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은 신발가게나 음식점 등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간다.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않았던 하향 취업을 하면서까지 이들이 영국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영국 한국대사관에 의하면 런던에는 총 2만3390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이중 시민권자는 632명에 불과하고 일반 체류자가 6492명, 유학생이 1만2881명이다.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는데, 상당수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한국에서 전문직에 근무하다 영국에 왔다고 한다. 이들은 진학 또는 취업 등을 통해 아예 영국에 눌러앉기를 바란다. 왜 이들은 한국에서의 ‘빵빵한’ 조건을 버리고 영국에 온 것일까?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굳이 영국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런던은 소문난 ‘미혼자 천국’
매일 매일이 똑같고 발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직장 생활에 지친 여성들은 5~6년 정도 경력이 쌓였을 때 유학을 결심한다. 이때가 아니면 자기 계발의 기회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 고된 업무에 지쳐 휴식하고 견문도 넓히는 단기 어학연수를 찾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영국으로 온 이들은 생계는 주말이나 저녁 때 음식점 아르바이트 등으로 해결하며 랭귀지 스쿨이나 대학원 또는 아예 전공을 바꿔 대학을 다시 다니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을 보낸다. 그런데 이 기간이 끝나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영국에 머물고자 한다. 이유는? 영국에서 ‘마음의 편안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외국계 회사의 과장으로 근무하다 영국 대학에 진학한 정미선(가명·33) 씨는 “한국에서는 연봉 인상과 승진에 급급해 정신없이 살았는데, 이곳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마음이 편하다. 경제적으로 쪼들려도 1년에 몇 주 정도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여행을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마음의 편안함은 결혼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데서도 나온다. 정 씨는 “명절만 되면 친척들은 결혼하지 않은 내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그런 눈치를 보지 않아 무척 편하다”고 했다. 런던은 영국에서도 미혼자 비율이 높기로 유명한 곳. 16세 이상의 결혼 가능기 사람들 중 51%가 미혼자다. 미혼자로 사는 것이 한국에서처럼 흉이 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나이나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다는 점도 한국 여성들이 영국을 선호하는 이유다. 직장을 구할 때 특별한 나이 제한이 없다. 눈이 작거나 코가 낮다는 등의 외모 콤플렉스도 전 세계인들이 어울려 사는 런던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특징 중 하나로 보여질 뿐이다. 케이블 방송 PD로 근무했던 배성희(가명·30) 씨는 “한국에서는 늘 다이어트를 생각하며 살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면서 “밋밋한 내 얼굴이 불만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동양인의 전형이라고 봐주므로 마음이 편하다”며 웃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들은 획일화된 한국 사회에 비해 개인 의견이 존중되는 영국 사회에서 창의성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자이너인 이지연 씨는 “한국의 큰 디자인 회사와 영국의 작은 디자인 에이전시 중 하나를 고르라면 후자를 택하겠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이곳에서는 내 창의력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드는 의문은 유럽 여러 도시 중에서 유독 런던으로 오는 한국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 스페인에서 1년간 산 적이 있는 배성희 씨는 “스페인은 아직 폐쇄성이 남아 있어 아시아인들을 구성원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장기 일반 체류자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독어를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도 독일 거주를 막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하향 취업 불가피, 영주권 따기도 힘들어
하지만 영국은 영어의 근원지인 데다 학생 신분으로 체류하면 법적으로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20시간, 방학에는 영국인들과 똑같은 40시간을 일할 수 있다. 더구나 런던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기 때문에 인종차별도 덜하다. 2005년 실시된 런던의 인종 조사를 보면, 영국 유색인종의 46%가 런던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파리와의 올림픽 유치전에서 승리하는 데도 이런 인종의 다양함이 한몫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런던에 사는 한국 여성이 모두 자유롭게 사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탈출에서 오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이후론 다르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하향 취업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류 사회에 도전하고자 하면 또 다른 종류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부딪히게 된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영국 영주권을 따기 원하지만 취업비자와 영주권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정책은 매우 엄격해,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한국의 외국계 회사에서 MD(상품기획자)로 일하던 박원경(가명·29) 씨는 “런던에서 살면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1~2년이 흘러간다”고 말했다. 또 그는 “영국에 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영국 남자를 찾아 결혼한 친구도 있다. 그렇게 해서 영국 땅에 눌러앉게 됐지만 결국 하는 일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민박집 운영이다. 이곳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한국을 떠나는 것은 영국이 꼭 좋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폐쇄성 때문이다. 하향 취업을 하면서라도 영국에서 살려고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은 한국 사회와 한국 여성의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