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최고구속 기록을 보유한 LG 투수 레다메스 리즈가 6월 8일 서울 잠실에서 경기 종료 후 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왼쪽). 공이 느려 ‘모닥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두산 선발투수 유희관이 7월 2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프로야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투수에 대해서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스피드를 중요시한다. 용병 선발의 제1조건은 150km를 넘나드는 빠른 공이다. 토종 투수들은 스프링캠프 때마다 구속을 높이려고 열과 성을 다한다. 그런데 올 시즌 이와 같은 ‘스피드 먼저’ 시대에 역행하는 투수가 여럿 나타났다. 한국 프로야구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은 ‘느린 공 투수’가 그들이다.
삼성 윤성환, LG 우규민 등 승승장구
두산 유희관은 2013년을 대표하는 ‘느린 공 투수’다. 팬들은 그를 ‘모닥볼러’라고 부른다. 강속구 투수를 ‘파이어볼러(fireballer)’라고 부르는 것에 빗대 모닥불과 볼러를 합친 말이다. 뒤늦게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그는 7월 10일까지 올 시즌 25게임에 등판해 4승1패1세이브 방어율 2.60을 기록 중이다. 7월 6일 서울 잠실 삼성전에서는 7.1이닝 1실점 호투로 승리 투수가 됐다.
유희관의 공은 구질에 관계없이 모두 느리다. 직구는 기껏해야 130km를 찍는다. 150km 안팎은 돼야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 현실에서 그의 직구 구속은 여느 투수들의 변화구 속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커브 평균 구속은 100km대로 다른 투수보다 30km 이상 느리다. 하지만 유희관은 당당히 두산 선발 로테이션을 꿰차고 상대 타자들을 농락하고 있다. 특히 70km대 초반의 ‘저속 커브’는 팬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주자가 없을 때 한 번씩 구사하는 저속 커브는 다른 강속구 투수의 절반 속도에 불과하다. 타자는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고, 설령 배트에 맞힌다고 해도 주로 땅볼이 된다.
그는 저속 커브를 던질 때 일반 커브와 똑같은 그립, 힘을 쓰지만 손목을 비틀어 돌리는 속도를 조금 늦춘다. 저속 커브는 ‘느림의 미학’을 상징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다. 올 시즌 유희관뿐 아니라 삼성 윤성환, LG 우규민, NC 손민한도 다른 투수보다 적게는 15km, 많게는 20km까지 느린 직구를 던지면서 강속구 투수들이 머쓱해질 만큼 빼어난 성적을 자랑한다. 특히 긴 공백기를 딛고 재기한 손민한은 130km대 직구가 150km대 직구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해태 개막전 투수였던 방수원은 84년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 삼미전에서 한국 프로야구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노히트노런이란 개념도 낯설던 시절, 대기록을 세운 그의 직구 최고구속은 130km에 불과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비쩍 말라 아무리 빨리 던져도 구속이 나오질 않았다. 이를 극복하려고 실밥 매듭을 잡아 틀어도 보고, 비틀어도 봤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낸 특유의 꺾이고, 휘고, 솟구치고, 가라앉는 변화무쌍한 공으로 타자들을 현혹했다.
방수원 이후 장호연, 성준, 전병호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느린 공 투수’다. 장호연은 통산 109승을 거뒀으며, 성준과 전병호 역시 통산 97승, 72승을 챙겼다. 이들은 모두 140km에도 훨씬 못 미치는 직구로 이름을 날렸다.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느린 공 투수’는 제이미 모이어다. 50세까지 마운드에 오른 그는 130km대 초반의 평균 구속에도 세월을 거스르는 활약을 펼치며 2001년과 2003년 시애틀 소속으로 각각 20승, 21승을 거두는 등 전성기를 보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방수원 투수가 현역 시절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신시내티 레즈의 마무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이 2011년 기록한 106마일(약 170.6km)이 최고구속이다. 전광판에 기록된 이 속도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의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빠른 공이다. 채프먼은 직구 평균 구속이 160km에 이른다. LA 다저스 류현진의 팀 동료로 최근 빅리그에 데뷔한 호세 도밍게스도 직구 평균 구속이 100마일(약 161km)이다.
투구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는 18.44m다. 시속 140~150km로 던졌을 때 투수 손을 떠난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0.43~0.46초다. 현장에서는 평균적으로 0.4초로 계산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타자는 공이 투수 손을 떠난 뒤 0.2초 후부터 반응한다. 방망이를 휘두를지 말지를 판단한 뒤 ‘찰나의 순간’에 움직여야만 공을 제대로 때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느린 공 투수’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타자가 2배 가까운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희관 같은 70km대 공을 던지는 투수가 살아남는 이유는 왜일까. 구속보다 제구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차명석 LG 투수코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연애할 때는 얼굴을 보고 결혼할 때는 성품을 보듯, 스카우트할 때는 구속을 보지만 1군 현장에선 제구력을 본다.”
제구력·수읽기·공 배합 3박자 갖춰야
고교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는 구속이 빠르면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1군 무대에서 통하는 데는 정작 구속보다 제구력이 더 중요하다. ‘느린 공 투수’가 살아남는 이유는 구석구석을 찌르는 칼날 같은 제구력이 있어서다. 선동열 KIA 감독이 LA 다저스 도밍게스를 예로 들며 “공이 빠르다고 무턱대고 직구만 던지면 타자에게 쉽게 얻어맞는다”고 말하는 것도 제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평균 속도 이하의 느린 공으로 살아남는 투수의 특징은 ‘낮은 스트라이크’를 잘 던진다는 점. 스트라이크존을 사각형으로 9등분했을 때, 아랫줄에 들어가는 낮은 스트라이크를 던져 땅볼 타구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낮은 스트라이크는 장타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다.
‘느림의 미학’을 실현하는 투수는 타자의 타이밍도 잘 빼앗는다. 타자 심리를 파악한 뒤 수읽기에 따른 공 배합을 한다. 70km대 커브를 본 타자는 130km대 직구를 150km처럼 느낄 수 있다. 느린 공을 굳이 빠르게 하려고 애쓰기보다 느린 공을 적절하게 배합해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에서 이길 줄 안다.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305승에 빛나는 명투수 톰 글래빈이 남긴 명언이다. 글래빈 역시 직구 평균 구속이 140km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느린 공 투수였다. 그의 말처럼 볼이 느리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투수가 강속구 투수 사이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열정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