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9일 오후 서울 당산동 통합민주당사 개표상황실에서 개표방송을 보기 위해 재킷을 벗고 있는 손학규 대표(가운데). 다음 날 그는 차기 당 대표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권토중래(捲土重來) 손학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버티고 있던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 나선 손학규 대표는 박 의원을 상대로 맹추격전을 벌였지만 판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득표는 박 의원(3만4113표·득표율 48.43%)에 이은 2위(3만1530표·44.76%). 종로발(發)‘민주당 불꽃’을 ‘강북벨트’로 확산하겠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총선을 디딤돌로 ‘손학규계’의 당내 기반을 확고히 하려던 그의 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그동안 반성하고 또 변화하고 쇄신을 하고자 했습니다만, 아직 충분히 국민들께 저희의 변화 의지가 받아들여진 것 같지 않습니다.” 4월9일 개표를 지켜보던 중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잠긴 목소리로 소감을 밝히는 대목에선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 평당원으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할 것”이라며 ‘당 대표 포기’를 천명했다. ‘원외(院外)’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강호의 고수들과 호남 맹주들의 텃세도 넘어야 한다. “(손 대표가) 시베리아로 내몰렸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멀리 보면 다르다. 야당 대표와 차기 대선후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국회 등원이 필수였던 손 대표로선 ‘총선 책임론’이라는 소나기를 피하고 숨을 고른 뒤 ‘권토중래(捲土重來·힘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옴)’를 준비 중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공언한 개헌저지선(100석)에는 못 미쳤지만 정동영 후보의 대선 득표율(26.5%)을 총선에 단순 반영한 의석수(46석)와 비교하면 선전했다는 ‘체감지수’와 부산 강원 충청 제주 등에서 의원을 배출하며 ‘민주당=호남당’이란 등식을 불식시킨 전공(戰功), 격전지에 몸을 던져 희생한 도덕성 등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정동영
“당이 필요하다면 저를 활용해도 좋다, 이렇게 해서 출마했습니다마는 당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선 완패에 이어 총선에서도 큰 격차로 낙선한 정동영 후보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총선 성적표는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 4만7521표(54.41%)에 훨씬 뒤진 3만6251표(41.50%). 당초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서울 동작을에 전략 공천될 때만 해도 한나라당 이군현 후보를 누르고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상대가 정 의원으로 전격 교체되면서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고, 추격전을 벌이지 못한 채 끌려가다 약 13%포인트 차이로 낙선하며 정치적 역량까지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서울 남부벨트를 지키겠다던 공언(公言)도 공언(空言)이 됐다. 공천 과정에서 계파 의원들이 대거 탈락하거나 비례대표 후보에 들지 못한 것도 ‘우울한 미래’를 예고한다.
정 후보는 당분간 해외에 체류하며 재충전과 향후 거취를 모색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절치부심(切齒腐心) 후 기사회생(起死回生) 카드다.
인세이도(因勢利導) 김근태
재야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근태 의원도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의 ‘올드 레프트 vs 뉴라이트’ 선거 구도를 깨지 못하고 석패했다. 득표차는 1278표. 선거 막판에 불어닥친 ‘뉴타운 붐’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서울 강북벨트를 강타했고 김 의원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여기에 이목희 이인영 우원식 의원 등 계파 의원들도 대거 몰락해 총선 여진은 크다.
그의 처지에선 당분간 칩거하며 때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민주화의 상징’이던 그의 낙마가 민주당 정체성 논란에 어떤 기제(機制)로 작용할지에 따라 그의 쓰임새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도 진보냐 중도냐’ ‘선명 야당이냐 온건 야당이냐’는 민주당 차기 지도부의 이념 좌표에 따라 그의 몸값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손 대표를 정통 민주세력의 ‘적자(嫡子)’로 선뜻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그의 몸값을 높인다. 인세이도(因勢利導·상황에 따라 이익을 이끌어냄)의 묘가 필요한 시점이랄까.
통합민주당의 진로는
노무현계 의원들의 와해와 손학규 정동영 김근태 등 수장들의 잇따른 낙마로 ‘민주당의 구심점 공백’은 피할 수 없게 됐다. 7월9일 이전으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겨냥한 각 세력의 투쟁이 본격화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전장(戰場)은 당권, 전술은 노선 투쟁, 승부수는 손 대표의 ‘꽃놀이패’가 될 공산이 크다.‘당 대표 포기’를 밝혔지만 공천 과정에서 자파 후보를 대거 포진시킨 손 대표가 대리인이나 특정 진영을 밀 경우 역학구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상왕(上王) 정치’도 가능하다.
정동영계는 당분간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바닥 조직이 건재하고 반(反)손학규 진영 당권주자를 지지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다.
열린우리당 마지막 의장을 지내며 당 안팎에서 신망이 두터운 정세균 의원과 총선 지원유세에 ‘올인’한 강금실 공동선대위원장, 3선 중진 추미애 전 의원 등 중진그룹의 세 결집도 관심거리다.
박상천 대표 등 옛 민주당계는 지분유지를 위해서라도 박 대표가 직접 경선에 나서거나 박주선 당선자 등이 도전할 가능성이 크다. 박 당선자는 4월10일 “손학규 대표는 총선에서 최선을 다했다”며 손학규계를 향한 ‘친근 모드’로 전환했다. 여기에 강봉균 이시종 의원 등 중도 실용파의 ‘김한길 그룹’도 상당수 살아남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김효석 이낙연 의원 등과 ‘당선 뒤 민주당 복귀’를 선언한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결합할 경우 민주당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점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