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259km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요즘은 고속 객차가 많아 표만 잘 구하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까지 9259km를 6일 만에 주파할 수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구입하는 열차표는 이 구간을 보름 동안 달리는 완행열차다. 나는 TSR 일부 구간을 세 번 이용해봤지만 아직 완주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 하지만 부분 체험으로도 ‘TSR의 낭만’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는 있다.
TSR는 오르는 순간 외부 세계와 단절된 기분을 갖게 한다. 한국 열차에서처럼 인터넷도 할 수 없고, 일부 구간에선 전화 통화도 안 된다. 낭만 모드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다. 낯선 사람들과 상당히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낭만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혼자 여행길에 올라 같은 침대칸에 누워 있는 승객들과 장시간 아무 말 없이 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침대칸에 남녀 승객이 동시에 탑승하면 더욱 그렇다. 2006년 가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중간 구간인 러시아 제3의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완행열차를 탔는데, 러시아어를 더듬거리며 말하는 50대 중국 여성의 옆자리에 앉았다.
객차 줄이고 화물차 늘릴 계획 … 서민들 “요금 오르면 어쩌나”
그 여성은 2주 전 베이징을 출발해 바이칼 호 인근인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고 했다. 모스크바 재래시장에 중국 물건을 실어 나르는 보따리 장수였다. 그는 여행 내내 머리를 감지 못했다고 했다. 객차 안은 머리 냄새와 각종 악취가 섞여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 중국 여성과 함께 기차여행을 해야 하는 이틀 동안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여차장에게 맥주를 주문하면서 편하게 잠자는 방법을 물었더니 중국 여성이 잔뜩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왜 옆자리에 있는 나와 대화하지 않고 차장에게 말을 거느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물론 모든 승객이 이런 상황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장시간 여행을 하면 이처럼 ‘강요된 낭만’을 체험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색다른 낭만을 제공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자본주의식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지난달 “TSR가 앞으로 객차를 줄이고 화물차를 늘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TSR를 운영하는 러시아 철도공사는 자동차 운송용 화물차를 30%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TSR는 승객 요금이 항공료의 3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한 게 장점이었다. 러시아 인구의 34%가 열차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장거리 이용자에 대한 할인 혜택도 많았다. 그런데 객차가 줄면 요금도 올라갈 것이라고 러시아 언론은 전망한다. TSR를 완전히 자본주의식으로 바꿔 수익을 많이 남기겠다는 게 러시아 철도청의 계산이다.
TSR 객차가 바뀌면 비싼 표를 산 여행객들이 체험할 낭만적 분위기는 또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