 오른다는 건 언젠가 북한이 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김정은 체제의 청신호라고 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북한의 올바른 변화는 물론 우리와 중국,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한 것일까.
B와 더불어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한 인물이 또 있었다. 30대 젊은 엘리트인 C다. 필자는 그를 김정은 체제에서 만났다. 그 역시 내 신분을 감춘 채 접촉했다. 필자가 만난 북한 엘리트 가운데 가장 젊다. 중진급 간부로 예의바르고 매너가 좋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중국어 구사력이 탁월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북한 지도층 인사의 자제였다. 중국 명문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북한의 많은 엘리트는 이처럼 대를 이어가며 외국에서 교육받고 실전에서 업무를 익힌다. 그 정도 배경이라면 거만할 법도 하지만, C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매우 겸손했다. 화려한 집안 출신과 능력에 비춰볼 때 C는 앞으로 북한을 이끌 주요 직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B나 C 같은 인물이 아무리 많아진다 해도 북한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아예 변화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D는 내가 만난 북한 사람 가운데 가장 편한 인사다. 통화도 자주 했고 만나기도 많이 만났다. D에게는 첫 만남 때부터 기자 신분을 밝혔다. 함께 한 술자리도 적잖았다. D가 편했던 이유는 그가 남한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이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남한 노래와 문화를 소재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때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노래나 코미디, 유행어를 필자보다 더 많이 알았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주도면밀한 인물이다.
그러나 D가 남한 사정에 밝다고 시각까지 바뀐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신중하고 빈틈이 없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살아 있던 시절, 그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남이나 북이나 권력자가 문제다. 정치라는 게 일반 국민을 위해야 하는데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으니….” 무심결에 내뱉은 필자의 말에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우리가 어디 그런가. 그런 말 하지 마라.” 필자가 다시 “북쪽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사실이지 않나. 북쪽 인민이 행복해하는가”라고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최고 존엄에 관한 말은 하지 마라”고 경고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술맛이 똑 떨어졌다. 적잖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이 정도 대화조차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와 알고 지내는 내내 어떤 경우에도 그의 입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북한 내부의 누군가를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상대가 기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술을 마실수록 D는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취해도 자기검열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현실, 언뜻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언제나 제3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북한 엘리트의 씁쓰레한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고의로 거짓 정보 흘리는 그들
E는 중견간부급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에프엠(FM)’과 ‘람보’다. 나는 그를 주로 술자리에서 봤다. 다른 북측 인사와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의 팔과 허벅지를 만져본 적이 있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마치 바윗돌처럼 온몸이 탄탄한 근육이었던 것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그는 보위부(우리의 국가정보원에 해당) 소속이 아니었다. 중국에 진출한 모 기관의 기관장이었다. 그럼에도 몸이 운동선수마냥 탄탄했던 것이다. 중국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인사 중에는 그처럼 근육질 몸을 가진 사람이 종종 있다. 십중팔구 군 출신 인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술에는 약했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서 아예 과음하지 않았고, 당연히 취하는 법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적도 없었다. 늘 정제된 표현으로 신중하게 말했다. 술자리에서 나를 유심히 살피던 그의 조심스러운 눈빛이 기억난다.
언젠가 다른 북측 인사와 함께 술을 마신 뒤 귀가하는 길에 그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일제 승용차였다. 운전을 어찌나 조심스럽게 하던지, 같이 있던 북측 인사가 빨리 좀 가자고 재촉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미지는 ‘근육질의 람보’와 더불어 ‘FM’이었다(그가 들려준 노무현 정부 때 우리 측과 벌였던 협상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북한 관련 취재원에 북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중국에는 평양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필자는 중국인과 한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대북 사업가를 만났다. 북한과 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 관련 정보를 취급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필자에게는 소중한 취재원이었다. 이외에도 중국에 있는 우리 공관 관계자나 일본 특파원도 취재를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북한 안팎의 다양한 취재원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자기 신분을 절대 노출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취재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많았다. 어떤 이는 필자와 만나면서 자기 정보가 노출됐다며 화를 낸 뒤 연락을 끊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으려고 고의로 거짓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이들을 만난 뒤 필자는 오보도 하고, 특종도 했다. 북한을 취재해본 경험이 있는 기자라면 모두 공감하는 사실 하나는 오보와 특종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언론인의 숙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첫 만남은 B를 잘 아는 지인 덕분에 성사됐다. 우연하고도 갑작스러운 만남에 필자는 바짝 긴장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기자 신분을 감춰야 한다는 부담감(신분을 밝혔다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B의 높은 직위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남을 앞두고 느꼈던 긴장감은 막상 그를 만나자 눈 녹듯 사르르 없어져버렸다. 워낙 편하고 재미있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후 우리는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B는 편안한 중·장년 이미지를 가졌다. 특히 말을 잘한다. 발언이 거침없고 자신감에 차 있다. 표현도 재미있어서 필자를 여러 차례 웃게 했다. 사고는 상상 이상으로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편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 사람과는 대화가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B는 또 항상 일에 쫓겼다. 매번 업무상 통화로 바빴고 외부 일정도 많았다. 식사 약속을 잡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B는 북한 내부 문제점에 대해 과감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때때로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외부 인사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내부 문제점을 성토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언젠가 그가 북한 지도층 인사와 장시간 통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대화 도중 남북 경제협력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B가 금강산 관광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금강산 때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무슨 뜻일까.
금강산 관광 사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현대그룹이 1998년 11월 시작했다. 북한도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2002년 금강산 지구를 관광특구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7월 북한군이 남측 관광객 박왕자 씨를 총격 살해하면서 관광 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북한은 재개를 주장했지만, 남한은 관광객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재개는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결국 북한은 2010년 4월 현대아산이 가진 독점사업권을 취소했다. 1년여 뒤인 2011년 11월에는 중국을 통한 금강산 국제관광을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국제사회 비난이 거셌지만, 북측은 책임을 고스란히 남한에게 돌렸다. B가 전화통화에서 언급한 “남쪽이 머저리입니까? 금강산 때 한 번 당했으면 됐지”라는 표현은 국제 거래 관행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떼쓰기에 대해 비판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현대아산으로부터 독점사업권을 빼앗은 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북한 지도부에서도 인지한다는 뜻이다.
늘 자유롭게 자기 소신을 얘기한 B이지만 그가 북한의 정치체제까지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발언은 최대한 자제했다. 주요 정치 현안이 대화 소재로 오를 때마다 북한 고위급 인사다운 발언을 했다. 천안함 사건이나 3차 핵실험 등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보인 반응은 북한이 발표한 공식 견해와 정확히 일치했다.
B를 만난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필자는 기자 신분을 감췄다. 만나면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필자가 기자라는 것을 모르는 그는 허심탄회하게 북한 현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다. 그의 얘기는 필자가 모르던, 그리고 많은 남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북한의 또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가 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가 시간이 흐른 뒤 사실로 확인됐다. 공연히 허풍을 떤 게 아니었던 셈이다.
대를 이어가며 외국서 교육
B 같은 인물이 요직에 오른다는 건 언젠가 북한이 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김정은 체제의 청신호라고 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북한의 올바른 변화는 물론 우리와 중국,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순진한 것일까.
B와 더불어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한 인물이 또 있었다. 30대 젊은 엘리트인 C다. 필자는 그를 김정은 체제에서 만났다. 그 역시 내 신분을 감춘 채 접촉했다. 필자가 만난 북한 엘리트 가운데 가장 젊다. 중진급 간부로 예의바르고 매너가 좋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중국어 구사력이 탁월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북한 지도층 인사의 자제였다. 중국 명문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북한의 많은 엘리트는 이처럼 대를 이어가며 외국에서 교육받고 실전에서 업무를 익힌다. 그 정도 배경이라면 거만할 법도 하지만, C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매우 겸손했다. 화려한 집안 출신과 능력에 비춰볼 때 C는 앞으로 북한을 이끌 주요 직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B나 C 같은 인물이 아무리 많아진다 해도 북한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아예 변화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D는 내가 만난 북한 사람 가운데 가장 편한 인사다. 통화도 자주 했고 만나기도 많이 만났다. D에게는 첫 만남 때부터 기자 신분을 밝혔다. 함께 한 술자리도 적잖았다. D가 편했던 이유는 그가 남한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이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남한 노래와 문화를 소재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때는 서울에서 유행하는 노래나 코미디, 유행어를 필자보다 더 많이 알았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주도면밀한 인물이다.
그러나 D가 남한 사정에 밝다고 시각까지 바뀐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신중하고 빈틈이 없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살아 있던 시절, 그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남이나 북이나 권력자가 문제다. 정치라는 게 일반 국민을 위해야 하는데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으니….” 무심결에 내뱉은 필자의 말에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우리가 어디 그런가. 그런 말 하지 마라.” 필자가 다시 “북쪽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사실이지 않나. 북쪽 인민이 행복해하는가”라고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최고 존엄에 관한 말은 하지 마라”고 경고하는 게 아닌가. 갑자기 술맛이 똑 떨어졌다. 적잖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이 정도 대화조차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와 알고 지내는 내내 어떤 경우에도 그의 입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북한 내부의 누군가를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상대가 기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술을 마실수록 D는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취해도 자기검열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현실, 언뜻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언제나 제3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북한 엘리트의 씁쓰레한 현실을 엿볼 수 있었다.
고의로 거짓 정보 흘리는 그들
필자가 북측 인사들을 만날 때 애용하던 베이징 켐핀스키 호텔 로비. 6자회담 등 북한 관련 외교 활동의 무대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는 술에는 약했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서 아예 과음하지 않았고, 당연히 취하는 법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적도 없었다. 늘 정제된 표현으로 신중하게 말했다. 술자리에서 나를 유심히 살피던 그의 조심스러운 눈빛이 기억난다.
언젠가 다른 북측 인사와 함께 술을 마신 뒤 귀가하는 길에 그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일제 승용차였다. 운전을 어찌나 조심스럽게 하던지, 같이 있던 북측 인사가 빨리 좀 가자고 재촉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이미지는 ‘근육질의 람보’와 더불어 ‘FM’이었다(그가 들려준 노무현 정부 때 우리 측과 벌였던 협상 뒷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북한 관련 취재원에 북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중국에는 평양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필자는 중국인과 한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대북 사업가를 만났다. 북한과 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 관련 정보를 취급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필자에게는 소중한 취재원이었다. 이외에도 중국에 있는 우리 공관 관계자나 일본 특파원도 취재를 위해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북한 안팎의 다양한 취재원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자기 신분을 절대 노출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취재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많았다. 어떤 이는 필자와 만나면서 자기 정보가 노출됐다며 화를 낸 뒤 연락을 끊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얻으려고 고의로 거짓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이들을 만난 뒤 필자는 오보도 하고, 특종도 했다. 북한을 취재해본 경험이 있는 기자라면 모두 공감하는 사실 하나는 오보와 특종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점이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언론인의 숙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