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쓸 만한 결과는 없었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제네바 북미대화는 이후 회담 가능성을 열어뒀다는 점만이 긍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과 상대하려거든 서울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비핵화회담까지 열었던 것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다. 제자리걸음을 이어가는 6자회담 재개 논의와 관련해 한 정부 당국자는 “진력이 날 만큼 지루한 샅바싸움”이라고 촌평했다.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일련의 협상이 6자회담을 열기 위한 조건을 논의하는 자리였다는 점. 다시 말해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협상’인 셈이다.
넉 장의 카드를 조합하는 방법
북핵 문제는 이미 코너를 돌아 심각해질 대로 심각해졌지만,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평범한 국민은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아무런 관심도 끌 수 없는 이슈’가 된 지 오래. 그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10월 말의 ‘외교전쟁’을 치르고 난 뒤 물밑에서 새로운 그림과 아이디어를 생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제네바 회담을 끝내고 양측 대표가 밝힌 “일부 쟁점에서 견해차를 좁혔다”는 말과 “회담은 언제나 유익하다”는 언급이 무슨 뜻인지, 눈을 크게 뜨고 조각 퍼즐을 하나씩 맞춰 가보자.
“모든 협상에는 허수(虛手)와 실수(實手)가 있다. 탁자에 올려놓은 카드 가운데 뭐가 핵심이고 뭐가 들러리인지 가려내는 게 밀고 당기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최근 분주했던 연쇄회담의 성과는 이를 구분할 기준이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북핵 협상에 관여하는 정부 당국자의 말이다. 그간 한미 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이른바 ‘북한의 비핵화 사전조치’를 제시한 바 있다.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대량살상무기(WMD) 실험 중단 △9·19 공동성명 이행 등이 그것. 이 넉 장의 카드가 바로 본격화된 북미 기싸움의 속살을 들여다볼 키워드다.
‘안전’과 ‘안보’를 하나로 묶는다면
먼저 기본적인 판세부터 살펴보자. 그간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한국을 의식해 북미 직접 협상을 미뤄왔지만, 최근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거의 180도 변했다. 북한의 핵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상황을 방치하는 것 또한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핵 없는 세계화’라는 어젠다를 꺼내 든 백악관으로서는 내년 3월 핵 안보 정상회의 이전까지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물론 부담도 여전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북한에 또다시 양보하려 한다’는 공화당과 의회의 비판이 가장 먼저 걸린다.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는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내년 연임을 위해서라도 이를 피해갈 명분이 절실한 상황. 이란 핵 문제가 핫 이슈로 떠오른 상황이다 보니 형평성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 이란이 똑같이 ‘평화적 이용’을 내걸고 우라늄을 농축하는데 한쪽에는 협상을, 다른 한쪽에는 강경책을 들이미는 구도는 아무래도 불편하다.
평양은 무슨 생각을 할까. 먼저 6자회담을 열어 합의를 본다 한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 경우 도로아미타불이 될 확률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합의했던 사안이 남측의 정권 교체 이후 줄줄이 백지화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미국의 다음 정부가 지금의 백악관보다 협상에 적극적일지 전혀 장담할 수 없고, 정권 교체 직후 1∼2년간은 정책 재검토를 위해 모든 외교현안이 정지되는 워싱턴 메커니즘을 감안하면 기다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특히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해’를 앞둔 평양으로서는 어떻게든 성과를 과시해야 할 필요도 있다.
결국 질문은 워싱턴과 평양이 각각의 명분과 실리를 어떻게 주고받을 것이냐로 모인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앞서 설명한 넉 장의 카드를 어떻게 조합해야 6자회담을 재개할 수 있을지 그 얼개도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허수는 ‘WMD 실험 중단’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본인이 나서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이를 실행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고, 워싱턴으로서도 선언적 의미의 실험 중단은 의회와 공화당의 비판을 피해가는 수단에 가깝다. 9·19 공동성명 이행 역시 큰 무게를 싣지 않기는 양측 모두 마찬가지다. 그간 ‘전제 조건 없는 6자회담 재개’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북측의 태도는 이미 한풀 꺾인 셈이다.
들러리를 제하고 난 뒤 남은 진짜 카드로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중단이 있다. 평양은 2009년 9월 우라늄 농축 성공을 발표한 바 있고, 2010년 11월에는 미국의 핵과학자들을 초청해 영변에 설치한 원심분리기 1000여 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북한이 1·2차 핵실험에서 검증한 핵폭탄은 영변 핵 시설에서 재처리한 플루토늄으로 제조한 것인데 비해, 우라늄은 핵물질을 얼마나 만들어냈는지 검증하기도 어렵고 해외 유출을 추적하기도 까다롭다. 북한의 핵 능력이 중동 국가에 흘러 들어가는 확산(proliferation) 문제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염려해온 미국의 눈으로 볼 때 UEP는 플루토늄보다 훨씬 심각한 골칫덩어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이 작성한 보고서에 수록된 북한 영변의 핵 시설 위성사진. 사진의 중앙 상단부에 보이는 길이 120m 건물이 우라늄 농축 공장으로 추정된다(왼쪽).
영변 UEP 시설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일까. 북미 양국이 아직 공식적으로 언급을 꺼리는 숨은 쟁점이 남았다. 바로 ‘감춰놓은 우라늄 핵 시설’이다. 5월 작성된 IAEA 보고서는 북한이 영변에 UEP 시설을 건설하기 이전부터 시리아에 금속 우라늄을 제공해왔을 가능성을 공식화한 바 있다. 다른 지역에 비밀리에 가동 중인 우라늄 핵 시설이 또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익명을 요청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워싱턴이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않는 것은 협상테이블에서 비공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차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협상에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대신 다른 쟁점에서 양보를 얻은 뒤, 6자회담이 열리면 본격적으로 거론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영변의 UEP 시설에 대한 양측의 견해 차이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은 먼저 가동을 중단해야만 6자회담 재개가 가능하다고 못 박아뒀고, 평양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평화적 용도의 시설이므로 경수로를 지어주지 않는 한 중단할 수 없다고 버틴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본 넉 장의 카드 가운데 두 번째인 ‘IAEA 사찰단 복귀’를 통해 이 극단적인 차이를 중재할 타협안 아이디어를 최근 한미 양국 외교가에서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IAEA 사찰단 복귀’는 공식적으로는 영변의 플루토늄 핵 시설에 관한 것이지만, 이를 UEP 시설에까지 확장하자는 게 아이디어의 골자이다. IAEA 사찰단이 플루토늄 시설과 UEP 시설을 모두 상시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확산 문제에 대한 미국의 염려도 덜고 가동중단 불가라는 북한의 입장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좀 더 영악한 우회로’도 모습을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최근 워싱턴 전문가들이 영변 핵 시설의 ‘안전(Safety)’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는 점이 그것이다. 북핵 협상에 참여한 바 있는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10월 미국과 한국의 주요 언론 기고를 통해 “앞으로의 협상에서 북한 핵 시설의 안전 확보를 거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영변 시설의 방사능 오염 수준이 심각한 상태이므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같은 재앙을 막으려면 국제적 전문기구의 안전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해야 한다는 것. 서울 주재 6자회담 참가국 외교관의 해석을 들어보자.
“언뜻 북한을 압박하는 취지의 발언이지만 뒤집어보면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린다.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점검이라 해도 상시적으로 이뤄진다면 핵물질 생산 현황이나 해외 유출 가능성을 차단하는 사찰 활동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영변의 UEP 시설까지 이 틀에 묶으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사고 예방이라는 명분으로 북한 핵 활동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논의가 핵안보정상회의에 딱 맞아떨어지는 주제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핵 안보와 핵 안전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식을 만든다는 명분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를 현실화하는 데는 여전히 많은 장애물이 남았다. 일단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을 잠정적으로나마 인정해주는 것이므로 미국이 지나치게 양보하는 모양새가 된다. 영변 이외 지역의 비밀시설 문제는 이 틀에서 벗어난 숨은 뇌관으로 남는다. 그뿐 아니라 이처럼 낮은 수준의 우회로라고 해도 평양은 경제적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왼쪽) 2009년 4월 북한 당국의 출국 명령을 받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소속 북핵 사찰단원들이 평양의 호텔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오른쪽) 2010년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북미 양측이 6자회담 재개를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경우, 결국 ‘수표’는 한국이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데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쉽게 말해 미국이 많은 명분을 포기해가며 회담 재개를 택한다 해도 그 반대급부 제공까지 떠맡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최대 이슈로 떠오른 파이프천연가스(PNG) 프로젝트의 북한 통과 수수료 보장 문제가 그 수단으로 거론되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다. 일각에서는 최근 통일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중인 ‘통일재원 마련’ 역시 이를 반대급부 제공에 ‘당겨쓰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각국의 움직임이 한창이던 10월 17일, 미국 조지아대에서는 남북미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명칭은 전문가 회의였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리종혁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프랭크 자누지 수석전문위원 등 주요 인사가 함께한 자리였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회의 기간 북측은 2012년 ‘강성대국 완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경제를 살리고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을 내비쳤다고 한다. 경제적 반대급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상황진전의 키포인트임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은 문제는 가스관 통과 수수료 보장이든, 5·24 대북(對北) 경제제재 철회든, 혹은 다른 어떤 명목이든, 북측에 반대급부를 제공하려면 한국 정부가 엄청난 국내정치의 압박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측의 입장표명 없이 움직일 경우 그 후폭풍은 선뜻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참을 돌아왔지만 결국 공은 다시 서울로 넘어오는 형국. 앞으로도 모든 종류의 남북 접촉에서 정부가 이 문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핵안보정상회의까지 남은 기간은 이제 4개월 남짓이고, 윤곽을 드러내는 ‘청구서’에 대해 한국이 고민할 수 있는 시간 또한 그만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