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양의 셰일오일과 가스가 매장된 미국 노스다코타 주 바켄 유전.
EIA에 따르면 미국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구매하는 원유 규모는 현재 하루 400만 배럴 정도다. 이것이 2020년이면 250만 배럴로 급락한다는 얘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등 3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원유가 현재 160만 배럴에서 86만 배럴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의 나라별 원유 수입 비중을 보면 캐나다가 29%로 가장 높고, 이어 사우디아라비아(14%), 베네수엘라(11%), 나이지리아(10%), 멕시코(8%) 순이다. 중동 산유국은 미국이 원유를 수입하는 주요 국가지만, 그 비중과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2035년 가면 의존도 제로”
미국의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줄어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셰일오일과 오일샌드 등 새로운 원유를 뽑아내는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셰일오일은 혈암(頁巖)이라 부르는 단단한 바위층에 있는 석유를 말한다. 셰일오일은 채굴이 어려운 데다 개발비도 만만치 않아 방치됐으나 최근 관련 기술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로 급부상했다. 셰일오일 채굴에 사용하는 기술은 수압파쇄와 수평시추다. 수압파쇄는 수직으로 뚫은 시추공에 물과 모래, 화학물질 등을 섞은 혼탁액을 고압으로 지하에 투입해 암석층에 균열을 일으켜 원유를 뽑아내는 공법이다. 수평시추는 채굴 파이프를 셰일층에 수평으로 삽입해 유전의 표면적을 최대화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다.
셰일오일과 가스 매장량은 지난해 현재 전 세계적으로 2조5700억 배럴인 것으로 추정된다. 셰일오일의 추출률은 과거 12%에서 현재 50%로 상승하면서 경제성을 확보해 생산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셰일오일은 주로 북미 지역(미국, 캐나다)에서 개발하고 있다. 탐사의 어려움과 개발비 때문에 신중했던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지금은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있다.
오일샌드도 마찬가지다. 오일샌드는 검은색의 무겁고 끈적끈적한 점성질 원유인 비튜멘(bitumen)과 모래, 점토 등의 혼합물이다. 쉽게 말하면 모래와 버무려진 원유다. 자연 상태로는 시추공이나 송유관 안에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열을 가하거나 희석제(초경질원유 혹은 경질석유 제품)와 섞어 비중 및 점성도를 낮춰야 채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개발 비가 많이 들어 경제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왔다. 오일샌드 100kg을 정제하면 원유는 평균 11kg이 나온다. 통상 원유 함유량이 6% 이상이면 상업 생산이 가능하다. 오일샌드를 캐서 원유 1배럴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약 25달러다. 땅속에 묻혀 있는 원유를 구입(약 15달러)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성이 개선되면서 오일샌드 개발이 활발해졌다. 현재 오일샌드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캐나다의 앨버타 주. 세계 최대 오일샌드 매장지인 앨버타 주에서 현재 개발 가능한 매장량은 1790억 배럴에 이르며, 잠재적으로는 1조7000억 배럴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캐나다가 25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현재 캐나다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118만 배럴. 2015년에는 270만 배럴로 증가할 전망이다. 캐나다가 사우디아라비아(매장량 2600억 배럴)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원유 보유국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일샌드 매장 지역은 전 세계에 걸쳐 있다.
미국은 물론 북미와 중남미 지역에서 원유 생산이 크게 늘어나는 점도 미국의 중동산 원유 의존도를 낮추는 중요한 이유다. 중남미에는 2조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브라질은 심해유전에 엄청난 양의 원유가 매장돼 있다. 심해유전은 대서양 연안에서 길이 800km, 넓이 110km2에 걸쳐 해저 5000∼8000m 지점에 펼쳐져 있다. 심해유전 전체 매장량은 최대 1000억 배럴로 추정된다. 심해유전 개발 기술의 발전 덕분에 브라질은 2009년부터 원유 수입국에서 원유 수출국으로 입지가 바뀌었다. 2020년이면 브라질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470만 배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보다 57% 증가한 규모로, 캐나다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브라질의 대형 심해유전 시추선이 원유를 탐사하고 있다.
미국 본토에서도 원유 생산이 크게 늘고 있다. 노스다코타 주의 바켄, 텍사스 주의 이글포드와 바넷 등에 엄청난 양의 셰일오일과 가스가 매장돼 있다.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1970년대 최대치인 하루 960만 배럴에서 계속 감소해 2008년에는 하루 495만 배럴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이후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 현재 하루 600만 배럴을 생산한다. 이 같은 증가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돼 2020년이면 생산량이 하루 700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미국 에너지부는 전망한다. 미국의 자국산 에너지 소비율은 81%로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절부터 미국 역대 대통령이 내걸었던 ‘에너지 독립’의 목표 달성이 머지않았다.
석유 통제권 확보하려 분쟁에 개입
석유는 20세기는 물론 21세기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상품이다. 즉,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자원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숱한 전쟁과 분쟁은 대부분 석유와 관련이 있다. 특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차지하려고 각종 분쟁에 개입해왔다. 저명한 지정학자인 윌리엄 엥달은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은 언제나 막대한 원유와 가스 매장지가 있거나 중요한 송유관이 통과하는 곳”이라면서 “석유는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중동 지역에 개입해온 이유도 석유 확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라크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대의명분은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축출과 이라크 민주화였지만, 진짜 목적은 풍부한 석유 자원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이라크전쟁을 기획한 폴 울포위츠 전 국방부 부장관은 “이라크는 석유라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자서전 ‘격동의 시대’에서 “이라크전쟁은 석유를 얻기 위해 일으킨 것”이라며 “미국이 중동에서 석유 공급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위협적인 존재는 사담 후세인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미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월관계를 맺어왔다. 역대 미국 대통령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도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해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막대한 석유를 공급하고,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는 물론 부를 지켜줬다. 미국의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 경우 이라크전쟁 때처럼 중동 지역에 무리수를 둬가며 개입할 소지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도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중동이 국제 유가에 계속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이 석유 수송로 보호 등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원유 수급 중국과 러시아 변수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의 지선 공사 현장.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중국의 석유 소비량이 2025년 하루 1420만 배럴까지 급증하리란 전망을 내놓았다. 중국 내 석유 생산량은 2008년 하루 400만 배럴에서 2035년 530만 배럴 정도로밖에 늘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여 부족한 석유를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중국은 현재 수입 원유의 절반을 중동에서 들여온다. 중국이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의 비중(2010년 말 기준)을 보면 사우디아라비아(20.5%), 앙골라(15.8%), 이란(11.4%), 러시아(7.5%), 수단(6%), 오만(5.8%) 등이다. 중국으로선 앞으로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충족하려면 중동 산유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동 산유국도 미국의 석유 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중국에 석유를 수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장 많은 양의 석유를 수출하는 국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업체 아람코의 칼리드 알팔리 최고경영자(CEO)는 “인구학적으로나 경제성장 추세로 볼 때 중국이 원유시장 성장을 이끌어갈 것이 명백하다”고 내다봤다. 아람코는 중국 남동부 푸젠성에 하루 원유 20만 배럴을 정제할 수 있는 대규모 정유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칭다오에도 제2 정유공장 건설을 고려 중이다. 또한 중국석유화학집단공사와 합작해 홍해 연안 얀부 지역에 하루 40만 배럴을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중국은 앞으로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은 사이가 좋지 않다. 중국은 그동안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때문에 중국은 양국 사이에서 절묘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중국은 현재 이란 핵개발 문제 때문에 원유 수입에 어려움을 겪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를 구입하고 있다.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미국보다 더 많은 석유를 사들인다고 해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끈끈한 동맹관계가 당장 변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석유가 단순한 경제적 재화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이미 마이어스 제프 미국 라이스대학 교수는 “석유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지정학적”이라면서 “석유는 100% 경제적 이유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분석했다.
에스포油 한반도 정세 변화
특히 중국은 중동산 원유를 자국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송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 중국이 서방국가들의 제재에 맞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하는 이란 측에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선 것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이 대부분 자국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소말리아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해군 함대를 아덴 만에 파견한 것도 향후 석유 수송로를 보호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중국으로선 앞으로 석유 수송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대양해군 육성에 나설 수밖에 없으며, 중동 지역 분쟁에도 적극 개입할 개연성이 높다. 중국은 이와 함께 석유 수입 다변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이 최근 들어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려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유 지정학의 판도를 바꾸는 또 다른 변수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2011년 1월부터 러시아 아무르 주 스코보로디노에서 중국 헤이룽장성의 석유산업도시 다칭을 잇는 길이 1000km의 송유관이 정식으로 가동하면서 하루 3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중국 송유관은 동시베리아 이르쿠추크 타이세트에서 연해주 코즈미노를 잇는 길이 4663km인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의 지선이다. 러시아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을 2014년까지 완전 가동해 원유 수출량을 하루 100만 배럴까지 높일 계획이다. 여기에 사할린에서 생산하는 원유까지 합하면 하루 140만∼150만 배럴까지 수출이 가능해져 동북아 원유 수급 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중국, 일본의 원유 소비량은 세계 총소비량의 20%를 차지한다.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의 종착점은 코즈미노 원유 선적 터미널이다. 향후 원유를 한국, 일본, 미국 등 아시아·태평양 국가에 수출하기 위해 연간 1500만t의 원유를 선적할 수 있고, 15만t급 유조선 정박이 가능한 시설과 35만t의 원유 저장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다.
러시아의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을 통과하는 원유를 에스포(ESPO)유(油)라고 부른다. 에스포유는 미국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중동산 두바이유, 북해산 브렌트유처럼 동북아는 물론 국제 석유시장의 대표 유종(油種)이 될 수도 있다. 에스포유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리적 이점과 품질 때문이다. 현재 동북아 국가들은 주로 두바이유를 수입하는 데 3주일의 수송기간과 배럴당 2달러의 수송비가 든다. 에스포유의 최대 수송기간은 나흘이며 수송비는 50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또 에스포유는 저유황 중질유로, 고유황 성분의 두바이유보다 품질이 뛰어나고 고유황을 처리해야 하는 정유회사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에스포유의 등장으로 동북아 석유시장을 겨냥한 러시아와 중동 산유국 간 경쟁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에스포유의 수출이 늘어날수록 러시아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서 확대될 수 있다. 중국은 이미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일본과 한국도 소원했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에스포유가 북한을 거쳐 한국까지 송유관을 통해 직접 수송될 경우 한반도 정세까지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석유 지정학의 판도 변화가 국제질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