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의도적으로 한국을 피해왔어요.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나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누구라도 그의 선택을 책망할 수 없을 것이다. 장뱅상 플라세(Jean-Vincent Place´·43). 그는 프랑스의 현직 상원의원이지만 한국에 도착한 순간 ‘입양아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영화 소재로 등장할 만한 자극적 소재다. 하지만 그는 의연했다.
일곱 살 때 입양 한국어 잊어
플라세 의원은 일곱 살 때인 1975년 프랑스로 입양됐고, 1993년 한 유명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2001년 녹색당에 가입해 현재 부총재로 활약 중이다. 9월 25일 프랑스 상원의원 선거에서 일드프랑스 에손 지방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프랑스 상원의원 중 아시아계는 그가 처음이다.
외모적으로 그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에선 유행이 지난 어색한 바람머리와 유창한 프랑스어가 전부다. 영락없는 토종 한국인 얼굴이다. 그러나 한국어는 잊은 지 오래고 서울은 이번 방문이 38년 만에 처음이었다. 박흥신 주불대사의 권유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의 초청 덕분에 한국을 찾았다.
모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첫 고향 방문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선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자부심이 배어나왔다. 자신이 성장할 무렵 프랑스는 인종통합교육이 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정치인이 됐을까.
“금융법과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어릴 적부터 프랑스 역사와 제도,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정치 토론을 특히 좋아했죠.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중요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서 자연스럽게 정계에 입문했어요.”
그의 양아버지는 노르망디 지역의 부유한 변호사였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배려심도 깊었다고. 한국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에 프랑스로 입양됐기 때문에 양아버지는 그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을 남겨주려 노력했다. 1988년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에 가보라고 양부모가 권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한국어는 금세 잊었어요. 1~2년 뒤 프랑스어가 익숙해지자 큰 문제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죠. 제가 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았어요. 인종차별이요? 어디에나 사소한 갈등은 있게 마련이잖아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사소한 수준이었어요. 저는 프랑스를 사랑하는 프랑스인이에요.”
젊은 시절 그는 여느 젊은이처럼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고 한다. 특히 미래의 땅 중국, 그리고 프랑스와의 특별한 역사를 지닌 베트남은 수차례 여행했다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들를 법도 했지만 한국만큼은 애써 피했단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고 얘기하지만 아시잖아요.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졌어요.”
입양 얘기는 그도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정치인에겐 정치 질문이 제격이다. 그의 이력을 이해하려면 2001년 사망한 정치 스승 미셸 크레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1981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만큼 신망 높던 ‘급진좌파당(MRG)’ 총재였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 7년 내내 환경부, 법무부 등에서 장관으로 활약했다. 크레포의 보좌관인 그도 급진좌파였을까.
“당 명칭과 달리 크레포는 중도좌파였어요. 사르코지가 있는 대중운동연합(UMP)이 우파라면 사회당이 중도좌파, 녹색당은 좀 더 좌파, 공산당과 트로츠키파가 급진좌파 정도라고 정리할 수 있죠. 제가 존경한 크레포는 무척 리버럴했지만 환경 분야에서만큼은 아방가르드(전위)했어요. 저 역시 동의했고 환경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중도로는 부족하다고 절감했죠.”
경복궁 보니 강인함과 평안함
녹색당 이미지는 강성인 ‘독일 녹색당’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반전, 반핵을 기치로 내건 녹색당은 독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고, 2002년 사민당과의 적-녹 연정을 이루기도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힘입어 독일에서의 원전 폐기 정책을 이끌어냈다. 프랑스 녹색당은 최근 급성장 중이다. 하지만 독일만큼 급진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크레포와 함께 미테랑 전 대통령을 존경해요. 프랑스는 진보하는 사회기 때문에 진보정치인의 소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성이자 36세인 세시 뒤플로 녹색당 총재도 주목하길 바라요. 그는 프랑스에 열정과 영감을 주는 인물이에요.”
그렇다면 우파 대표주자인 사르코지 대통령을 그는 어떻게 평가할까.
“저는 야당 국회의원이에요. 내년 대선에서 어떻게든 이겨야 하죠. 하지만 여기서 제가 프랑스 국내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요. 사르코지는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존재거든요(웃음).”
정답이다. 우리 국회의원도 해외에서 이런 식(“이명박 대통령을 욕하기는 싫어요. 현재로선 한국을 대표하는 분이니까요”)으로 대답하는지 궁금해졌다. 인터뷰는 10월 31일 롯데호텔에서 이뤄졌다. 그는 한국에서의 일정이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녹초가 돼 있었다. 특히 전날 이뤄진 보육원 방문이 집중력을 상당히 빼앗아갔다고 했다. 입양 후 처음으로 자신이 다녔던 보육원을 찾은 것이다.
“놀랍게도 저를 입양 보낸 원장 선생님이 아직도 그곳에 계시더군요. 38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경험이었어요.”
물론 그런 특별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밝은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그는 계속 손톱을 돌아가며 물어뜯었다. 아픈 기억이리라.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서울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고. 그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매력을 언급했으며, 깨끗하고 현대화한 도시를 세운 한국인을 칭송했다.
“단연 경복궁이었어요. 강인함과 평안함이 공존하는 곳이더군요. 그곳에 도착하고서야 제가 대한민국 서울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어요. 무척이나 즐거웠죠. 이제는 자주 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저와 닮은 사람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어요(웃음).”
나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누구라도 그의 선택을 책망할 수 없을 것이다. 장뱅상 플라세(Jean-Vincent Place´·43). 그는 프랑스의 현직 상원의원이지만 한국에 도착한 순간 ‘입양아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영화 소재로 등장할 만한 자극적 소재다. 하지만 그는 의연했다.
일곱 살 때 입양 한국어 잊어
플라세 의원은 일곱 살 때인 1975년 프랑스로 입양됐고, 1993년 한 유명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2001년 녹색당에 가입해 현재 부총재로 활약 중이다. 9월 25일 프랑스 상원의원 선거에서 일드프랑스 에손 지방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프랑스 상원의원 중 아시아계는 그가 처음이다.
외모적으로 그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한국에선 유행이 지난 어색한 바람머리와 유창한 프랑스어가 전부다. 영락없는 토종 한국인 얼굴이다. 그러나 한국어는 잊은 지 오래고 서울은 이번 방문이 38년 만에 처음이었다. 박흥신 주불대사의 권유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의 초청 덕분에 한국을 찾았다.
모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의 첫 고향 방문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선 ‘나는 프랑스인’이라는 자부심이 배어나왔다. 자신이 성장할 무렵 프랑스는 인종통합교육이 잘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정치인이 됐을까.
“금융법과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어릴 적부터 프랑스 역사와 제도,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정치 토론을 특히 좋아했죠.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중요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서 자연스럽게 정계에 입문했어요.”
그의 양아버지는 노르망디 지역의 부유한 변호사였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배려심도 깊었다고. 한국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에 프랑스로 입양됐기 때문에 양아버지는 그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을 남겨주려 노력했다. 1988년에는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에 가보라고 양부모가 권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한국어는 금세 잊었어요. 1~2년 뒤 프랑스어가 익숙해지자 큰 문제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죠. 제가 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았어요. 인종차별이요? 어디에나 사소한 갈등은 있게 마련이잖아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사소한 수준이었어요. 저는 프랑스를 사랑하는 프랑스인이에요.”
젊은 시절 그는 여느 젊은이처럼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고 한다. 특히 미래의 땅 중국, 그리고 프랑스와의 특별한 역사를 지닌 베트남은 수차례 여행했다고.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들를 법도 했지만 한국만큼은 애써 피했단다.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고 얘기하지만 아시잖아요.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졌어요.”
입양 얘기는 그도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정치인에겐 정치 질문이 제격이다. 그의 이력을 이해하려면 2001년 사망한 정치 스승 미셸 크레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1981년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만큼 신망 높던 ‘급진좌파당(MRG)’ 총재였다. 그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집권 전반기 7년 내내 환경부, 법무부 등에서 장관으로 활약했다. 크레포의 보좌관인 그도 급진좌파였을까.
“당 명칭과 달리 크레포는 중도좌파였어요. 사르코지가 있는 대중운동연합(UMP)이 우파라면 사회당이 중도좌파, 녹색당은 좀 더 좌파, 공산당과 트로츠키파가 급진좌파 정도라고 정리할 수 있죠. 제가 존경한 크레포는 무척 리버럴했지만 환경 분야에서만큼은 아방가르드(전위)했어요. 저 역시 동의했고 환경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중도로는 부족하다고 절감했죠.”
경복궁 보니 강인함과 평안함
녹색당 이미지는 강성인 ‘독일 녹색당’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반전, 반핵을 기치로 내건 녹색당은 독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고, 2002년 사민당과의 적-녹 연정을 이루기도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힘입어 독일에서의 원전 폐기 정책을 이끌어냈다. 프랑스 녹색당은 최근 급성장 중이다. 하지만 독일만큼 급진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크레포와 함께 미테랑 전 대통령을 존경해요. 프랑스는 진보하는 사회기 때문에 진보정치인의 소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성이자 36세인 세시 뒤플로 녹색당 총재도 주목하길 바라요. 그는 프랑스에 열정과 영감을 주는 인물이에요.”
그렇다면 우파 대표주자인 사르코지 대통령을 그는 어떻게 평가할까.
“저는 야당 국회의원이에요. 내년 대선에서 어떻게든 이겨야 하죠. 하지만 여기서 제가 프랑스 국내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요. 사르코지는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존재거든요(웃음).”
정답이다. 우리 국회의원도 해외에서 이런 식(“이명박 대통령을 욕하기는 싫어요. 현재로선 한국을 대표하는 분이니까요”)으로 대답하는지 궁금해졌다. 인터뷰는 10월 31일 롯데호텔에서 이뤄졌다. 그는 한국에서의 일정이 무척이나 피곤했는지 녹초가 돼 있었다. 특히 전날 이뤄진 보육원 방문이 집중력을 상당히 빼앗아갔다고 했다. 입양 후 처음으로 자신이 다녔던 보육원을 찾은 것이다.
“놀랍게도 저를 입양 보낸 원장 선생님이 아직도 그곳에 계시더군요. 38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경험이었어요.”
물론 그런 특별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밝은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그는 계속 손톱을 돌아가며 물어뜯었다. 아픈 기억이리라.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서울에서 어디가 가장 좋았느냐고. 그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매력을 언급했으며, 깨끗하고 현대화한 도시를 세운 한국인을 칭송했다.
“단연 경복궁이었어요. 강인함과 평안함이 공존하는 곳이더군요. 그곳에 도착하고서야 제가 대한민국 서울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어요. 무척이나 즐거웠죠. 이제는 자주 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저와 닮은 사람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