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관료를 포함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성접대한 장소로 의심받는 별장.
지난해 11월 24일. 서울동부지검 청사에서 전모 전 검사(31·기소)가 피의자와 성관계를 한 사건이 불거진 직후 수도권 지검의 한 검사는 자조적인 어투로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시 검찰 역사상 초유의 성추문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검찰청(대검) 연구관(평검사)들과 일선 지검 검사들은 토요일에도 출근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전 검사의 부적절한 성관계가 토요일 오후 집무실에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나면서 가족에게 웃지 못할 오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최근 김학의 법무부 차관이 한 건설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으로 사퇴하자 검찰 사기는 또 한 번 땅에 곤두박질쳤다. 전 전 검사의 성추문을 ‘갓 임관한 로스쿨 출신 수습의 치기 어린 실수’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던 검사들은 아예 말을 잃었다. 한 검사는 “아내가 ‘당신은 별장 같은 곳 안 가봤느냐’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며 씁쓸해했다.
뇌물수수, 성추문, 사건알선 의혹이 연이어 불거진 것도 모자라 ‘검란(檢亂)’에 ‘성접대 의혹’까지…. 검찰이 수사가 아닌 내부비리와 갈등으로 이만큼이나 시끄러운 것은 검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검찰 안팎에선 이른바 ‘잘나가는’ 귀족 검사들이 저지른 문제 때문에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검사가 덩달아 매도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 잔혹사’를 바라보는 일선 평검사들의 솔직한 심정을 가감 없이 소개한다.
검찰 잔혹사의 시작… ‘스폰서 검사’
‘별장 성접대’ 의혹이 제기된 김학의 법무부 차관이 3월 21일 사표를 제출하고 법무부 청사를 나서고 있다.
곧바로 검찰 내부 진상조사단과 특별검사(특검) 수사가 이어졌지만 한승철 전 대검 감찰부장과 현직 부장검사 2명, 평검사 1명만 기소됐다. 정씨의 폭로를 입증할 근거가 없고, 접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검찰 직무와 관련한 대가성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결과는 초라했지만 이 사건은 검찰 내부의 공공연한 비밀이던 스폰서 문화를 밖으로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월말 사건처리가 끝나면 부장검사가 검사들을 유흥주점에 데려가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며 “당시 술값 계산을 해주는 스폰서가 한두 명은 있어야 부장 대접을 받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스폰서 검사 사건이 터졌을 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일선 검사들은 또 한편으로 선배들에 대한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이 사건으로 모든 검사가 스폰서 하나씩은 달고 사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됐다는 것. 한 검사는 “20세기에 이미 사라진 구시대적 관행이 이제야 드러나면서 스폰서라곤 본 적도 없는 우리만 피해를 입게 됐다”고 성토했다. 또 다른 검사는 “검찰이 권력을 휘두를 때 선배들이 쌓은 원죄(原罪)가 후배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사건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잔혹사’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뇌물 검사’로 자존심에 상처
김광준 전 검사의 뇌물수수 의혹에 대한 경찰 내사 사실이 알려진 지난해 11월. 검찰 내부에선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의견이 중론을 이뤘다. 그러나 특임검사팀이 10억 원대 뇌물수수 의혹으로 김 전 검사를 구속 기소하면서 이 의혹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2010년에는 ‘그랜저 검사’ 사건도 있었다. 특임검사팀은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사건 청탁 대가로 그랜저 승용차 등 4600만 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정인균 전 부장검사를 구속 기소했다. 그는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됐다.
뇌물 검사와 그랜저 검사 사건은 일선 검사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상처를 줬다. 스폰서가 ‘떡값’을 주던 관행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보험’ 성격이 짙지만, 이 두 사건은 검사가 이미 진행 중인 사건을 놓고 사건 관계자와 뒷거래를 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 컸다. 일선 검사에게 이는 “적어도 검사는 자기 직분인 수사를 놓고 돈을 받지는 않는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 무너져버린 사건이었다. 지난해 12월 마약 피의자에게 자기 매형을 변호사로 선임하게 한 ‘브로커 검사’ 사건도 비슷한 의미에서 검사들의 자긍심을 무너뜨렸다.
수도권 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검찰 위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던 1990년대와 달리 지금은 기업이나 변호사들이 ‘떡값’ 등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검찰을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다”며 “앞으로 사건 관계인이 수사가 벌어진 뒤 큰돈으로 검사를 매수하려는 시도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한 검사는 “예전에는 검찰을 나간 뒤 몇 년이면 수십억 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검찰에 있는 동안은 청렴성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당연시됐다”며 “뇌물 검사와 그랜저 검사 사건은 변호사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검사 직무도 경제적 이익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지적했다.
‘떡값’이나 뇌물 스캔들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일까. 뒤이어 불거진 ‘성추문’에 검사들 사이에선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전 전 검사가 집무실에서 피의자와 성관계를 가진 사건은 좁은 공간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매일 밤새워 일하는 검사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검사들 사이에선 “갓 일을 배우기 시작한 햇병아리 검사의 잘못이지만 조직 기강이 그만큼 해이해졌다는 점에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의 측근과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내사·수사 무마 청탁과 함께 10억 원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서울고검 김광준 검사. 여성 피의자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된 전모 검사.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사건 청탁 대가로 그랜저를 선물받아 구속된 정모 부장검사. 사상 초유의 검란(檢亂)으로 물러난 한상대 검찰총장(왼쪽부터).
그러나 최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성접대’ 의혹이 알려지면서 꺼져가던 불이 다시 타올랐다. 청와대의 강한 권고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김 차관이 즉각 사표를 내자 “역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게 아니냐”는 반응도 많아졌다.
아직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성접대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일선 검사는 “접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검사가 건설업자를 알고 지냈다면 그것만으로도 부적절하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룬다. 경남지역 검찰청의 한 검사는 “밖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것이 좋은 리더의 조건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기준이 바뀌었다”며 “소위 ‘좋은 자리’를 바라지 않고 묵묵하게 고소·고발 사건을 처리하는 검사들은 ‘잘나간다는 사람이 저렇게 놀 때 나는 뭘 했나’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일선 검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의 중심에는 지난해 12월 한상대 전 검찰총장의 사퇴로 이어진 ‘검란’도 있다. 물론 검찰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항명’이나 ‘집단 반발’로 규정하는 ‘검란’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많다. 역대 대다수 검찰총장은 참모의 용퇴(勇退) 건의를 받아들여 홀연히 직위를 버렸는데, 한 전 총장은 임기를 채우려고 이 건의를 독단적으로 거부했다는 것.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일선 검사들의 반응은 다소 냉랭하다. 수도권 지검의 한 검사는 “한 전 총장과 참모들 가운데 누가 옳고 그른지를 떠나 양측의 격앙된 목소리가 실시간 외부로 알려진 것은 매우 부적절했다”며 “명예와 권위로 포장하고 있던 검찰 내부조직의 민낯을 다 드러낸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해선 다소 독단적이더라도 과감한 결단과 다양한 여러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당시 한 전 총장과 참모진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만 달렸다”며 “검찰 내부에서도 가장 똑똑한 사람만 모아놓았다는 서초동(대검과 서울중앙지검 소재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 대한 실망감이 컸다”고 말했다.
한 전 총장의 사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채동욱 서울고검장이 신임 검찰총장 후보자로 내정되면서 당시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일선 검사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한 검사는 “채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대다수 검사가 당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부서진 검찰 명예와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채 후보자가 당시 파국을 피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또 당시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를 밝혀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