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고령화라는 험난한 파고와 맞서야 한다. 고령화는 국가 재정 문제로 귀결한다. 그 중심에 공적연금이 있다. 저출산으로 일하는 인구가 줄고, 수명 연장으로 노인이 증가한다. 경제활동 인구가 노령인구를 부양하는 방식의 연금 제도만으로는 거센 파도를 이겨내기에 역부족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보다 앞서 연금 제도를 도입한 선진국이 어떻게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해 연금 제도를 바꿨는지 살펴보면 타산지석(他山之石),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퇴직연금 종주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1875년 미국 철도운송회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우수 인력을 끌어들이고자 퇴직한 근로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세계 최초로 퇴직연금 제도가 탄생한 순간이다. 이후 미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고,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퇴직연금 기금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퇴직연금 종주국이 됐다. 미국자산운용협회(ICI)는 미국의 연금자산 규모가 2011년 3월 말 기준 18조1000억 달러로 전 세계 연금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퇴직연금 종주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미국 근로자 중 실제로 퇴직연금 혜택을 보는 사람은 절반 정도에 그친다. 근로자 100명 미만의 영세한 중소기업 중에는 퇴직연금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 많다. 2008년 미국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연간 1만 달러가 안 되는 급여를 받는 저소득 근로자 중 14%만 퇴직연금에 가입했다.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법률로 강제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근로자에게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복리후생 서비스의 일환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더 좋은 인력을 유치하려고 연봉을 높이고, 유급휴가를 늘리는 것처럼 퇴직연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영세한 회사는 퇴직연금을 제공하지 못하고, 이는 다시 저소득 근로자의 부실한 노후 준비로 이어진다.
2009년 9월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퇴직연금 가입을 의무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기업의 자유의사에 맡기던 퇴직연금 제도를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강제로 가입하되 근로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 즉각 탈퇴할 수 있다’는 조항을 뒀다. 하지만 퇴직연금이라는 서비스가 자신에게 엄청난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한 거부하는 근로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강제하고 기업이 부담하는 ‘슈퍼애뉴에이션’
10여 년 전 세계은행(World Bank)은 인류에게 닥칠 재앙의 하나로 생각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장수 리스크’를 꼽으면서, 이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모델로 호주의 연금 제도를 제시했다. 호주의 연금 제도를 보면, 여느 국가의 3층 보장연금 제도와 별반 다른 게 없는 듯싶다. 다만 국가가 강제하고 기업이 부담하는 강제저축형 퇴직연금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이 눈에 띈다. 호주인은 이를 ‘슈퍼펀드(Super Fund)’라 부른다.
슈퍼펀드의 구조는 단순하다. 회사가 급여의 일정 부분(9%)을 정기적으로 근로자의 계좌에 적립한 다음, 근로자가 원하는 펀드에 투자해 은퇴할 때까지 운용한다. 물론 중간에 다른 금융 상품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회사를 옮겨도 계속 운용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가 도입한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하다. 결정적 차이는 국가가 연금 가입을 강제한다는 점이다.
호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는 의무적으로 슈퍼펀드에 가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달 급여가 450호주달러 이상인 18세 이상 근로자를 채용하거나, 18세 미만이라 할지라도 일주일에 30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주는 근로자 급여의 9% 이상을 슈퍼펀드에 납입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국가는 기업주에게 각종 페널티를 준다.
근로자 상당수가 회사가 적립하는 금액에 개인 돈을 추가로 납입한다.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적립하는 금액은 급여의 3% 정도다. 슈퍼펀드에 납부한 금액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은퇴 전까지 찾아 쓸 수 없는데도 추가 납입하는 것은 세제 혜택과 관련 있다. 호주에서 일반 근로자에게 부과하는 소득세율은 30%가 넘는다. 하지만 슈퍼펀드에 납입한 금액에 대해서는 최저 세율(15%)을 부과한다. 근로자 처지에선 세금을 떼고 다른 곳에 투자하느니 처음부터 슈퍼펀드에 투자하는 게 이득인 셈이다.
슈퍼펀드의 진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호주 정부는 근로자의 자발적 노후 준비에 박차를 가하려고 저소득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슈퍼펀드에 납부하면 최대 1000호주달러까지 지원해주는 보조적립 제도(co-contribution)를 실시한다. 근로자가 적립한 만큼 국가가 동일한 금액을 쌓아주는 제도다.
이렇다 보니 도입 초기 슈퍼펀드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자신의 노후를 이 제도에 맡겨도 되겠다며 신뢰를 보냈다. 2011년 3월 말 기준 호주 슈퍼펀드 기금 규모는 1조3160억 호주달러(약 1520조 원)에 이른다. 호주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호주 인구가 한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액수다.
민간 효율과 정부 규제가 조화 이룬 공적연금 민영화
1970년 칠레는 연금 제도 붕괴를 경험했다. 고령화와 경제활동 인구 감소로 연금 재정은 갈수록 약화했고, 비효율적 연금자산 운용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겹쳐 정부 재정 지출의 50%를 구멍 난 공적연금을 메우는 데 사용해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칠레 정부는 연금 개혁의 칼날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5월 칠레 정부는 기존의 공적연금을 민간이 운영하는 개인계좌적립 방식으로 바꾸는 연금 개혁에 나섰다. 칠레 근로자들은 월급의 17%를 공적연금으로 납부해왔지만, 제도 개혁으로 월급의 10%만 ‘민간연금관리회사’에 납입하게 됐다. 본인이 원하면 추가로 10%를 납입하고 이 금액에 대해서는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 개인별로 독립된 연금저축계좌(PSA ·Personal Saving Accounts)에 돈을 적립하며, 운용수익률에 따라 나중에 지급받는 연금액이 달라진다. 가입자는 여러 개의 민간연금관리회사 중 한 곳을 골라 자산운용을 맡길 수 있으며, 원하면 회사를 바꿀 수도 있다. 연금 운용 및 수익 책임을 가입자가 진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하다. 단, 기여금을 기업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입자가 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국가가 보장하던 공적연금을 민영화할 때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했고, 국가가 책임을 회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칠레 정부는 국가가 연금 운용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점과 민간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해 나갔다. 운용 효율성을 높이려고 공적연금을 민영화했지만, 연기금의 안정적 운용을 위해 정부는 다양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연금기금감독원 감독 하에 연금기금을 관리하며, 이 자산은 민간연금관리회사가 파산하더라도 압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법으로 보장한다. 또한 연금기금감독원은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상한선을 제시한다. 이러한 정부 개입 탓에 반쪽짜리 연금개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이를 국가의 지나친 간섭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재정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칠레는 민간 효율과 정부 규제가 조화를 이룬 시스템을 큰 부작용 없이 운용하고 있다.
칠레는 저출산, 고령화로 휘청거리던 공적연금을 세계 최초로 개혁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우루과이 등 주변 국가가 칠레식 연금개혁을 뒤따라갔다.
저소득층은 공적지원, 고소득층은 사적연금
영국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덜려고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을 유기적으로 연계했다. 저소득층에 대한 공적지원은 강화하는 한편 중·고소득층의 노후 보장은 사적연금이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영국의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37%로 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하지만, 이를 소득계층별로 나눠 비교하면 저소득층 소득대체율이 53.8%로 고소득층(22.6%)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
영국 정부는 사적연금으로의 이행을 활성화하고자, 법에서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에 가입하면 공적연금의 소득비례부분 납입을 면제해준다. 그 결과 1987년 공적연금 소득비례부분 가입자는 505만 명으로 7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이 중 대부분이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이동했다.
영국 정부는 2012년부터 개인연금계좌 제도(PA·Personal Account)를 도입하려 한다. PA는 연수입이 5000파운드에서 3만3000파운드인 저소득층 근로자가 강제로 가입하는 공공성을 띤 사적연금으로, 근로자가 급여의 4%, 고용주가 3%, 정부가 1%를 분담한다. 조건에 해당하는 근로자는 일단 강제로 가입해야 하지만, 원할 경우 탈퇴할 수 있다.
지금껏 살펴봤듯, 연금 제도를 일찍 도입한 국가들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공적연금의 재정 고갈 문제를 해결하고자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비롯한 사적연금과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사적연금 가입률을 높이려고 ‘당근’(세제 혜택)과 ‘채찍’(의무 가입)을 활용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르게 고령화하는 한국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퇴직연금 종주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1875년 미국 철도운송회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우수 인력을 끌어들이고자 퇴직한 근로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세계 최초로 퇴직연금 제도가 탄생한 순간이다. 이후 미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고, 미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퇴직연금 기금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퇴직연금 종주국이 됐다. 미국자산운용협회(ICI)는 미국의 연금자산 규모가 2011년 3월 말 기준 18조1000억 달러로 전 세계 연금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퇴직연금 종주국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미국 근로자 중 실제로 퇴직연금 혜택을 보는 사람은 절반 정도에 그친다. 근로자 100명 미만의 영세한 중소기업 중에는 퇴직연금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 많다. 2008년 미국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연간 1만 달러가 안 되는 급여를 받는 저소득 근로자 중 14%만 퇴직연금에 가입했다. 미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법률로 강제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근로자에게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복리후생 서비스의 일환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더 좋은 인력을 유치하려고 연봉을 높이고, 유급휴가를 늘리는 것처럼 퇴직연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영세한 회사는 퇴직연금을 제공하지 못하고, 이는 다시 저소득 근로자의 부실한 노후 준비로 이어진다.
2009년 9월 미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퇴직연금 가입을 의무화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기업의 자유의사에 맡기던 퇴직연금 제도를 강제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강제로 가입하되 근로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 즉각 탈퇴할 수 있다’는 조항을 뒀다. 하지만 퇴직연금이라는 서비스가 자신에게 엄청난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한 거부하는 근로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강제하고 기업이 부담하는 ‘슈퍼애뉴에이션’
10여 년 전 세계은행(World Bank)은 인류에게 닥칠 재앙의 하나로 생각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장수 리스크’를 꼽으면서, 이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모델로 호주의 연금 제도를 제시했다. 호주의 연금 제도를 보면, 여느 국가의 3층 보장연금 제도와 별반 다른 게 없는 듯싶다. 다만 국가가 강제하고 기업이 부담하는 강제저축형 퇴직연금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이 눈에 띈다. 호주인은 이를 ‘슈퍼펀드(Super Fund)’라 부른다.
슈퍼펀드의 구조는 단순하다. 회사가 급여의 일정 부분(9%)을 정기적으로 근로자의 계좌에 적립한 다음, 근로자가 원하는 펀드에 투자해 은퇴할 때까지 운용한다. 물론 중간에 다른 금융 상품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회사를 옮겨도 계속 운용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가 도입한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하다. 결정적 차이는 국가가 연금 가입을 강제한다는 점이다.
호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는 의무적으로 슈퍼펀드에 가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달 급여가 450호주달러 이상인 18세 이상 근로자를 채용하거나, 18세 미만이라 할지라도 일주일에 30시간 이상 일하는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주는 근로자 급여의 9% 이상을 슈퍼펀드에 납입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국가는 기업주에게 각종 페널티를 준다.
근로자 상당수가 회사가 적립하는 금액에 개인 돈을 추가로 납입한다. 근로자가 자발적으로 적립하는 금액은 급여의 3% 정도다. 슈퍼펀드에 납부한 금액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은퇴 전까지 찾아 쓸 수 없는데도 추가 납입하는 것은 세제 혜택과 관련 있다. 호주에서 일반 근로자에게 부과하는 소득세율은 30%가 넘는다. 하지만 슈퍼펀드에 납입한 금액에 대해서는 최저 세율(15%)을 부과한다. 근로자 처지에선 세금을 떼고 다른 곳에 투자하느니 처음부터 슈퍼펀드에 투자하는 게 이득인 셈이다.
호주 시드니의 재림교단 은퇴자 마을에서 노인들이 카드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 보니 도입 초기 슈퍼펀드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자신의 노후를 이 제도에 맡겨도 되겠다며 신뢰를 보냈다. 2011년 3월 말 기준 호주 슈퍼펀드 기금 규모는 1조3160억 호주달러(약 1520조 원)에 이른다. 호주 주식시장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호주 인구가 한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액수다.
민간 효율과 정부 규제가 조화 이룬 공적연금 민영화
1970년 칠레는 연금 제도 붕괴를 경험했다. 고령화와 경제활동 인구 감소로 연금 재정은 갈수록 약화했고, 비효율적 연금자산 운용과 높은 인플레이션이 겹쳐 정부 재정 지출의 50%를 구멍 난 공적연금을 메우는 데 사용해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칠레 정부는 연금 개혁의 칼날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81년 5월 칠레 정부는 기존의 공적연금을 민간이 운영하는 개인계좌적립 방식으로 바꾸는 연금 개혁에 나섰다. 칠레 근로자들은 월급의 17%를 공적연금으로 납부해왔지만, 제도 개혁으로 월급의 10%만 ‘민간연금관리회사’에 납입하게 됐다. 본인이 원하면 추가로 10%를 납입하고 이 금액에 대해서는 비과세 혜택을 받는다. 개인별로 독립된 연금저축계좌(PSA ·Personal Saving Accounts)에 돈을 적립하며, 운용수익률에 따라 나중에 지급받는 연금액이 달라진다. 가입자는 여러 개의 민간연금관리회사 중 한 곳을 골라 자산운용을 맡길 수 있으며, 원하면 회사를 바꿀 수도 있다. 연금 운용 및 수익 책임을 가입자가 진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하다. 단, 기여금을 기업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입자가 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국가가 보장하던 공적연금을 민영화할 때 많은 사람이 우려를 표했고, 국가가 책임을 회피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칠레 정부는 국가가 연금 운용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점과 민간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해 나갔다. 운용 효율성을 높이려고 공적연금을 민영화했지만, 연기금의 안정적 운용을 위해 정부는 다양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연금기금감독원 감독 하에 연금기금을 관리하며, 이 자산은 민간연금관리회사가 파산하더라도 압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법으로 보장한다. 또한 연금기금감독원은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상한선을 제시한다. 이러한 정부 개입 탓에 반쪽짜리 연금개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이를 국가의 지나친 간섭이 아니라 국민의 노후재정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칠레는 민간 효율과 정부 규제가 조화를 이룬 시스템을 큰 부작용 없이 운용하고 있다.
칠레는 저출산, 고령화로 휘청거리던 공적연금을 세계 최초로 개혁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우루과이 등 주변 국가가 칠레식 연금개혁을 뒤따라갔다.
저소득층은 공적지원, 고소득층은 사적연금
영국 정부는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덜려고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을 유기적으로 연계했다. 저소득층에 대한 공적지원은 강화하는 한편 중·고소득층의 노후 보장은 사적연금이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영국의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37%로 OECD 국가 중 낮은 편에 속하지만, 이를 소득계층별로 나눠 비교하면 저소득층 소득대체율이 53.8%로 고소득층(22.6%)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
영국 정부는 사적연금으로의 이행을 활성화하고자, 법에서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에 가입하면 공적연금의 소득비례부분 납입을 면제해준다. 그 결과 1987년 공적연금 소득비례부분 가입자는 505만 명으로 7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이 중 대부분이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으로 이동했다.
영국 런던 토인비 홀에서 노인들이 강사의 지도로 그림 그리기 학습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껏 살펴봤듯, 연금 제도를 일찍 도입한 국가들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공적연금의 재정 고갈 문제를 해결하고자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비롯한 사적연금과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사적연금 가입률을 높이려고 ‘당근’(세제 혜택)과 ‘채찍’(의무 가입)을 활용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르게 고령화하는 한국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