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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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英 왜 ‘한 지붕 두 공관’인가

양국 “대사관 함께 쓰기” 합의 해석 놓고 미묘한 파장

  • 밴쿠버=황용복 통신원 hyb430@hotmail.com

    입력2012-10-15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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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 캐나다가 일부 주재국에서 대사관, 영사관 등 재외공관을 함께 쓰기로 합의했다. 당장 미얀마 주재 영국 대사관에 신규 캐나다 대사관이, 아이티 주재 캐나다 대사관에 신규 영국 대사관이 각각 더부살이함으로써 한 공관에 두 나라 국기가 펄럭이게 됐다. 양국 외무장관은 9월 24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이 같은 내용의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재외공관 운영비를 줄이기 위한 조처’라고 양국 정부는 밝혔다.

    양국 외무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합의는 한쪽 외교관이 다른 한쪽 외교관을 대행해 주재국 정부와 교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간만 공유하는 것”이라며 “합동 대사관(joint embassy)이 아닌, 대사관 함께 쓰기(embassy sharing)”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또 “공유할 공관 수도 10개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얀마·아이티에서 각각 더부살이

    이번 조치로 어느 정도 경비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어, 평소 정부도 기업 마인드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지를 보낸다. 반면 “몇 푼 아끼려다 더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비난이 영국보다는 캐나다 쪽에서 더 많이 일고 있다. 전자 의견을 가진 사람은 다수가 침묵하지만, 캐나다 주요 신문 속 독자 페이지와 인터넷 댓글은 거의 후자 쪽이다.

    캐나다에서 나오는 비판론의 가장 큰 줄기는 캐나다가 옛 종주국 영국과 이런 관계를 맺음으로써 캐나다 정체성과 관련해 대외적으로 혼란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캐나다에 사는 이민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다. 공관 나눠 쓰기 아이디어에는 찬성하지만 다른 나라가 아닌 영국과 이런 합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밖에 영국과의 밀착이 퀘벡의 프랑스어계 주민을 자극할 것이라는 점, 제국주의 시대 영국에 대해 중동인이 갖는 악감정을 캐나다가 뒤집어쓸지 모른다는 우려 등도 나온다.



    정체성 문제는 독립 연조가 짧은 캐나다가 앞으로 긴 세월 동안 안고 가야 할 약점이다. 실제로 세계는 캐나다에 호감을 느끼면서도 정체성, 특히 영국과의 관계를 아리송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영연방(英聯邦)’이라는 어색한 용어를 사용한다.

    대영제국은 나폴레옹의 침략 위협을 꺾은 181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100여 년 동안이 전성기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으로서 오토만 터키가 지배하던 중동지역까지 분할 통치했고, 이로써 1920년대 대영제국 영토는 세계 육지 넓이의 4분의 1에 이르렀다. 하루 중 어떤 시각에도 지구상의 영국령 어딘가엔 해가 떠 있었으니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영국의 해외 영토는 단순히 말하면 모두 ‘식민지’이지만 주민 구성 면에서 영국인이 대거 이주해 영국과 마찬가지인 곳도 있었고, 거의 현지인만 사는 곳도 있었다. 정치체제도 영국이 보낸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곳, 외교와 국방만 빼고 현지인이 자치를 하는 곳, 영국 기업이 정부에게 위탁받아 다스리는 곳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중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여섯 곳은 백인이 중심을 이뤄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자치를 하는 곳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도미니언(Dominion)’이라고 불렀다.

    加-英 왜 ‘한 지붕 두 공관’인가

    1926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참석한 6개국 도미니언 총리와 조지 5세(앞줄 중앙), 그리고 영국 총리(앞줄 맨왼쪽).

    그러나 대영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쇠락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전쟁을 수행하느라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강국 미국의 눈치도 봐야 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을 거들어 참전했던 6개 도미니언은 더는 속국으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몸집이 커졌다.

    1931년 영국은 웨스트민스터법을 통해 도미니언 독립을 승인했고, 그 직후 영국과 이들 여섯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브리티시 코먼웰스’를 결성했다. 브리티시 코먼웰스는 영국 문화가 지배하는 백인 주도의 독립국이 결성한 일종의 배타적 친목 클럽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각지의 속령에서 독립운동이 불거지면서 상황은 또 달라졌다. 영국은 이 움직임을 힘으로 막을 수 없었고, ‘대영제국’이라는 말도 무의미해졌음을 자각했다.

    영국 EU 탈퇴 ‘옛 식구’ 챙기기인가

    다만 영국은 속령에서 무작정 철수할 경우 현지 정국이 혼란에 빠져 공산주의국가 소련이 영향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안정된 정부가 들어설 수 있는 지역부터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영국 속령 가운데 비중이 가장 컸던 인도가 1947년 독립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의 많은 나라가 뒤를 이었다. 이들은 모두 유색인종 나라다.

    미국은 이런 영국을 지지했고, 나아가 이들 신생국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영국이 일정한 구실을 계속해주기를 바랐다. 영국은 기존 브리티시 코먼웰스를 확대 개편한 새 기구를 결성했다. 새 기구는 유색인종 나라든 백인 나라든 구분하지 않고 영국 속령이었다가 독립한 나라 모두를 자발적인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명칭도 ‘브리티시’라는 말을 없애고 ‘코먼웰스 오브 네이션스’로 바꿨다. 현재 회원국 50여 개국 가운데 16개국은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삼고, 나머지는 공화국이거나 별도 왕을 두고 있다.

    결속력이 느슨한 이 기구를 한국에서는 ‘영연방’이라고 부른다. ‘코먼웰스’의 사전적 의미는 ‘공동번영체’지만 여러 변용된 의미로 쓴다. 마땅한 번역이 없다면 그냥 ‘코먼웰스’라고 부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영국 일부 언론은 이번 재외공관 공유 합의를 예산 절감 차원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본다. 일부 매체는 “영국이 유럽연합(EU)을 견제, 혹은 궁극적으로 탈퇴하려는 사전준비 차원에서 이번 합의를 이끌어냈으며 같은 목적으로 호주, 뉴질랜드 등과도 교섭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이 유럽 국가들과 거리를 두는 대신 일부 ‘옛 식구’들을 끌어모으려는 속셈이라는 해석이다.

    영국은 1950~60년대 프랑스와 서독 등이 주도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할 때부터 가입을 망설였다. 그러나 막상 영국이 가입 신청을 했을 때는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앞장서 퇴짜를 놓음으로써 영국은 1970년대 들어서야 회원국이 될 수 있었다. 그 시절 영국은 유럽의 여러 ‘작은 나라’와 자국이 대등한 자격으로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반면 프랑스는 영국이 미국과 유착해 다른 유럽 국가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경계했다.

    영국은 현재 EU 회원국이면서도 공동 화폐인 유로는 채택하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를 바라보면서 공동체에서 탈퇴하거나 최소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 런던 정가의 대체적인 분위기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이번 캐나다와 영국이 양해각서를 교환하고 나흘 뒤 브라질을 방문 중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유럽과 거리를 더 둬야 하지만 국민투표는 몇 년간 지켜본 뒤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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