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헌법을 폐기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미국 입장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일본이 국방비를 더 지출한다면 미사일방어(MD)체제나 핵확산 방지 등이 활성화될 것이고, 더 많은 미군이 일본에 주둔할 수 있게 된다.…(일본의 우경화는) 결국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는 바람직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한 일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유익하다.…한일관계 악화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미일 3국이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세 나라 모두에게 이롭다고 확신한다.…한국도 일본의 군비 증강에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마이클 그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일본실장, 최근 나온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 공존의 길을 묻다’(서해문집)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베 내각의) 방위력 증강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확대 해석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질 것이다.…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이를 반대하고 비판하며 아베의 국수주의는 한국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일본의 방어 능력이 강화되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미·일 동맹에 이익이 되며 결과적으로 한국에도 좋다. 일본 열도의 기지·비행장·항구는 한미 동맹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 역할을 할 것이다. 일본이 이런 시설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면 이는 한국에도 유익하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중앙일보’ 7월 31일자 칼럼에서
워싱턴의 ‘투트랙 전략’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2013년 여름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 불러도 좋을 두 사람이다. 거듭되는 핵개발과 우경화 행보로 연일 비난의 도마에 오르는 주변 국가의 두 지도자. 그러나 이들과 관련해 워싱턴 인사들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김정은을 막으려면 아베를 용인해야” 하며, 일본 우경화에 대해 한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마이클 그린과 빅터 차는 모두 학자 출신으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전문지식과 현실감각을 겸비했다는 워싱턴의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혹은 동북아 문제 전문가들이 최근 들어 이러한 메시지를 반복해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굳이 일본의 ‘군사력(military power)’이라는 보편적 용어 대신 ‘방위력(defence power)’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점도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인식이 몇몇 전문가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백악관과 국무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공식입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계 인사들의 돌출발언에 대해서는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비판을 가하지만, 헌법 개정이나 재무장 움직임에 대해서는 에둘러 지지의 뜻을 표하는 식이다.
최근 시드니 사일러 미국 백악관 한반도담당 보좌관이 “미국은 항상 진실을 지지할 것이고, 성노예(sex slaves)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전직 미국 국무부 아시아문제 담당자는 “(한국 눈으로 보자면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역사 문제와 재무장을 분리된 이슈로 보는 워싱턴의 ‘투트랙(Two Track)’ 전략”이라고 요약했다. 역사 문제에서의 ‘헛발질’이 개헌 이슈까지 난항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백악관이 질책에 나선 것이라는 해설이다.
이러한 미국 속내에 일본이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바라는 계산이 깔렸음은 잘 알려진 사실. 부시 행정부 시기 동북아에서 미군의 구실을 가급적 축소하는 것이 워싱턴의 기본 정책노선이었다면, 최근 행보는 ‘일체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동맹국과 더 강하게 결속해 아시아 외 지역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분쟁 개입이나 국제정치 행보에도 재정적, 군사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하는 게 그 골자다. 이른바 ‘가치관 외교(Value Diplomacy)’로 불리는 아베 총리의 대외정책 노선은 이와 같은 미국 측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연합해 아시아는 물론 세계 곳곳의 이슈에 함께 대응해나간다는 이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자위대 대신 국방군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나 항공모함급 호위함 이즈모를 진수하는 등의 군사력 강화 행보도 모두 마찬가지다. 개헌이 쉽지 않다면 최소한 지금의 전수방위 원칙을 ‘동맹국에 대한 공격도 자국 본토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대응이 가능하다’는 해석으로 바꾸는 ‘집단적 자위권’이라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아베 내각은 이러한 내용을 오는 12월 새로 작성되는 ‘신방위대강’을 통해 구체화하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아시아 정책 근본은 중국 겨냥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눈으로 보자면 반갑기 짝이 없다. 9·11테러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일본은 자국이 공격당한 것과 동일하게 해석해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 3월 발효된 시퀘스터(Sequester)로 앞으로 10년간 9500억 달러의 국방예산 삭감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거꾸로 일본의 개헌 및 재무장 움직임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경계심을 높이는 한국의 태도는 워싱턴에게 방해물이다.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미국 측 인사들의 발언이 최근 쏟아져 나오는 배경이다.
눈여겨볼 것은 일본 재무장이 한국에도 유리하다며 미국 측 인사들이 제시하는 첫 번째 근거가 북한 위협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 5027’은 북한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주일미군이 후방기지를 맡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의 대(對)잠수함·대특수부대 전력이 취약해 북한의 공격에 뚫리면 한국 방어에도 치명적 약점이 될 것이라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막으려면 일본의 재무장이 필수라는 것. 헌법 개정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탄력을 받으면 북한 탄도미사일 전력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마디로 북한과 일본 중 누가 더 한국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인지 생각해보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재균형(rebalancing) 정책’으로 요약되는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이 근본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것임은 미국 측 당국자들도 공공연히 인정하는 바다. 당장의 명분은 북한이지만, 속내는 베이징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뜻. 한 전직 외교안보라인 고위관계자는 “한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미국 측 주장은 중국에 맞서는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자는 요구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한국이 일본의 우경화와 관련해 한목소리를 내는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보조를 맞춰달라는 요청이라는 뜻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정보보호협정 등 한일 군사협력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의 노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미국 측 관점을 수용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후폭풍을 똑똑히 목격한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를 고스란히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거꾸로 아베의 ‘폭주’를 막으려면 베이징과의 공조가 필수적이지만, 워싱턴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명확하다. 어느 쪽으로 가든 쉽지 않은 딜레마다.”
일본 재무장 신경전, 우리 선택은?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의 헌법 개정이나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 문제 등으로 자칫 동아시아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될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 주장에 대해 어느 때보다 공개 언급을 삼가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러나 동북아의 기본 판도상 이러한 태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위키리크스’ 등을 통해 공개된 한미 간 물밑대화는 민주당과 공화당 행정부를 막론하고 미국 측이 이에 대한 압박을 여러 차례 가해왔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본 정계 인사들의 연이은 망언이 크게 불거진 탓에 당장은 목소리를 낮추고 있지만, ‘과거사 논란’의 수위가 꺾이면 오바마 행정부의 행보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베 내각의 보통국가화 행보가 당장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국제정치 전문가는 많지 않다. 5월 ‘아사히신문’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 개정과 관련해 반대 52%, 찬성 39%로 나온 바 있다. 참의원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국민투표 통과라는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침탈하는 등의 극단적인 무리수를 둘 가능성 역시 높지 않다는 게 전·현직 당국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정작 아베 내각의 우경화 흐름이 한국에게 위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까지 살펴본 딜레마를 코앞에 들이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촉발되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근본적인 질서 재편 판도 위에서 한국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셈이다. 김정은을 막으려면 아베의 손을 잡으라는 워싱턴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옳을까. 일본 재무장을 둘러싸고 베이징과 워싱턴이 벌이는 신경전에서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한 안보부처 고위관계자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최선의 방책은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서지 않는 것이겠지만, 상황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하다”고 말했다. 일본이 다시 한 번 악연으로 얽혀 드는 순간이다.
-마이클 그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일본실장, 최근 나온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 공존의 길을 묻다’(서해문집)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베 내각의) 방위력 증강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확대 해석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질 것이다.…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이를 반대하고 비판하며 아베의 국수주의는 한국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일본의 방어 능력이 강화되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는 미·일 동맹에 이익이 되며 결과적으로 한국에도 좋다. 일본 열도의 기지·비행장·항구는 한미 동맹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 역할을 할 것이다. 일본이 이런 시설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다면 이는 한국에도 유익하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중앙일보’ 7월 31일자 칼럼에서
워싱턴의 ‘투트랙 전략’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2013년 여름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 불러도 좋을 두 사람이다. 거듭되는 핵개발과 우경화 행보로 연일 비난의 도마에 오르는 주변 국가의 두 지도자. 그러나 이들과 관련해 워싱턴 인사들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김정은을 막으려면 아베를 용인해야” 하며, 일본 우경화에 대해 한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이다.
마이클 그린과 빅터 차는 모두 학자 출신으로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전문지식과 현실감각을 겸비했다는 워싱턴의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혹은 동북아 문제 전문가들이 최근 들어 이러한 메시지를 반복해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굳이 일본의 ‘군사력(military power)’이라는 보편적 용어 대신 ‘방위력(defence power)’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점도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인식이 몇몇 전문가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다. 백악관과 국무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공식입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정계 인사들의 돌출발언에 대해서는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비판을 가하지만, 헌법 개정이나 재무장 움직임에 대해서는 에둘러 지지의 뜻을 표하는 식이다.
최근 시드니 사일러 미국 백악관 한반도담당 보좌관이 “미국은 항상 진실을 지지할 것이고, 성노예(sex slaves)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전직 미국 국무부 아시아문제 담당자는 “(한국 눈으로 보자면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역사 문제와 재무장을 분리된 이슈로 보는 워싱턴의 ‘투트랙(Two Track)’ 전략”이라고 요약했다. 역사 문제에서의 ‘헛발질’이 개헌 이슈까지 난항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백악관이 질책에 나선 것이라는 해설이다.
이러한 미국 속내에 일본이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바라는 계산이 깔렸음은 잘 알려진 사실. 부시 행정부 시기 동북아에서 미군의 구실을 가급적 축소하는 것이 워싱턴의 기본 정책노선이었다면, 최근 행보는 ‘일체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동맹국과 더 강하게 결속해 아시아 외 지역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분쟁 개입이나 국제정치 행보에도 재정적, 군사적으로 동참하기를 원하는 게 그 골자다. 이른바 ‘가치관 외교(Value Diplomacy)’로 불리는 아베 총리의 대외정책 노선은 이와 같은 미국 측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연합해 아시아는 물론 세계 곳곳의 이슈에 함께 대응해나간다는 이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자위대 대신 국방군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나 항공모함급 호위함 이즈모를 진수하는 등의 군사력 강화 행보도 모두 마찬가지다. 개헌이 쉽지 않다면 최소한 지금의 전수방위 원칙을 ‘동맹국에 대한 공격도 자국 본토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대응이 가능하다’는 해석으로 바꾸는 ‘집단적 자위권’이라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아베 내각은 이러한 내용을 오는 12월 새로 작성되는 ‘신방위대강’을 통해 구체화하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아시아 정책 근본은 중국 겨냥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눈으로 보자면 반갑기 짝이 없다. 9·11테러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일본은 자국이 공격당한 것과 동일하게 해석해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이 되기 때문. 3월 발효된 시퀘스터(Sequester)로 앞으로 10년간 9500억 달러의 국방예산 삭감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거꾸로 일본의 개헌 및 재무장 움직임에 대해 하루가 다르게 경계심을 높이는 한국의 태도는 워싱턴에게 방해물이다.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미국 측 인사들의 발언이 최근 쏟아져 나오는 배경이다.
눈여겨볼 것은 일본 재무장이 한국에도 유리하다며 미국 측 인사들이 제시하는 첫 번째 근거가 북한 위협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계획 5027’은 북한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주일미군이 후방기지를 맡게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의 대(對)잠수함·대특수부대 전력이 취약해 북한의 공격에 뚫리면 한국 방어에도 치명적 약점이 될 것이라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막으려면 일본의 재무장이 필수라는 것. 헌법 개정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 추진하는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 탄력을 받으면 북한 탄도미사일 전력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마디로 북한과 일본 중 누가 더 한국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인지 생각해보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재균형(rebalancing) 정책’으로 요약되는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정책이 근본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것임은 미국 측 당국자들도 공공연히 인정하는 바다. 당장의 명분은 북한이지만, 속내는 베이징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뜻. 한 전직 외교안보라인 고위관계자는 “한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미국 측 주장은 중국에 맞서는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자는 요구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한국이 일본의 우경화와 관련해 한목소리를 내는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보조를 맞춰달라는 요청이라는 뜻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정보보호협정 등 한일 군사협력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의 노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미국 측 관점을 수용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후폭풍을 똑똑히 목격한 박근혜 정부로서는 이를 고스란히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거꾸로 아베의 ‘폭주’를 막으려면 베이징과의 공조가 필수적이지만, 워싱턴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명확하다. 어느 쪽으로 가든 쉽지 않은 딜레마다.”
일본 재무장 신경전, 우리 선택은?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의 헌법 개정이나 집단적 자위권 해석 변경 문제 등으로 자칫 동아시아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될 수 있음을 충분히 감안하는 듯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보통국가화 주장에 대해 어느 때보다 공개 언급을 삼가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러나 동북아의 기본 판도상 이러한 태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위키리크스’ 등을 통해 공개된 한미 간 물밑대화는 민주당과 공화당 행정부를 막론하고 미국 측이 이에 대한 압박을 여러 차례 가해왔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본 정계 인사들의 연이은 망언이 크게 불거진 탓에 당장은 목소리를 낮추고 있지만, ‘과거사 논란’의 수위가 꺾이면 오바마 행정부의 행보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베 내각의 보통국가화 행보가 당장 군국주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국제정치 전문가는 많지 않다. 5월 ‘아사히신문’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 개정과 관련해 반대 52%, 찬성 39%로 나온 바 있다. 참의원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국민투표 통과라는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침탈하는 등의 극단적인 무리수를 둘 가능성 역시 높지 않다는 게 전·현직 당국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정작 아베 내각의 우경화 흐름이 한국에게 위험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까지 살펴본 딜레마를 코앞에 들이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촉발되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근본적인 질서 재편 판도 위에서 한국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셈이다. 김정은을 막으려면 아베의 손을 잡으라는 워싱턴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옳을까. 일본 재무장을 둘러싸고 베이징과 워싱턴이 벌이는 신경전에서는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한 안보부처 고위관계자는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최선의 방책은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서지 않는 것이겠지만, 상황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하다”고 말했다. 일본이 다시 한 번 악연으로 얽혀 드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