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감독은 성적만으로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난해 팀을 4강에 이끌고도 2011년 프로야구계를 떠나야 했던 김경문, 김성근, 로이스터, 선동열 전 감독(왼쪽부터).
얼핏 네 가지 조건만 보면 쉬운 듯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게 프로야구 감독이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 이후 숱한 감독이 배출됐지만, 장수하거나 이름을 날린 감독이 몇 명에 불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자로 태어나 항공모함 선장, 오케스트라 지휘자, 그리고 프로야구 감독은 꼭 해봐야 할 직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로야구 감독은 매력적이면서도 되기 힘든 직업이다. NC 다이노스 감독을 포함해 현재 한국의 프로야구 감독은 9명뿐이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프로야구 감독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광의 자리에 있지만 날마다 승부를 펼쳐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매일 피 말리는 전쟁을 치르고 순간순간 긴박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 전승 신화를 일궈내며 금메달 획득을 이끈 김경문 감독(현 NC ). 그는 현역 시절 빼어난 스타플레이어가 아니었으며, 포수라는 포지션의 한계 때문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04년 두산 사령탑을 맡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종국에는 한국 야구사에 전무후무한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영광을 안겼다. 그런 김 감독도 늘 “감독이란 자리는 외롭고 고독하다”고 말하곤 한다. 4월 어느 날 서울 잠실구장 두산 감독실에서 김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우연히 그의 후배 가족이 방문했다. 그런데 평소 활발하다던 초등학생이 김 감독 앞에서 왠지 모르게 움츠린 듯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시 김 감독의 혼잣말은 이랬다.
경기마다 스트레스 상상 초월
“감독이라고 하면 애들도 무섭고 싫어하나봐.”
프로야구 감독은 쉬운 직업이 아니다. 감독은 1, 2군을 합쳐 90명 안팎인 선수단의 수장이자 20여 명에 이르는 코치의 보스다. ‘성적이 잘 나면 선수 덕분, 못 나오면 감독 탓’이라는 말처럼 선수가 주인공인 상황에서 조연에 머물러야 한다. 주인공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절대 권력을 갖지만 그에 따르는 무한책임에 짓눌려 산다. 하루하루 성적표를 받아보는 ‘하루살이’ 처지라 성적과 관련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김 감독은 팀이 어려울 때 “모든 짐은 내가 혼자 져야 한다”면서 “감독에게 많은 연봉을 주는 것도 그래서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2006년과 2009년, 두 번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야구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려 ‘국민 감독’으로 칭송받는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장은 현역 감독 시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규모만 작을 뿐이지, 야구 감독은 한 나라의 대통령과 같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의 예로 코치들과의 관계를 언급했다.
“대통령이 몇몇 장관만 예뻐한다면 정부 조직이 잘 굴러갈 수 있겠느냐. 야구 감독도 마찬가지다. 다 같이 모이는 전체 회식 자리가 아니라면, 수석 코치를 제외하고 일반 평 코치들만 따로 불러 술을 먹지 않는다. 코치들 사이에서 누구만 편애하느니 하는 이상한 말이 나올 수 있고, 그러면 조직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판을 뒤흔드는 10월 괴담
최근 타계한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과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불세출의 타자 및 투수였지만, 1군 사령탑의 영예는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한대화(한화), 김시진(넥센) 감독과 이만수 SK 감독대행이 있지만 KIA 조범현 감독이나 NC 김경문 감독은 현역 시절 그렇게 빼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현역 선수로서는 물론, 지도자로서도 한국시리즈 우승 기쁨을 맛본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은 이런 면에서 특별한 경우다. ‘최고 선수=최고 감독’ 등식이 항상 성립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성적만 신경 써도 되는 선수와 달리, 감독은 팀이라는 전체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빼어난 머리와 냉철한 가슴, 그리고 선수단 장악력, 장기레이스에서 팀을 이끌 수 있는 기획력 등 프로야구 감독이 갖춰야 할 점은 수도 없이 많다.
감독은 선수의 운명을 좌우할 권리뿐 아니라 코치들의 생사여탈권도 갖고 있다. 다년 계약인 감독과 달리 코치는 1년 계약이 대부분이다. 코치들은 감독 뜻에 따라 옷을 벗고 입는다. 그렇지만 감독 역시 어느 순간 경질의 칼을 받을지 모른다. 현장 감독들이 “우리는 파리 목숨”이라고 자조적인 농담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0년 4강에 올랐던 SK 김성근, 삼성 선동열, 두산 김경문, 롯데 로이스터 감독 중 지금까지 지휘봉을 그대로 잡고 있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선동열과 로이스터 감독은 작년 시즌 뒤 경질됐고, NC로 자리를 옮긴 김경문 감독은 6월 성적 부진에 따라 두산 감독에서 자진사퇴했다. 김성근 감독은 구단과 재계약과 관련해 갈등을 보이다 8월 결국 해임됐다. 이제는 성적만으로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는다. 감독에게 성적 그 이상을 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011년 페넌트레이스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국내 프로야구계에는 ‘10월 괴담’이 나돌고 있다. 현재 지휘봉을 잡고 있는 몇몇 감독이 옷을 벗고, 그 후임으로 누가 올 것이란 소문이 그것이다. 시즌 초반 반짝 상승세를 보이다 4강 진출에 실패한 박종훈 LG 감독은 사실상 교체가 확정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시즌 도중 지휘봉을 잡은 김광수 두산 감독대행과 이만수 SK 감독대행의 앞날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예측이 난무한다. 두산은 이미 새 사령탑 물색에 들어갔다는 게 정설이고, 이 대행은 포스트시즌 성적에 따라 정식 사령탑 승격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란 전망이다.
현재 야인으로 지내는 ‘전직 감독’이 제법 많지만, 의외로 ‘감독 후보군’이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선동열 전 삼성 감독, 김인식 KBO 규칙위원장, 양상문 전 롯데 감독 등이 그나마 재취업 가능성이 높은 후보로 꼽힌다. 한 번도 감독직을 맡지 않았던 코치 중에서도 감독감이란 평가를 듣는 이는 한 둘뿐이다. 10월 괴담이 현실이 될 경우, 각 구단 새 사령탑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코치들의 연쇄 이동 등 한바탕 큰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감독 중 누가 옷을 벗고, 누가 지휘봉을 잡게 될까. 올 시즌 종료 후 지켜봐야 할 포인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