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先史)’는 ‘역사가 생겨나기 이전’을 말하고, ‘시대(時代)’는 ‘어떤 일정한 시기’를 의미해요. 다들 ‘소녀시대(少女時代)’ 잘 알죠?”
“야 뽀냘, 하라쇼(Я понял, хорошо·알겠습니다).”
동양학연구소에서 비롯…113년 역사 자랑
5월 14일 화요일 낮 12시(현지시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한 극동연방대(FEFU·연방대) 한국학대학. 지상 5층, 지하 1층 규모의 이 건물 2층 강의실에서 수업이 한창이다. 과목은 ‘한국어 읽기와 쓰기, 문법’. ‘조선식 주택’을 주제로 한 이 강의의 수강생은 한국학대학 3학년 학생 13명. 한국사를 전공한 바딤 S. 아쿨렌코(29) 교수로부터 한국 전통 주거문화와 관련한 단어와 그 의미를 전해 듣는 이들의 표정엔 호기심과 진지함이 교차했다.
대형 모니터에 속속 뜨는 시청각 화상에 시선을 고정하다가도 ‘무너지다’ ‘틈’ ‘벌어지다’ ‘외풍(外風)’ ‘벽돌’ ‘흔적’ 등 러시아에선 생경할 수밖에 없는 한국말이 등장할 때면 어김없이 학생과 교수 사이에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뒤섞이며 분주하게 질의문답이 오갔다. ‘선사시대’처럼 다소 어려운 한자어가 나오는 경우엔 한때 한류(韓流) 열풍의 정점에 섰던 인기 걸그룹 이름에 빗대 설명하다 보니 수업 분위기가 한층 부드럽고 화기애애했다.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바깥 풍경과 달리, 오후 1시까지 이어진 면학 열기는 뜨거웠다.
연방대 한국학대학은 세계 유일의 한국학 단과대학으로 이름 높다. 한국학대학이 설립된 때는 1995년 10월. 그러나 연방대의 한국학 연구 및 교육 역사는 한 세기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국립 종합대인 연방대의 전신(前身)은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칙령에 따라 189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한 동양학연구소다. 중국어학과와 일본어학과 2개 과로 문을 연 이 연구소는 1년 후 한국어학과도 개설했다. 이것이 러시아 최초이자 한국을 제외한 세계 최초의 한국어학과다. 19세기 말 러시아가 동양학연구소를 만든 까닭은 태평양연안 지역 국가들과 협력하는 전략을 적극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동양학연구소는 곧 동양학대학으로 승격했지만, 스탈린 독재 통치기간이던 1939년 폐교했다가 56년 다시 개교했다. 이후 자타가 공인하는 러시아 극동지역 최고(最古), 최대 규모이자 교육, 과학, 문화의 허브인 극동국립대로 거듭났고, 2008년엔 러시아연방정부로부터 러시아 내 최상위 5위권 대학에 선정된 바 있다. 2011년 2월엔 극동국립대와 극동주립기술대, 극동경제대, 우수리스크사범대 등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4개 대학이 하나로 통합돼 연방대로 재탄생했다.
연방대 캠퍼스는 단과대학별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단독 건물을 쓰긴 한국학대학도 마찬가지. 현 한국학대학 건물은 1995년 설립 당시 장치혁(81) 전 고합그룹 회장이 일제강점기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선친(장도빈 선생)의 뜻을 기리고, 한·러 우호증진과 한국학 연구를 위해 150만 달러를 지원해 건립, 기증한 것이다. 이 건물 1층엔 장도빈 선생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연방대는 9월 2학기 시작 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승용차로 20분쯤 떨어진 루스키 섬에 신축한 캠퍼스로 이전한다. 이미 강의동과 기숙사 등 관련 시설을 완공했고, 이전 작업이 속속 이뤄지고 있다. 루스키 섬은 2012년 9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곳. 서울시 넓이(605km2)의 6분의 1 정도인 루스키 섬은 원래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지만, 정상회의 당시 사용한 건물들을 연방대 캠퍼스로 활용하게 된다.
5월 14일 아침 일찍, 길이 3.1km에 달하는 연륙대교인 금각만(金角灣)대교를 건너 둘러본 루스키 섬 연방대 캠퍼스는 비가 내려선지 마냥 황량해 보였다. 하지만 1만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건물은 엄청난 규모였다. 연방대 전체 학생 수는 2만5000여 명. 연방대는 외국인 학생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외국인 유학생은 약 1000명이며, 2019년까지 매년 7000명을 유치하는 게 목표다.
한국학대학 공식 명칭은 ‘극동연방대 지방국제연구학교 한국학대학’. 5월 현재 학생은 102명, 교수는 25명이다. 원래 한국학대학은 5년제 전문가(Specialist) 학위 과정(현재 3학년 이상이 5년제 재학생에 해당)으로 한국어학과, 한국역사학과, 한국경제학과 3개 과(科)로 설립했다. 하지만 2년 전 학제 개편으로 4년제 한국어학과로 단일화했고, 그 대신 전공만 별도로 선택하게 됐다. 즉, 1~2학년은 한국어를 주로 배우고, 3학년 때부터는 한국어를 기본으로 하되 각자 한국경제, 한국역사, 한국어문 등 한국학 관련 전공을 택해 공부한 뒤 졸업과 동시에 학사학위를 받는 것.
우수한 인재들, 최고의 수업
러시아에서 한국학 과정을 운영하는 대학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를 비롯해 모스크바국립대, 국립고등경제대 등 15곳. 그중에서도 연방대 한국학대학은 가장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만큼 학생과 교수들의 자긍심이 대단하다.
한국경제사를 연구하고 2002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학대학 학장을 지낸 알렉세이 스타리치코프(39) 연방대 국제관계담당 부부총장은 “연방대 한국학대학은 전 세계에서 ‘한국학대학’이란 명칭을 지닌 유일한 단과대학이다. 케이팝(K-pop) 등 한류 영향 덕에 연해주에 그치지 않고 러시아 전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든다”면서 “한국학대학 학생들은 다른 단과대학 학생들에 비해 우수하며, 한국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리치코프 부부총장은 2010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한국학대학 4학년 ‘통·번역 이론과 실습’및 2학년 ‘한국어 듣기’ 과목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인의 자서전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사고방식, 고속성장 등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외교역이 크게 늘고 외국 기업의 진출도 활발해지면서 한국학대학 졸업생 상당수는 러시아 내 유럽 및 한국계 민간기업에 취업하거나 러시아 외무부와 연방보안청 등 국가기관, 지방정부, 남북한 러시아대사관과 영사관 등지로 진출한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학 연구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현지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도 꽤 좋다.
아쿨렌코 교수는 “1990년대부터 중국학보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는데, 지금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도가 비슷한 수준이다. 이는 블라디보스토크뿐 아니라 모스크바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면서 “한국학대학 학생들은 졸업 후 취직을 빨리 하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한국학대학은 그동안 한국어 교과서와 한국 경제, 역사, 정치, 문화 관련 서적도 꾸준히 출간해왔다(상자기사 참조). 실제로 기자가 둘러본 한국학대학 도서관 서가는 한국어 관련 서적과 논문으로 빼곡했다.
한국학대학은 매년 연방대 발해고고학연구센터와 협력해 발해학 학술대회도 연다. 2012년 10월에도 국제발해학대회를 주관해 러시아와 한국, 북한 학자들을 초청했다. 하지만 북한 학자들은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 대신 자신들의 주제 발표문을 전달했다고 한다.
연방대는 한국의 여러 대학과 교육 및 학술 교류도 한다. 이는 한국학대학 재학생이 한국으로 유학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2012년 1학기부터는 한양대와 한국학 관련 학점 인정 실시간 온라인 화상 강의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한국학의 세계적 확산을 위해 후원하는 ‘글로벌 이스쿨(Global e-school)’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 정치, 국제관계, 행정·정책, 경제·경영, 사회, 역사, 언어·문학, 문화·예술 등 인문학 및 사회과학 전 분야에서 한국학 관련 강의를 한국어, 러시아어, 영어로 한다. 2012년엔 ‘한국학 특강 시리즈’ ‘한국경제론’ ‘한국문화사’ ‘동아시아국제관계’ 강의가, 올해 1학기엔 ‘한국영상산업’ ‘한국경제세미나’ ‘한국예술사’ ‘한국어어휘론’ 강의가 이뤄졌다.
한양대와 극동연방대 한국학대학 간 온라인 화상 강의(왼쪽). 2012년 1월 사물놀이 동아리 ‘해동’의 국립남도국악원 방문 당시 발표회 모습.
연방대는 모든 강의실에 카메라와 회의 장비를 설치해놓아 인터넷 강의에 친숙하다. 또한 온라인 도서관을 이용하거나 전공분야 외 교수진의 오픈 강의에도 참여해 교육을 보강할 수 있다.
한국학대학엔 사물놀이 동아리도 있다. 이름은 ‘해동(海東)’. ‘해동’은 한국의 옛 별칭이다. 한국학대학 설립 당시부터 결성된 해동은 한국 문화 관련 행사가 열릴 때 사물놀이와 한국 전통춤을 공연한다. 현재 ‘해동’ 멤버는 23명. 1~4학년생들로, 선배가 후배를 가르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2012년 1월과 올해 1월 전남 진도군 국립남도국악원에서 열린 ‘한국을 가슴에 품다’라는 한국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해 국악 공연을 관람하고 자체 발표회도 가졌다.
‘해동’ 멤버인 한국학대학 한국경제학과 4학년 예카테리나 사프루노바(21) 씨는 “해동은 가장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동아리여서 4년 내내 활동하고 있다. 진도도 두 번 다 다녀왔다. ‘심청가’ ‘수궁가’도 조금 부를 줄 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고향인 그는 “한국학을 전공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부산에서 선박 수리 일을 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를 가봐서 한국과 친숙한 데다, 부모가 적극 권했기 때문”이라며 “졸업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국계 기업에 취업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위한 동해 연안 최대 전략 항구도시다. 또한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충지임을 감안한, 블라디보스토크란 도시명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 이젠 그 의미가 ‘동방을 제대로 알고 배우라’는 뜻으로 바뀌는 것 같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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