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도서관에는 취업과 각종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인 학생들이 무더위도 잊은 채 책과 씨름하고 있다.
최근에는 니트족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두 얼굴의 ‘레벨업’족이 등장했다. 어두운 PC방에서 게임 레벨업만 꿈꾸는 그룹과 도서관이나 시험장에서 스펙 레벨업에만 몰두하는 그룹이 그들이다. 이들은 청년들을 배제하는 사회구조와 부족한 자신감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면서 부모에게 기대려고만 하는 게 특징. 사회심리학자들은 극단적인 두 레벨업족의 탄생에 대해 그만한 사회적 동기가 있다고 말한다.
구직 포기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태
먼저 스펙만 다지면서 취업 도전을 한없이 유예하는 유형을 살펴보자. 스펙 쌓기형 레벨업족이 바로 그들. 이주황(27·가명) 씨는 올해 초 대학 졸업 후 8월이 되도록 이력서 한 장 써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구직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토익시험도 보고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이점을 살려 취업해보려고 정보처리기사 시험도 준비 중이다.
현재 이씨는 부모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일손을 보태며 반년 가까이 쉬고 있는 상태. 토익과 정보처리기사 시험을 모두 본 뒤에는 어떤 회사에 지원해야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없다. 그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으냐는 질문에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우선은 어디든 취업에 필요한 자격이라고 생각해 자격증 시험부터 준비하고 있어요.”
이씨는 토익과 정보처리기사 시험을 본 후에는 컴퓨터 활용 실무 회화 능력 테스트인 오픽(OPIc·Oral Proficiency Interview-Computer)과 토익 스피킹 시험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는 “당장 다가오는 하반기 채용일정에 맞춰 이력서를 써보겠지만 썩 자신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격증이나 높은 토익 점수 없이는 채용 이력서조차 넣을 수 없다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 하지만 준비과정이 길어지면서 막연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자격증 따기에만 몰두하는 현상도 보인다.
취업준비생 김윤정(27·가명) 씨의 경우 지난해 3월 졸업 후 토익, 모스(MOS·Microsoft Office Specialist), 토익 스피킹, 컴퓨터 활용능력 등의 자격증 외에 ‘한국 실용 글쓰기’ 시험에도 응시했다. 실용 글쓰기 시험에 응시한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취업하려면 어떤 자격증이든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고 말한다. “딱히 특정 회사나 직종에 응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없다”면서도 하반기 채용일정이 뜨기 전에 한자 자격증 시험에도 도전할 생각이라고. 그는 대학 졸업 후 시즌마다 대기업에 이력서는 넣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소재 대학 경영학과 출신인 김씨는 “(대기업 입사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질 때마다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알지 못하니 자격증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며 “일반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그렇게 많은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지만 눈높이를 낮추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스펙 쌓기 레벨업족의 대척점에 게임 레벨업족이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PC방에서 자신의 게임 캐릭터 레벨업에 열중하고 있다. 7월 30일 오후 서울 성북구 한 PC방에서 만난 김상원(28·가명) 씨도 빈 라면용기를 한쪽에 밀어놓은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 늦게 PC방에 와 4시간째 게임을 하고 있다. 끼니는 라면으로 대충 때운다. 어제도 새벽이 다 돼서야 집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머리도 자주 감지 않는 듯 보였다. 김씨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다 땄지만 신분으로만 따지면 학생이다.
“졸업 논문을 제출하지 않아 아직은 수료 상태입니다. 취업하려면 토익 점수 등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서 졸업을 미루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취업 시험 준비를 시작한 건 아니고요. 구체적인 계획이요? 앞날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만 그냥 생각만 계속하는 거죠. 사실 여름방학 때 영어학원을 다니려고 했는데 어영부영하는 사이 시간이 벌써 한 달이나 흘렀어요.”
김씨는 “졸업 때까지 반년은 남은 셈”이라며 자신을 위로했지만, “아직은 이력서를 쓸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책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부족
PC방에서 한 청년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권정혜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의 선택보다 부모에게 의존해온 청년은 어려움이 닥칠 경우 자꾸만 피하고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행동양상은 심리학적 ‘회피대처’로 보인다. 특히 PC방에서 현실을 외면하는 젊은이에게서 이런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스펙 쌓기 레벨업족에 대해선 단순히 현실 회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는 게 권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스펙 쌓기 레벨업족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아온 점이 내면화돼 자격증 따기, 스펙 쌓기에만 몰두하는 현상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90점을 맞았을 때도 교실에서 몇 명이나 90점을 맞았는지 비교하는 우리 가정의 현실 속에서 부모의 기준을 자기화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
“우리 사회가 실제로 많은 자격증을 요구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 기준에 맞추다 보니 무조건 자격증부터 계속 따고 봐야 한다고 부담감을 느끼는 거죠. 시시한 직장이라고 여겨지면 가기를 꺼리게 되고, 그게 싫으니까 준비부터 완벽하게 갖추려는 겁니다. 이런 유형들은 먼저 회사에 지원해보고 실제로 직장에 대한 경험도 해보면서 다음 단계를 모색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죠.”
권 교수는 이들은 부모가 정해주는 삶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부모가 대신 책임져주는 환경에 너무 익숙하다고 꼬집었다. 조금만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스스로 대처할 능력이 없고, 실패나 잘못으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조그만 선택이라도 자신이 책임지고,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능력은 청년기가 된다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의식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하는데, 떠미는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