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7일 지난 40년간 베일에 가려 있던 한-일 협정문서의 일부가 공개되면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새로운 한-일 관계’를 위해 정부는 8월15일까지 나머지 한-일 협정문서를 모두 공개할 예정이기 때문에 이번 ‘과거사 폭풍’은 한동안 잊고 있던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협정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연 최봉태 변호사(42)를 만나 문서 공개의 의미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
-2002년 8월, 피해자 100명과 함께 한 정보공개 소송의 주역이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텐데.
“2004년은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피해자 문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월에는 국회에서 피해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고, 6월13일 행정법원에서 정보공개 승소 판결이 났다. 다시 한번 피해자 문제를 호소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느낌이다.”
-사회의 무관심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렇다. 이번 상황도 며칠 시끄럽다가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웃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이고 시급한 현안에 밀려 제 목소리를 못 냈다. 2003년 ‘진상조사특별법’ 청원운동을 하면서 극단적 수단으로 ‘국적포기 운동’까지 벌였던 사실을 떠올려달라. 피해자들 대부분은 아직도 이 땅에 자신들을 위한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정도다.”
-‘굴욕협상’ 혹은 ‘실패한 협상’을 한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일본 역시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뻔한 답을 반복해왔다.
“당연하게도 모든 책임은 우선 한국 정부에 있다. 보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진상 규명이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두 나라 정부가 65년에 보여준 야합에 가까운 협상 내용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일본 정부가 최대한 협조하는 모습으로 피해자 구제에 나서야 한다. 특히 가해자인 일본이 면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향후 일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향후 진행될 보상 절차가 결국 한국 정부의 책임인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가 돈을 준다 하더라도 사죄의 의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 없는 이에게서 위로금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때문에 ‘청구권 자금’이라는 표현에 반대하고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주장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책임을 미룰 수 없게 됐다. 조약을 맺을 때는 사죄의 뜻이 담겨야 하는데, 그 당시 한국이 못살았다고 능멸한 것 아닌가.”
-한-일 협정이 개정될 수 있을까. 그런 선례가 있는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60년에 체결된 독일과 프랑스 간의 보상조약은 81년 기업의 책임 해제가 추가된 ‘독-프랑스 이해증진 재단에 관한 출연협정’으로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두 나라 국민 사이에서 재협상에 대한 여론이 일어야 한다. 우리 역시 추가적인 금전에 급급해도 곤란하다.”
-북한과 일본 역시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제 일본은 남한과 맺은 65년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북한과의 수교 협상에서 청구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계속 일본이 남-북한의 약점(경제력과 분단)을 쥐고 ‘경제협력자금’ 방식을 고집한다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공(功)과 과(過)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공로자이지만 65년 한-일 협정을 통해서 역사를 팔아먹은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물론 그것을 강제한 국제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박 정권의 책임은 면책될 수 없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란 무엇인가.
“두 나라의 시민사회가 평화롭고 우애롭게 살자는 뜻이다. 결국 전쟁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 같아야 한다.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를 명예롭게 우대하는 일이 평화 인프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 최봉태 변호사는?
1962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남. 1989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92년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94년 일본 도쿄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소송을 무료로 돕는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들을 만나면서 삶의 일대 변화가 찾아왔다. 97년 귀국해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을 대구에서 창립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2001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일했고, 2002년에는 한-일 협정 외교문서 5권의 공개를 이끌어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보공개 소송의 대표 변호사를 맡아 역사의 물줄기를 돌렸다.
새해부터는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www.gangje.go.kr)사무국장(3급)으로 일하기 위해 상경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피해자들의 피해 사례 수집을 위해 앞으로 3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2002년 8월, 피해자 100명과 함께 한 정보공개 소송의 주역이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텐데.
“2004년은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 피해자 문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월에는 국회에서 피해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고, 6월13일 행정법원에서 정보공개 승소 판결이 났다. 다시 한번 피해자 문제를 호소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느낌이다.”
-사회의 무관심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렇다. 이번 상황도 며칠 시끄럽다가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웃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나라가 분단 상황이고 시급한 현안에 밀려 제 목소리를 못 냈다. 2003년 ‘진상조사특별법’ 청원운동을 하면서 극단적 수단으로 ‘국적포기 운동’까지 벌였던 사실을 떠올려달라. 피해자들 대부분은 아직도 이 땅에 자신들을 위한 정부가 탄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정도다.”
-‘굴욕협상’ 혹은 ‘실패한 협상’을 한 한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일본 역시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뻔한 답을 반복해왔다.
“당연하게도 모든 책임은 우선 한국 정부에 있다. 보상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진상 규명이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두 나라 정부가 65년에 보여준 야합에 가까운 협상 내용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책임을 지고 일본 정부가 최대한 협조하는 모습으로 피해자 구제에 나서야 한다. 특히 가해자인 일본이 면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향후 일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향후 진행될 보상 절차가 결국 한국 정부의 책임인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가 돈을 준다 하더라도 사죄의 의미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 없는 이에게서 위로금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때문에 ‘청구권 자금’이라는 표현에 반대하고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주장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책임을 미룰 수 없게 됐다. 조약을 맺을 때는 사죄의 뜻이 담겨야 하는데, 그 당시 한국이 못살았다고 능멸한 것 아닌가.”
-한-일 협정이 개정될 수 있을까. 그런 선례가 있는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60년에 체결된 독일과 프랑스 간의 보상조약은 81년 기업의 책임 해제가 추가된 ‘독-프랑스 이해증진 재단에 관한 출연협정’으로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두 나라 국민 사이에서 재협상에 대한 여론이 일어야 한다. 우리 역시 추가적인 금전에 급급해도 곤란하다.”
-북한과 일본 역시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제 일본은 남한과 맺은 65년 방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북한과의 수교 협상에서 청구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계속 일본이 남-북한의 약점(경제력과 분단)을 쥐고 ‘경제협력자금’ 방식을 고집한다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엇갈린다.
“공(功)과 과(過)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공로자이지만 65년 한-일 협정을 통해서 역사를 팔아먹은 사실이 이제 명백해졌다. 물론 그것을 강제한 국제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박 정권의 책임은 면책될 수 없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란 무엇인가.
“두 나라의 시민사회가 평화롭고 우애롭게 살자는 뜻이다. 결국 전쟁을 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 피해자를 보는 시각이 같아야 한다. 불행한 시대의 희생자를 명예롭게 우대하는 일이 평화 인프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 최봉태 변호사는?
1962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남. 1989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92년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94년 일본 도쿄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 피해자들의 소송을 무료로 돕는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들을 만나면서 삶의 일대 변화가 찾아왔다. 97년 귀국해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을 대구에서 창립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2001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일했고, 2002년에는 한-일 협정 외교문서 5권의 공개를 이끌어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보공개 소송의 대표 변호사를 맡아 역사의 물줄기를 돌렸다.
새해부터는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www.gangje.go.kr)사무국장(3급)으로 일하기 위해 상경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 피해자들의 피해 사례 수집을 위해 앞으로 3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