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혁명사적관에 있는 김형직 지원 사상 전시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이진한)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주범 김모 씨는 1990년대 초 중국을 왕래하다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지금은 내각 소속의 225국)에 포섭됐다. 1993년 9월 그는 ‘지원개발’을 설립해 시장조사 명목 등으로 해외를 드나들며 225국 공작조와 접선해왔다. 이듬해 6월엔 이모 씨를 대표로 한 정보기술(IT) 기업 ‘지원넷’을 만들고 자신은 이사로 등재했다.
왜 김씨는 조직과 기업 이름으로 ‘왕재산’과 ‘지원’을 택했을까. 검찰은 “지원은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가진 사상”이라고 설명한다. ‘지원(志遠)’은 우리 국어사전에는 없는 낱말로, 북한사전은 이를 ‘뜻이 원대(遠大)한 것’이라 정의해놓았다. 지원이라는 말을 김형직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김일성 출생지인 평양의 만경대혁명사적관(이하 사적관, 아래 사진) 초입에 걸어놓은 전시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젊은 시절의 김형직을 그린 초상화 옆에는 ‘志遠’이라는 한자가 당당히 걸려 있다. 그 밑에는 젊은 김형직이 붓으로 ‘志遠’을 쓰는 그림과 “만경대 고향집에서 ‘지원’이라고 쓰시는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 선생”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소년 김일성을 무릎에 앉힌 김형직 그림을 걸어놓고 “만경봉에서 아버님으로부터 애국주의 교양을 받으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설명을 붙인 것도 있다. 이런 전시물은 김일성이 아버지로부터 ‘뜻을 원대하게 세워라’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년 김일성은 만주와 평양을 오간 적이 있다. 사적관 안내인은 “수령께서 만주와 평남 대동군의 외가를 오간 것은 ‘뜻을 원대히(志遠)’한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주차 관리 시스템으로 매출 올려
왕재산은 북한이 보천보와 함께 김일성의 반일투쟁 성지로 조성한 곳이다. 북한은 그런 사실이 없는데도, 김일성이 1933년 함경북도 온성군 왕재산(山)이란 곳에 침투해 반일(反日)전선 확대 연설을 했다고 주장한다. 1925년 만주로 간 김일성은 20년간 중국공산당원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으나 1937년 보천보 침투 외에는 1945년 광복이 올 때까지 조국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재산과 보천보를 김일성 항일투쟁의 성지로 만들고, 북한의 양대 경음악단의 이름에 붙였다.
왕재산 간첩단의 또 다른 특징은 남한에서 직접 공작금을 조달했다는 혐의를 받는다는 점이다. 왕재산이 만든 코리아콘텐츠랩은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에게서 특수자료 현물반입 승인을 받고 조총련 산하의 ‘조선메디아’로부터 북한 자료를 반입해 도서관과 연구소 등에 배포했다. 이렇게 해서 2008~2010년 9억6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검찰은 코리아콘텐츠랩이 매출액의 50%는 대금으로 조총련에 보내고 나머지는 활동자금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
지원넷은 2009년 225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차량번호 인식시스템을 기반으로 ‘주차 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국내에서 22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검찰은 이 금액 가운데 상당 부분도 공작금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