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달라.”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길 바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무병장수’하길 염원한다. 이 같은 소망은 ‘9988234’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만 앓다 죽고 싶다’는 건 임종 전 병치레 기간을 가능하면 짧게 겪고 싶다는 얘기다.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질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고통 없이 삶을 잘 마무리하는가 하는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
2년 전 영국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을 대상으로 임종을 앞둔 환자가 얼마나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조사해 국가별 ‘죽음의 질’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평가지표는 죽음에 대한 사회인식, 임종과 관련한 법률제도, 임종 환자의 통증과 증상을 관리하는 치료 수준과 비용 부담 등 27가지 항목을 포함했는데, 당시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하위권인 33위를 차지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보건의료시스템 질은 떨어졌으나 의사들이 환자 상태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밝히는 것으로 드러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뿐 아니라 의사들이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진통제를 충분히 제공하고,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도 잘 갖춰놓았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비슷한 이유로 상위권을 차지했다.
고통스럽게 더 살까, 편히 죽을까
반면 우리에게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알려진 덴마크와 핀란드는 하위권에 머물렀다. 다소 의외의 결과가 나온 건 이 두 나라가 환자 사망을 의료기술 실패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 같은 사회적 통념 때문에 두 나라 의사들은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이나 불안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뒷전이고, 환자 생명을 연장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지식과 노력을 환자 생명을 연장하는 데 쏟는다. 생명만 연장할 수 있다면 환자의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 때문에 병약한 환자에게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연명시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가족들도 환자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거의 금기시한다. 자칫 불효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누구도 먼저 ‘환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종을 앞둔 환자는 연명치료를 견디기 힘들어하고, 환자 가족은 병원비 고지서에 힘겨워한다. 한국인은 죽기 전 한 달 동안 평생 지출하는 의료비의 절반을 쓰고, 4분의 1을 죽기 전 사흘 동안 쓴다고 한다. 이는 고스란히 환자 가족에게 부담으로 남는다.
최근 들어 연명치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다소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지하는 것에 대해 ‘다소 찬성’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54.0%나 됐다. ‘매우 찬성’이라고 응답한 사람도 18%가 넘었다. 응답자의 72%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지지하는 셈이다.
이 같은 인식 변화에는 2009년 5월 대법원 판결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존엄사 인정’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판결은 ‘김 할머니 사건’으로도 잘 알려졌다. 2008년 2월 김모 할머니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조직검사를 받다 출혈에 의한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됐다. 이 상태가 3개월간 지속되자 김 할머니 자녀들은 그해 5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김 할머니가 평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온 점을 존중해 가족이 어렵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병원 측은 6월 인공호흡기를 뗐고, 이듬해인 2010년 1월 김 할머니는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품위 있게 죽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존엄사 인정 안 해
그렇다면 만일의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미리 자기 의사를 서면으로 남겨둬야 한다. 이때는 ‘사전의료의향서’를 활용하면 된다. 사전의료의향서란 죽음에 임박해 스스로 치료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의료진의 치료방침 결정에 참고하도록 환자가 미리 작성해두는 것이다. 여기엔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절, 적용 시기, 작성자와 증인서명 등이 포함되는데, 작성자는 그 내용을 언제라도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또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 또는 중단하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줄이는 통증 조절과 체온 유지, 수분 공급, 욕창 예방, 배변과 배뇨에 도움을 주는 청결서비스는 계속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두면 자녀들도 죄책감 없이 부모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다.
9월 27일 뜻있는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을 발족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모임 취지에 공감해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벌써 5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서 사전의료의향서를 정식으로 사용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법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18대 국회가 존엄사법을 발의했지만 통과하지 못했다.
“죽음이 불가피할 땐 자기결정권을 우선시한다는 판례가 있기 때문에 사전의료의향서의 법적 효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직접 의사표시가 불가능한 말기 환자에 대한 추정을 바탕으로 한 연명치료 중단이나 가족의 대리의사 표시가 효력이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가톨릭 등 종교계는 인간의 자기 의사결정권은 본질적 가치이기 때문에 타인이 판단할 수 없다며, 연명치료 중단을 통한 존엄사에 반대한다. 지금으로선 사전의료의향서가 효력을 인정받으려면 환자가 의식이 또렷할 때 미리 작성해두는 수밖에 없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법제화하기 위해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고 하니, 정책대안이 있는 사람은 10월 26일까지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홈페이지(www.nibp.kr)나 공식 이메일(nibp@nibp.kr)로 제출하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길 바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무병장수’하길 염원한다. 이 같은 소망은 ‘9988234’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만 앓다 죽고 싶다’는 건 임종 전 병치레 기간을 가능하면 짧게 겪고 싶다는 얘기다.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질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고통 없이 삶을 잘 마무리하는가 하는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
2년 전 영국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을 대상으로 임종을 앞둔 환자가 얼마나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조사해 국가별 ‘죽음의 질’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평가지표는 죽음에 대한 사회인식, 임종과 관련한 법률제도, 임종 환자의 통증과 증상을 관리하는 치료 수준과 비용 부담 등 27가지 항목을 포함했는데, 당시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하위권인 33위를 차지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보건의료시스템 질은 떨어졌으나 의사들이 환자 상태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밝히는 것으로 드러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뿐 아니라 의사들이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진통제를 충분히 제공하고,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도 잘 갖춰놓았다. 호주와 뉴질랜드도 비슷한 이유로 상위권을 차지했다.
고통스럽게 더 살까, 편히 죽을까
김 할머니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한 지 7개월 만에 사망했다.
우리나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지키려고 자신의 모든 지식과 노력을 환자 생명을 연장하는 데 쏟는다. 생명만 연장할 수 있다면 환자의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 때문에 병약한 환자에게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연명시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가족들도 환자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거의 금기시한다. 자칫 불효자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누구도 먼저 ‘환자에게 큰 고통을 주는 연명치료를 중단하자’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종을 앞둔 환자는 연명치료를 견디기 힘들어하고, 환자 가족은 병원비 고지서에 힘겨워한다. 한국인은 죽기 전 한 달 동안 평생 지출하는 의료비의 절반을 쓰고, 4분의 1을 죽기 전 사흘 동안 쓴다고 한다. 이는 고스란히 환자 가족에게 부담으로 남는다.
최근 들어 연명치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다소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지하는 것에 대해 ‘다소 찬성’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54.0%나 됐다. ‘매우 찬성’이라고 응답한 사람도 18%가 넘었다. 응답자의 72%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지지하는 셈이다.
이 같은 인식 변화에는 2009년 5월 대법원 판결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존엄사 인정’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판결은 ‘김 할머니 사건’으로도 잘 알려졌다. 2008년 2월 김모 할머니는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조직검사를 받다 출혈에 의한 뇌 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됐다. 이 상태가 3개월간 지속되자 김 할머니 자녀들은 그해 5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김 할머니가 평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온 점을 존중해 가족이 어렵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2009년 5월 대법원은 연명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병원 측은 6월 인공호흡기를 뗐고, 이듬해인 2010년 1월 김 할머니는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품위 있게 죽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존엄사 인정 안 해
그렇다면 만일의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미리 자기 의사를 서면으로 남겨둬야 한다. 이때는 ‘사전의료의향서’를 활용하면 된다. 사전의료의향서란 죽음에 임박해 스스로 치료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의료진의 치료방침 결정에 참고하도록 환자가 미리 작성해두는 것이다. 여기엔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절, 적용 시기, 작성자와 증인서명 등이 포함되는데, 작성자는 그 내용을 언제라도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또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 또는 중단하더라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줄이는 통증 조절과 체온 유지, 수분 공급, 욕창 예방, 배변과 배뇨에 도움을 주는 청결서비스는 계속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두면 자녀들도 죄책감 없이 부모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해드릴 수 있다.
9월 27일 뜻있는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을 발족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모임 취지에 공감해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벌써 5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서 사전의료의향서를 정식으로 사용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법적으로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18대 국회가 존엄사법을 발의했지만 통과하지 못했다.
“죽음이 불가피할 땐 자기결정권을 우선시한다는 판례가 있기 때문에 사전의료의향서의 법적 효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직접 의사표시가 불가능한 말기 환자에 대한 추정을 바탕으로 한 연명치료 중단이나 가족의 대리의사 표시가 효력이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가톨릭 등 종교계는 인간의 자기 의사결정권은 본질적 가치이기 때문에 타인이 판단할 수 없다며, 연명치료 중단을 통한 존엄사에 반대한다. 지금으로선 사전의료의향서가 효력을 인정받으려면 환자가 의식이 또렷할 때 미리 작성해두는 수밖에 없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법제화하기 위해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고 하니, 정책대안이 있는 사람은 10월 26일까지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홈페이지(www.nibp.kr)나 공식 이메일(nibp@nibp.kr)로 제출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