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 재배지로 알려진 헌터밸리는 자동차로 시드니 북쪽 2시간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포도주를 생산하는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120여 곳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모든 와이너리가 시음장을 만들어놓고 방문객에게 직접 와인을 맛보게 한다는 점이다. 기업 규모의 와이너리도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끼리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조촐하게 방문객을 맞는 곳도 있다. 나들이 삼아 여기저기 들르다 보면 평소 맛볼 수 없는, 꽤 값나가는 와인까지 접할 수 있다. ‘와인 주당’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더욱이 한쪽 테이블에 치즈, 올리브, 초콜릿, 각종 소스와 잼을 갖춰놓은 곳도 있어 안주 삼아 먹다 보면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얼큰하게 취한다.
헌터밸리는 1797년 영국 식민지 당시 호주총독 존 헌터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영국군 쇼트랜드 중위는 어느 날 유배지에서 도망간 죄수를 쫓아 숲 속을 헤매다 시퍼렇게 흘러가는 강줄기와 완만한 구릉계곡을 우연히 발견하는데, 그곳이 바로 후일 헌터밸리가 되는 곳이다. 따사로운 햇볕이 깃털처럼 내리쬐는 헌터밸리 강가는 토질이 비옥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채소 재배와 낙농, 포도 경작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1837~1839년 극심한 가뭄과 1840년대 경제 불황은 이제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호주의 포도 재배에 큰 타격을 안겼다. 1850년대 돌풍을 일으킨 ‘골드러시’는 포도원에서 일하던 젊은이를 광산으로 떠나게 했다. 포도원은 일손 부족으로 쇠락을 거듭했다.
그 후 헌터밸리의 와인산업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몇몇 농장주가 근근이 명맥을 잇다가 1980년대 들어 질적,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당시만 해도 호주 와인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의 전통 와인 국가에서 생산하는 와인에 밀려 와인업계나 애호가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던 하급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후 호주 정부의 엄청난 투자와 획기적인 와인제조기술 도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와인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와인 병 들고 방문객 사이 누벼
하오의 볕을 피하고 목도 축일 겸 헌터밸리에서 제법 큰 맥귀간 와이너리를 찾았다. 포도밭 옆에 마련한 시음장에 들어서니 천장 끝까지 쌓아놓은 다양한 와인 병이 할로겐 조명을 받아 황홀하게 반짝였다. 맥귀간에서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얀 몰리나는 자신이 추천한 와인 병을 들고 방문객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니며 따라주기에 여념 없었다. 뚱뚱한 편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잽싸고도 쾌활했다.
“여기서 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그동안 수천 명에게 어떤 와인이 좋은지 상담해줬는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와인’은 자기 입에 짝하고 들어맞는 와인이에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타닌이 많이 든 떫고 텁텁한 와인을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벼우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을 선호하죠. 또 여름과 겨울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서도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떤 와인이 좋다고 말하긴 좀 곤란해요.”
와이너리를 찾은 방문객은 대부분 여러 면에서 긴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얀은 우왕좌왕하는 방문객 곁으로 재빨리 다가가 그를 안심시키면서 차근차근 와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한다. 그러고는 “와인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으면 와인바 너머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상책”이라고 귀띔한다. 와인을 먹는 사람이 와인을 만들고 파는 사람보다 와인에 대해 더 잘 알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주지 않는 업자라면 몇백 달러짜리 와인을 권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무리해 그런 와인을 택할 필요는 없어요. 와인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취하려고 입에 털어넣는 위스키나 럼주와는 달라요. 상대가 있는 대화의 술이죠. 경제적으로 부담 없는 상태에서 마음 맞는 친구와 오래도록 이야기하며 편하게 마시는 술이 와인이에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얀은 헌터밸리에서 멀지 않은 밀필드의 아담한 집에서 재혼한 아내와 함께 산다. 토박이 농사꾼에게서 산 집인데, 얀이 근사하게 개조했단다. 그는 오크 향 가득한 초콜릿 빛의 쉬라즈 한 잔을 따라주며 “집 앞으로 와타간스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 굽이굽이 이어져 안개가 짙게 낀 이른 아침이면 캥거루가 가족 단위로 앞마당까지 슬며시 내려올 만큼 아주 전원적인 곳”이라며 집 자랑을 늘어놓았다.
“학창시절 꿈은 영화배우였는데, 고등학생 때 히피 친구와 함께한 스위스 백팩커 여행에서 마신 와인 한 병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꽤 고급 와인이었는데, 그것을 마신 이후 내 머릿속이 오크통처럼 찰랑거리기 시작했죠. 독특한 향, 결코 가볍지 않은 맛, 목을 타고 흐르는 부드러움, 위장을 도발하게 하는 짜릿함에 은은한 취기까지….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후 얀은 배우가 되는 꿈을 접었다. 가상 세계를 살아가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즉물적(卽物的) 체험의 길에 들어서기로 작정한 것. 그는 여인의 턱선을 빼닮은 와인 잔을 서서히 끌어당겨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 유리 테에 살짝 입맞춤한 후 ‘마시듯 아니 마시듯’ 하는 그 무아의 경지로, 한편으론 도리어 와인의 애를 태우거나 차라리 그것에 흠뻑 빠져 취하는 그 본능적이면서도 실체적인 길로 빠져들었다.
배우의 꿈을 버리게 만든 와인 향취
그렇게 와인의 향취에 빠진 얀은 어느덧 와인 컨설턴트 겸 요리전문가이자 헌터밸리를 소개하는 관광 전문 잡지의 편집장이 됐다. 그는 “와인 한 병이 탄생하려면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포도 농사꾼은 농한기인 겨울에도 쉴 수 없어요. 밭을 고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내야 하죠. 또 찬바람을 맞으며 온종일 가지치기를 해야 해요. 봄여름에는 가뭄, 홍수, 병충해와 싸워 이겨내야 하고요. 그래야만 비로소 통통한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가을 포도밭의 이랑 사이를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죠.”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했던가. 헌터밸리에서 와인과 사랑에 빠진 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얀과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와인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흥청거리는 취객의 웃음과 공짜 술이 오가는 헌터밸리는 참으로 평화롭고 너그러운 마을이다.
와인 컨설턴트 얀 몰리나.
헌터밸리는 1797년 영국 식민지 당시 호주총독 존 헌터의 이름에서 비롯했다. 영국군 쇼트랜드 중위는 어느 날 유배지에서 도망간 죄수를 쫓아 숲 속을 헤매다 시퍼렇게 흘러가는 강줄기와 완만한 구릉계곡을 우연히 발견하는데, 그곳이 바로 후일 헌터밸리가 되는 곳이다. 따사로운 햇볕이 깃털처럼 내리쬐는 헌터밸리 강가는 토질이 비옥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채소 재배와 낙농, 포도 경작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1837~1839년 극심한 가뭄과 1840년대 경제 불황은 이제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호주의 포도 재배에 큰 타격을 안겼다. 1850년대 돌풍을 일으킨 ‘골드러시’는 포도원에서 일하던 젊은이를 광산으로 떠나게 했다. 포도원은 일손 부족으로 쇠락을 거듭했다.
그 후 헌터밸리의 와인산업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몇몇 농장주가 근근이 명맥을 잇다가 1980년대 들어 질적,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당시만 해도 호주 와인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의 전통 와인 국가에서 생산하는 와인에 밀려 와인업계나 애호가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던 하급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후 호주 정부의 엄청난 투자와 획기적인 와인제조기술 도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와인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와인 병 들고 방문객 사이 누벼
하오의 볕을 피하고 목도 축일 겸 헌터밸리에서 제법 큰 맥귀간 와이너리를 찾았다. 포도밭 옆에 마련한 시음장에 들어서니 천장 끝까지 쌓아놓은 다양한 와인 병이 할로겐 조명을 받아 황홀하게 반짝였다. 맥귀간에서 와인 컨설턴트로 일하는 얀 몰리나는 자신이 추천한 와인 병을 들고 방문객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니며 따라주기에 여념 없었다. 뚱뚱한 편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잽싸고도 쾌활했다.
“여기서 일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그동안 수천 명에게 어떤 와인이 좋은지 상담해줬는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와인’은 자기 입에 짝하고 들어맞는 와인이에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타닌이 많이 든 떫고 텁텁한 와인을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벼우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을 선호하죠. 또 여름과 겨울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서도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어떤 와인이 좋다고 말하긴 좀 곤란해요.”
맥귀간 와이너리 와인 저장고.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주지 않는 업자라면 몇백 달러짜리 와인을 권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무리해 그런 와인을 택할 필요는 없어요. 와인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 취하려고 입에 털어넣는 위스키나 럼주와는 달라요. 상대가 있는 대화의 술이죠. 경제적으로 부담 없는 상태에서 마음 맞는 친구와 오래도록 이야기하며 편하게 마시는 술이 와인이에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얀은 헌터밸리에서 멀지 않은 밀필드의 아담한 집에서 재혼한 아내와 함께 산다. 토박이 농사꾼에게서 산 집인데, 얀이 근사하게 개조했단다. 그는 오크 향 가득한 초콜릿 빛의 쉬라즈 한 잔을 따라주며 “집 앞으로 와타간스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 굽이굽이 이어져 안개가 짙게 낀 이른 아침이면 캥거루가 가족 단위로 앞마당까지 슬며시 내려올 만큼 아주 전원적인 곳”이라며 집 자랑을 늘어놓았다.
헌터밸리 맥귀간의 포도 수확 모습.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후 얀은 배우가 되는 꿈을 접었다. 가상 세계를 살아가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즉물적(卽物的) 체험의 길에 들어서기로 작정한 것. 그는 여인의 턱선을 빼닮은 와인 잔을 서서히 끌어당겨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 유리 테에 살짝 입맞춤한 후 ‘마시듯 아니 마시듯’ 하는 그 무아의 경지로, 한편으론 도리어 와인의 애를 태우거나 차라리 그것에 흠뻑 빠져 취하는 그 본능적이면서도 실체적인 길로 빠져들었다.
배우의 꿈을 버리게 만든 와인 향취
그렇게 와인의 향취에 빠진 얀은 어느덧 와인 컨설턴트 겸 요리전문가이자 헌터밸리를 소개하는 관광 전문 잡지의 편집장이 됐다. 그는 “와인 한 병이 탄생하려면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땀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포도 농사꾼은 농한기인 겨울에도 쉴 수 없어요. 밭을 고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내야 하죠. 또 찬바람을 맞으며 온종일 가지치기를 해야 해요. 봄여름에는 가뭄, 홍수, 병충해와 싸워 이겨내야 하고요. 그래야만 비로소 통통한 포도가 주렁주렁 달린 가을 포도밭의 이랑 사이를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죠.”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했던가. 헌터밸리에서 와인과 사랑에 빠진 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얀과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와인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흥청거리는 취객의 웃음과 공짜 술이 오가는 헌터밸리는 참으로 평화롭고 너그러운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