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백화점 본점 애비뉴엘관 2층에 자리한 명품시계 멀티숍 ‘크로노다임’(아랫사진).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는 이도진(가명) 씨는 며칠 전 퇴근 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았다. 그는 곧장 애비뉴엘관 2층에 자리한 명품시계 멀티숍 ‘크로노다임’을 찾아 명품잡지에서 눈여겨봐둔 예거 르꿀뜨르(Jaeger Lecoultre)의 ‘마스터 컴프레서 다이빙 워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1000만원이 넘는 이 시계는 재고가 없었고, 그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그는 폴 스미스(Paul Smith) 매장에 들러 여름휴가 때 입을 20만원대 셔츠와 60만원대 크로스백을 구입했다. 올해 34세인 이씨는 아직 미혼이다.
KBS 월화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주인공 조재희(지진희 분)는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나이 마흔의 미혼이다. 그는 십수만원짜리 페도라를 즉흥적으로 구입하고 수백만원짜리 오디오 스피커,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따낸 고가의 주사위 게임 등을 아무 망설임 없이 사들인다. 그는 ‘자유로운 소비야말로 독신의 특권’이라고 믿는다.
피부 관리에서도 골드미스보다 ‘큰손’30, 40대 고소득 미혼남성을 의미하는 ‘골드미스터’가 불황 혹은 성장정체기에 놓인 기업들의 돌파구로 주목받고 있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30, 40대 남성 고객의 구매금액은 전년 동기 대비 13.7% 증가, 다른 고객군(群)과 비교해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롯데카드 가입자 가운데 구매매출 상위 1%에 해당하는 고객들의 월평균 구매금액에서도 미혼남성은 미혼여성보다 11.4% 더 많이 지출했다. 이들은 기혼남성보다 1% 적게 소비했지만, 기혼남성의 카드가 가족 공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연 골드미스터들의 구매력이 두드러진다. 신세계백화점에서도 30대 남성이 쓴 돈이 전체 매출의 13%를 차지한다.
불과 7%대이던 2006년과 비교하면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세다. 롯데백화점 조영제 마케팅팀장은 “30, 40대 미혼남성들은 재테크를 제외하고는 고정 지출 비용이 없어 다른 세대보다 경기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면서 “여기에 자기표현 욕구도 커져 이들의 패션상품 소비는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은 음료를 마시며 남성용 소품을 둘러볼 수 있는 바 형태의 매장 ‘파리바’를 운영한다.
CNP차앤박피부과의 분석도 흥미롭다. 30, 40대 미혼남성 고객들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1인당 700만~1000만원을 지출해 골드미스 고객보다 3배나 높은 구매력을 보였다. 아내와 함께 온 기혼남성들이 평균 100만원을 쓰는 것과 비교해도 골드미스터의 ‘파워’는 단연 최고.
CNP차앤박피부과 관계자는 “미혼남성들은 회당 80만~120만원인 주름, 탄력, 기미색소 관리 프로그램을 한 번에 5회 정도 구매한다”고 귀띔했다. 동행 쇼핑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의 ‘코디바’에서도 미혼남성의 구매력은 돋보인다.
신나영 스타일리스트는 “코디바 이용고객의 절반이 35~45세 남성인데, 그중 미혼의 구매단가가 기혼의 2배일 정도로 골드미스터들의 씀씀이가 크다”고 전했다. 이처럼 골드미스터들의 구매력이 날로 높아지자 백화점은 이들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을 점차 강화하는 추세다.
롯데백화점은 명품시계, 해외명품 수입넥타이, 남성 직수입 트렌디화 등 골드미스터들이 선호하는 제품과 브랜드에 대한 편집매장을 늘려가고 있다. 문화센터 측도 ‘DSLR 다루기’ ‘신사복 제대로 알고 입기’ 등 골드미스터들이 퇴근 후나 주말에 들을 만한 강좌들을 크게 강화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부터 압구정 본점에 커피나 생과일주스를 마시면서 남성용 액세서리를 고를 수 있는 바 형태의 매장 ‘파리바’를 운영 중이다.
신촌점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와 오디오 북 등을 둥근 기둥을 중심으로 설치해 남성고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5월 론칭한 ‘S-OFFICE 클럽’ 또한 골드미스터를 겨냥한 멤버십 제도다. 각종 할인쿠폰을 제공함으로써 백화점 주변에서 근무하는 골드미스터들을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현재 S-OFFICE 가입 고객의 객단가(18만원)가 고객의 전체 평균(6만5000원)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쇼핑 신인류에 마케팅 집중40대 중후반 이상의 한국 남성들은 근검절약을 몸에 익히며 ‘장 보는 일은 여자 몫’이란 가치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1970년을 전후해 태어난 골드미스터들은 경제발전과 소득수준 향상에 따른 소비문화의 세례를 어느 정도 받으며 성장한 세대다.
소비트렌드 전문가인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이들은 어머니나 아내에게 의존하지 않고 직접 쇼핑을 즐긴 첫 세대”라고 정의하면서 “기존 고객군은 이미 성장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쇼핑 신인류인 골드미스터에 대한 마케팅 집중 전략은 당분간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골드미스터가 골드미스만큼 대규모 집단으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전히 남성에게 집중된 ‘생활의 무게’ 탓이다. 제일기획 박재항 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은 “여대생이나 기혼여성에게까지 파급효과를 미치는 골드미스와 달리, 고소득의 미혼남성들은 저소득 남성이나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기혼남성들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작다”며 “이들이 골드미스처럼 유의미한 메가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볼 문제”라고 지적했다.
4명의 골드미스터가 말하는 골드미스터목
| 현대카드의 ‘모마 온라인 스토어’는 골드미스터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은 골드미스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마 온라인 상품 ‘Left and Right Cufflinks’. 최근 번역 출간된 ‘남자에게 팔아라’(Marketing To Men·미래의창 펴냄)의 저자이자 마케팅 전문 저널리스트인 마크 턴게이트는 ‘소비자로서의 남성’이 갖는 특성을 모르고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골드미스터들이 갖는 소비 특성은 무엇일까. 4명의 골드미스터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그 힌트를 찾아봤다.
▶ 골드미스터는 ‘정보사냥꾼’이다 전문직 종사자인 골드미스터 김모(32) 씨는 쇼핑 마니아다. 하지만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소비하는 여성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백화점이나 청담동 명품숍을 ‘운동 삼아’ 둘러보며 최신 트렌드를 익힌다. 명품잡지나 맨스타일닷컴(http://men. style.com) 같은 웹사이트를 틈틈이 참고하는 것도 물론이다. “피코트(pea coat)를 사야겠다 싶으면 백화점과 청담동 매장들을 죽 둘러본다. 그리고 유스닷컴(http://yoos.com) 같은 해외 쇼핑사이트에서 디자인과 가격을 비교해본다. 가장 맘에 드는 피코트가 결정되면 다시 매장에 가서 입어보고 구입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김씨의 설명이다. 남성 고객들은 명품 같은 고가상품의 경우 최소 2~3개월 고민하고 구입하기 때문에 한순간의 경기 동향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연히 불황에도 둔감하다. CNP차앤박화장품의 ‘댄디슈머’(Dandy와 Prosumer의 합성어) 캠페인은 이런 골드미스터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댄디슈머로 선정된 고객들은 CNP차앤박화장품에서 출시된 남성화장품을 직접 사용하고 후기를 작성하는데, 그럼으로써 회사는 잠재 고객들에게 신뢰성 높은 제품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도은주 마케팅전략팀장은 “골드미스터는 화장품을 선택할 때 브랜드 인지도보다 과학적 정보,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긴다”면서 “그만큼 댄디슈머 캠페인의 효과가 클 것”이라고 기대했다. ▶ 골드미스터는 한꺼번에 많이 산다 벤처기업 빅슨네트웍스의 안유석(36) 대표는 바쁜 업무로 쇼핑에 짬을 낼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트렌드에 뒤처지는 옷을 입고 다니긴 싫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좋아하는 매장에 들러 바지 두세 벌과 상의 대여섯 벌을 한꺼번에 산다. 새로운 매장을 발굴하는 것도 버거워 단골 매장만을 찾는다. 그는 “여자친구와 가기보다 혼자 다니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좋다”고 말했다. 화장품은 해외출장을 나갈 때마다 공항 면세점에서 산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백화점마다 다양한 브랜드와 제품군을 한데 모아놓은 남성용 편집매장을 늘리고 있는데, 이는 골드미스터들의 ‘다량 구매’ 특성을 고려해 쇼핑 동선을 최소화해주려는 전략인 것이다. ▶ 골드미스터는 여행을 좋아한다 내외에셋투자자문의 펀드매니저 김의수(34) 차장은 여행을 좋아한다.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을 가는 그는 잠은 좀 불편하게 자더라도 먹는 것, 보는 것, 배우는 것만큼은 아끼지 말자는 주의다. 2년 전 뉴욕에 6개월간 머물 때는 여러 명이 집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서블렛을 이용해 1박에 30~40달러를 썼지만, 한 끼당 100달러가 넘는 유명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즐겼다. 김 차장은 “레스토랑 가이드북인 ‘자갓(Jagat)’을 들고 유명 레스토랑들을 찾아다녔다”며 “뉴욕에 도착해 처음 간 식당이 피터 루거스 스테이크 하우스(Peter Luger’s Steak House)였는데, 점심 가격이 100달러가 넘었다”고 회상했다. 현대카드는 여행, 레저 서비스를 강화한 프리미엄카드 ‘더 레드(the Red)’와 여행 서비스를 특화한 자사 웹사이트 ‘프리비아(PRIVIA)’를 통해 여행을 즐기는 골드미스터들을 공략하고 있다. ‘더 레드’의 경우 전체 회원 가운데 20, 30대가 70%에 이르며, 그중 남성 비율이 70%나 된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일반카드 회원과 비교해 항공사, 특급호텔, 면세점 등에서의 사용 빈도 및 사용액이 높은 편”이라고 전했다. ▶ 어떤 골드미스터는 혼자 쇼핑하는 게 쑥스럽다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채정연(40) 대표는 자동차 튜닝 마니아다. 그는 ‘정보 사냥꾼’이라는 골드미스터의 특성에 맞게 각종 튜닝 정보를 섭렵한 다음에야 튜닝 매장을 당당히 찾아간다. 그러나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갈 때는 왠지 쑥스럽다. 점원에게 가격을 물어보는 것이 어색하고, 입어본 옷을 구입하지 않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채 대표는 “그래서 직원과 안면이 있는 매장만 찾거나, 제대로 보지 않고 서둘러 사갖고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골드미스터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백화점들의 과제다. 현대백화점의 ‘다림질 서비스’는 그런 차원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압구정 본점은 남성정장 브랜드 매장마다 설치된 계산대를 다림질판 겸용으로 리뉴얼했다. 고객이 피팅룸에서 새 옷을 입어보는 동안, 입고 온 옷을 다림질해주는 것.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점원이 고객만 쳐다보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고객이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