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때 노 대통령을 보좌한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은 4월21일 검찰에 구속됐다.
때가 때인 만큼 화제가 자연스럽게 ‘노무현-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이야기로 흘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총무비서관 자리를 지킨 박 전 비서관으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을 법도 하다. 김 전 실장은 이 자리에서 “역대 총무비서관이 줄줄이 구속됐는데, 5년 동안 청와대의 안살림을 맡았음에도 조그만 잡음조차 내지 않았으니 참 장하다. 그때는 (DJ가 돈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았지만, 설령 시켰어도 안 했을 것”이라며 박 전 비서관을 칭찬했다.
그의 말마따나 박 전 비서관은 ‘성공한 총무비서관’의 대표적 인물이다. DJ와 임기를 같이하고 청와대에서 나온 뒤에도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 임채정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지냈을 만큼 흠결이 없었다. 재직 당시엔 출입기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술잔을 돌리면서 ‘대통령 홍보’도 잘했다는 평가다.
마음먹기에 따라 중요 國事까지 관여
사실 청와대 총무비서관 자리는 온갖 유혹에 노출된다. 물론 외형적 기능은 기업체의 총무 파트와 유사하다. 하지만 권력의 결정체인 대통령실(노무현 정부까지는 ‘대통령비서실’)의 인사와 재무를 관장하는 만큼 일정 부분 ‘권력’이 생긴다.
업무 특성상 대통령과 독대하는 경우가 많아 마음먹기에 따라선 청와대 밖의 중요한 국사에까지 간여할 수 있다. 청와대 안팎의 분위기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대통령의 복심을 잘 아는 핵심 측근일수록 그런 역할이 커진다.
특히 총무비서관은 이번에 정상문 전 비서관의 사례에서 확인된 것처럼 대통령 비자금 성격의 돈까지 관리하는 경우도 있어 정권교체 후 구(舊)정권 비리 수사 때 늘 주의해야 할 인물로 떠오른다. 또 개인적으로도 ‘떡고물’을 만지기 쉬워서 검찰의 표적이 되게 마련이다.
청와대 직제상 총무비서관은 대통령실장 직속이다. 1급 자리지만 비서관 중 가장 많은 직원을 거느릴 뿐 아니라 웬만한 수석비서관보다 직속 부하가 많다. 현재 총무비서관은 인사, 경리, 구매, 행정, 비상계획, 본관관리, 시설관리, 전산 파트 등의 부서를 총괄하고 이곳에 60명 정도의 정식 직원이 근무한다.
홍인길 전 총무수석 (김영삼 대통령 재임 중, 맨 위 사진)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 중간 사진) 김백준 현 총무비서관 (맨 아랫사진)
특히 최 전 비서관은 고교 시절 독서실에서 총무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노 전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 때문에 “독서실 총무가 친구 덕분에 청와대 총무가 됐다”는 말도 나왔다. 최 전 비서관도 2002년 대선 직후 SK로부터 10억원가량의 양도성 예금증서(CD)를 받은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 구속됐다.
청와대 안살림 책임자 가운데 구속 1호는 김영삼(YS) 대통령 시절의 홍인길 총무수석이다. YS 정권 때까지는 총무 책임자의 직책이 차관급인 ‘수석비서관’이었다 DJ 정권이 들어서면서 1급 비서관으로 격하했다. DJ는 취임과 동시에 홍 전 수석 비리사건을 빌미로 격을 낮췄고, 외부의 ‘접대’ 유혹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박금옥)을 앉혔다.
YS의 인척으로 ‘상도동계’ 집사이던 홍 전 수석은 김영삼 정부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의 집사가 됐다. 그는 총무수석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살림살이뿐 아니라, 정치권의 일에도 폭넓게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홍 전 수석은 1995년 말 청와대를 나와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부산서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총무수석 시절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에게서 자금 대출 청탁과 함께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1997년 구속 기소된 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는 바람에 금배지를 잃었다.
상도동 집사 시절부터 ‘기분파’로 잘 알려진 홍 전 수석이 청와대 살림을 맡았을 때는 비서실의 ‘실탄’이 넉넉했다고 한다. 비서실 참모들이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회식도 하고, 기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수활동비가 ‘눈먼 돈’으로 둔갑
그러다 홍 전 수석의 후임으로 유한양행에서 오래 근무한 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의 유도재 씨가 입성하고부터는 청와대에 만연하던 온기가 걷히고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기업인 출신답게 정해진 한도 내에서 돈을 쓰고 용처도 빡빡하게 챙겼기 때문이다.
김백준 현 청와대 총무비서관도 이명박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다. 이 대통령의 고려대 상대 2년 선배로 현대그룹에서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뒤 30년 넘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이 대통령의 자금 사정을 누구보다 정확히 아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정 전 비서관이 빼돌린 12억원은 대통령실의 예산 가운데 ‘특수활동비’의 일부다. 특수활동비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7년에 만든 ‘예산 및 기금운영계획 집행지침’에 “특정한 업무수행 및 사건수사 활동에 직접 소요되는 경비”라고 규정돼 있다.
이 활동비의 특징은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먼 돈’으로 둔갑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2008년 대통령비서실에서 사용한 특수활동비는 모두 115억1000여 만원이고, 2007년에는 111억7000여 만원이었다. 총무비서관이 훤하게 들여다보는 이 돈의 일부가 청와대 밖으로 빼돌려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정권에서는 그런 사례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