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성화(聖畵)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저명한 화가 대부분은 성경을 그리다 도중에 명성을 얻어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난 누군가를 사사하지 않은 데다 서울대, 홍익대 출신이 아니라서 주목받지 못했고, 신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서 ‘서봉남 성화 초대전’을 여는 서봉남(71) 화백.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성화 77점으로 표현한 그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5월 1일 기자와 만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기독교계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주말에 취미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33세에 꿈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림 전도를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7세, 5세인 남매와 전업주부인 아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내가 동의해 6개월 만에 사표를 냈고, 그때부터 69세까지 성화 작업에 몰두했다.”
물론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신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으며 나아갔다. 그때부터 미술을 독학했다. 스승에게 배우면 스승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타고난 재주를 스스로 갈고 닦아 대가가 된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미술 전공생은 물론 관련 책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5년 동안 35개국을 다니며 자료를 구했고, 1994년 집문당 출판사에서 ‘기독교미술사’를 출간했다. 자료 수집은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는 아시아대회 미술 분야 한국 대표로 뽑혀서 갈 수 있었다. 중국은 문화사찰단 자격으로, 인도는 국제장애인올림픽에 미술부문 심사위원으로 갔다.”
35년간 숙명으로 알고 매달려
그는 기독교미술을 연구하면서 성화 작업에 열중했다. 성경뿐 아니라 문화사, 역사 등 주변 자료들을 탐독한 뒤 그림을 그렸다. 물론 이 작업만 할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건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일. 누군가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팔아야 하는 것이 전업작가의 숙명이기에 팔리는 그림만 공개하고 성화는 숨겨뒀다.
“사람이 이래서 죽는구나 싶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아침에 쌀독이 비면 오늘부터 굶는다는 사실에 겁이 나 종일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갔다. 그런데 밤에 집에 들어가면 교회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쌀을 갖다놓았다. 어떤 땐 누군가가 그림을 사줘 쌀을 샀다. 아내가 잘 못 먹고 살아선지 30대 후반부터 위장병을 앓았고, 유방암이 발병해 고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들은 굶기지 않았고, 둘 다 명문대를 졸업해 제 몫을 하고 살아간다.”
서 화백은 ‘기독교 100주년, 가톨릭 200주년’을 맞아 아파트를 처분해 5000만 원을 들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그림(4000호)인 ‘영광’을 그렸을 정도로 추진력이 강한 편. 하지만 2012년 성화 시리즈를 완성했는데도 누군가에게 ‘그림을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 성화를 숨겨뒀다. 이번 전시는 다행히 미술등록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열 수 있었다.
“기독교 화가들은 시대상을 반영해 그림을 그린다. 시대 옷을 입히고 그 시대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낸다. 하지만 나는 유행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했다. 앞으로도 500년 전에 봐도, 500년 후에 봐도 현재처럼 느끼며 감동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
5월 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서 ‘서봉남 성화 초대전’을 여는 서봉남(71) 화백.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을 성화 77점으로 표현한 그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5월 1일 기자와 만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기독교계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주말에 취미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33세에 꿈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림 전도를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7세, 5세인 남매와 전업주부인 아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내가 동의해 6개월 만에 사표를 냈고, 그때부터 69세까지 성화 작업에 몰두했다.”
물론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신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믿으며 나아갔다. 그때부터 미술을 독학했다. 스승에게 배우면 스승을 뛰어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타고난 재주를 스스로 갈고 닦아 대가가 된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기독교미술 전공생은 물론 관련 책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5년 동안 35개국을 다니며 자료를 구했고, 1994년 집문당 출판사에서 ‘기독교미술사’를 출간했다. 자료 수집은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는 아시아대회 미술 분야 한국 대표로 뽑혀서 갈 수 있었다. 중국은 문화사찰단 자격으로, 인도는 국제장애인올림픽에 미술부문 심사위원으로 갔다.”
35년간 숙명으로 알고 매달려
그는 기독교미술을 연구하면서 성화 작업에 열중했다. 성경뿐 아니라 문화사, 역사 등 주변 자료들을 탐독한 뒤 그림을 그렸다. 물론 이 작업만 할 수는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건 팔리는 그림을 그리는 일. 누군가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팔아야 하는 것이 전업작가의 숙명이기에 팔리는 그림만 공개하고 성화는 숨겨뒀다.
“사람이 이래서 죽는구나 싶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아침에 쌀독이 비면 오늘부터 굶는다는 사실에 겁이 나 종일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갔다. 그런데 밤에 집에 들어가면 교회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쌀을 갖다놓았다. 어떤 땐 누군가가 그림을 사줘 쌀을 샀다. 아내가 잘 못 먹고 살아선지 30대 후반부터 위장병을 앓았고, 유방암이 발병해 고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들은 굶기지 않았고, 둘 다 명문대를 졸업해 제 몫을 하고 살아간다.”
서 화백은 ‘기독교 100주년, 가톨릭 200주년’을 맞아 아파트를 처분해 5000만 원을 들여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그림(4000호)인 ‘영광’을 그렸을 정도로 추진력이 강한 편. 하지만 2012년 성화 시리즈를 완성했는데도 누군가에게 ‘그림을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 성화를 숨겨뒀다. 이번 전시는 다행히 미술등록협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열 수 있었다.
“기독교 화가들은 시대상을 반영해 그림을 그린다. 시대 옷을 입히고 그 시대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낸다. 하지만 나는 유행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했다. 앞으로도 500년 전에 봐도, 500년 후에 봐도 현재처럼 느끼며 감동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