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들의 산재신고를 기피하던 건설사들이 재해율 산정기준이 바뀌면서 산재신고를 하는 대신 피해 진단을 줄이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건설현장에서 근로자들의 부상 사고가 일어날 경우 건설사 측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해 근로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일단 산재 사고로 접수되면 노동부가 평가하는 해당 건설사의 재해율 수치가 올라가고 그로 인해 관급공사 입찰 제한 및 산재보험료 상승 등의 불이익이 따르기 때문에 그동안 건설사들은 신고를 기피해왔다. 그 대신 피해 근로자와 개별적으로 합의하거나 아예 책임을 근로자 과실로 돌려 사고를 원천적으로 묵시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이처럼 건설사들의 산재신고 기피가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이에 따른 폐해가 심각해지자 노동부는 재해율 산정기준(2007년 1월12일 건설업체 산업재해 발생률 및 산업재해 발생 보고 의무 위반 건수 산정기준 개정)에 변화를 줬다.
건설사, 병원과 암묵적 거래 종용
건설사 재해율은 조달청이 실시하는 입찰 참가자격 업체 사전심사(Pre-Qualification)의 신인도 평가 항목에 반영되는 점수로 규모가 큰 관급공사 입찰자 선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노동부는 기존 산재사고 건수를 합산, 전체 건설사의 평균 재해율과 비교해 ±2의 점수를 주는 규정에서 감점을 없애는 대신, 산재 은폐 건수에 대해 0~-2점 감점하는 규정으로 변경했다. 재해율을 재해자 수만을 기준으로 산정했을 때 산재 은폐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인 것.
사정이 이렇게 되자 산재사고 처리에서 새로운 형태가 최근 건설업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건설사가 적당한 피해로 진단하는 선에서 산재 처리를 한 뒤 피해 근로자와 추가 합의를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충북 지역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A씨는 탑 구조물에서 추락해 왼쪽 눈이 실명하고 요추 1, 2번이 골절하는 중상을 입었다. 당연히 장애등급을 받을 수 있는 큰 부상이었지만 실제 산재 청구 당시의 병원 진단은 전치 8주에 불과했다. A씨가 건설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진단과 치료를 받는 대신 건설사는 병원에서 축소된 진단서를 받아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보상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A씨와 건설사 측이 합의했다.
이 같은 현상은 A씨의 경우만이 아니다. 한 노무법인 관계자는 “최근 산재신고 접수건을 보면 대체로 피해자들의 병원 진단 수가 비슷하고 전치 10주를 넘지 않는다”며 “건설사 측이 지정한 병원에서 산재 노동자 치료를 담당하게 하면서 대형산재 신고를 피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 병원의 전직 산재담당자 역시 “건설사와 병원이 산재 사고를 축소 처리하는 과정에서 암묵적인 거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건설사들의 산재 처리방식의 변화는 결국 대형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피해자가 생겨 재해율 산출에 불이익이 가거나, 복잡한 피해자 부상 진단에 따른 산재 보고 기한을 넘기는 경우를 막기 위한 방편이 아니냐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다.
빠른 시간에 보상 근로자들도 선호
노동부가 개정한 산업재해발생률 및 산업재해발생 위반건수 산정 규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먼저 재해발생률의 주요한 산출기준인 환산재해자 수를 판단하는 데 사망자 수가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재해자 중 사망자에 대해선 부상재해자의 10배 가중치로 평가한다. 부상자가 1일 경우 사망자 수는 10으로 해 환산재해자 수를 산출하는 것. 또한 산업안전보건법 제10조 및 동법 시행규칙 제4조 제1항 규정에 따르면, 사업주는 ‘4일 이상의 요양을 요하는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자’가 발생했을 때 당해 산업재해가 발생한 날부터 한 달 이내에 산업재해조사표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결국 이 두가지 규정을 지키기 위해 큰 사고도 경미한 진단으로 산재 처리해 재해율 산출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 조건에서 구색을 맞추고, 진단과 산재처리 과정의 시간을 최소화해 신고 지연에 따른 불이익을 받지 않는 묘안을 짜낸 셈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현행 법규 아래서는 최대한 경미한 사고로 빠른 시간 안에 산재 처리하는 것이 피해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런 과정에서 보통 경상이냐 중상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인 전치 10주가 기준선으로 정해진 것 같다”며 병원 진단이 건설사에 유리한 쪽으로 작성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근로자 쪽도 마찬가지. 산재 사고를 심의하는 근로복지공단이 주로 병원 진단이 과다하게 부풀려진 사례에 대해 복잡한 관리감독 절차를 밟는다는 점에서, 빠른 시간 안에 보상을 바라는 일부 근로자 처지에선 오히려 건설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산재사고 신고 과정에서 접수된 병원 진단과 재해율 산정은 직접적 관련이 없다”며 최근 건설사들의 산재신고 행태와 법 규정의 관련성 여부를 부인했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사례들로 보면, 건설사들은 법 규정을 교묘히 넘나들며 근로자들의 피해 정도를 조작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