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적어도 인사에서만큼은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할 때 노 대통령은 국장급 인사만 자신이 직접 챙기고 과장 인사는 국장들이 알아서 인사하도록 했다. 다만 국장들 사이에서 한 과장을 놓고 서로 데려가겠다고 할 때에 한해 조정했다고 한다. 이는 김정태 국민은행장(당시)의 인사 스타일을 떠올리게 한다. 김 행장은 과거 한신증권 사장 시절 본부장 인사만 자신이 챙기고 본부장들에게 ‘당신들이 알아서 부하 직원을 쓰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당연히 본부장들은 능력 있는 사람을 골라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김 행장이 성공한 금융인이 되는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2003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고위 관료가 사석에서 한 얘기다. 예상대로 노 대통령은 인사 시스템을 혁신했다. 대통령 비서실에 인사보좌관(현재는 인사수석)을 두어 인사 추천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과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인사 추천과 검증을 함께하면서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기 때문에 검증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극복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서울대 박세일 교수(현 한나라당 의원)팀이 쓴 ‘대통령의 성공 조건’에서 상당 부분 차용한 아이디어였다. 전직 인사비서관을 지냈던 K씨의 설명이다.
“예전엔 (인사 추천과 검증을) 민정수석이 독식하면서 민정수석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그래서 문제가 많았다. 참여정부의 인사수석은 많은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전부다. 후보자는 그룹 토의를 통해 결정하기 때문에 투명하다. 외국에도 전례가 없는 제도다.”
전권 행사·비선에 의한 개입 시비는 없어
대통령 비서실장을 의장으로 정책실장, 시민사회, 민정, 홍보, 인사수석 등으로 인사추천위도 구성했다. 당연히 비서실장이나 민정수석, 인사수석 등 어느 한 사람이 인사에 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 또 과거 정부에서처럼 ‘비선(秘線)’에 의한 인사도 없어졌다. 참여정부 초기 ‘코드 인사’ 논란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정권 실세에 의한 인사 개입 시비는 없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인사 덕분이다.
노 대통령도 인사 시스템 정착에 적극 협조했다. 노 대통령은 장관급 이상 요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기준 등 지침을 내린다. 그러나 그뿐이다. 대부분 인사추천위원회의 결론을 존중했다. 물론 인사를 놓고 노 대통령이 욕심을 부릴 때도 있다. 핵심부서 인사일 경우 특히 그렇다고 한다.
이럴 때 노 대통령은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성호 부패방지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발탁할 때 고사하는 그들을 청와대에 불렀다. 주미대사로 내정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도 몇 차례 직간접 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인사를 책임지고 있는 정찬용 전 인사수석과 혼선도 빚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수석이 노 대통령에게 A씨를 천거했을 때의 일이다. 노 대통령은 정 전 수석의 보고에 “알았다”고 답변했다. 정 전 수석은 노 대통령의 멘트를 수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언론에 이를 공개했다. 그 직후 노 대통령이 “왜 언론에 발표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정 전 수석이 “알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고 하자 “재가한 게 아니라 알았다고 한 건데…. 여하튼 알았다”고 물러섰다. 뒤에 정 전 수석이 알아보니 그 인사 후보군에 노 대통령이 아는 사람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인사와 관련한 잡음이 일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인사 시스템 혁신에 힘을 기울였던 참여정부이기에 더욱 그렇다. 취임 3일 만에 물러난 이기준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인사에서는 부실 검증으로 인사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제도보다는 ‘인치’에 무게 중심 옮겨가는 시기
이에 대해 여권 일각에서는 “이미 예고됐던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시스템 인사를 위해 인사수석을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막상 이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정찬용 전 인사수석 혼자 뛰어다니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여권에서는 ‘이기준 파문’ 이후 대통령 국정상황실장에서 인사제도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박남춘 비서관의 역할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박 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총무과장으로 노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다면평가 등을 정착시킨 주인공.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이기준 파문’ 이후 박남춘 비서관을 직접 불러 저녁을 함께하면서 인사제도 보완을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인재 풀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1월20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 민정수석으로 복귀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1월7일 물러난 이기준 교육부총리 후임 인선을 1월21일 현재까지 못하고 있다. 이날 김효석 민주당 의원에게 교육부총리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민주당이 강력 반발하기도 했다.
파문은 당사자인 김 의원이 이날 노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하면서 고사의 뜻을 밝힘으로써 가라앉았다. 그러나 교육부총리 인선은 더 꼬이게 됐고, 뒷말은 무성할 수밖에 없게 됐다. 여당 인사들을 제쳐놓고 ‘남의 당의 대들보’를 빼내오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처음 여성 교육부총리를 생각하고 후보자를 물색했으나 적임자가 없어 인간적으로나 정책적 차원에서나 신뢰하고 있는 김효석 의원에게 교육부총리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일부 산하기관 인사에서는 지난해 열린우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사들을 ‘배려’한 ‘보은 인사’ 논란도 있었다.
이에 대해 과거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집권 3년차 증후군’으로 설명한다. ‘집권 3년차 증후군’이란 집권 2년이 지나면서 조직이 느슨해지며 이완되는 현상을 말한다. YS정권 시절 청와대 부속실에서 일한 한 인사는 “이기준 파문의 본질은 ‘집권 3년차 증후군’이 몰고 온 매너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 보고서를 묵살하거나, ‘부적격 요소가 있더라도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안일함’과 매너리즘이 ‘집권 3년차 증후군’의 대표적 현상이라는 것.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정치학자는 ‘이기준 파문’을 참여정부의 도덕적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학자는 “인사 시스템에 관한 한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다”면서 “다만 부적격 요소가 있어도 도덕적 우월성이 있는 참여정부가 불러다 쓰면 별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 화를 불렀다”고 분석했다.
1기 비서실 조직을 설계하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박세일팀’ 관계자는 “정권 내 인적 권력관계가 시스템의 핵심 개념보다 우위에 섰던 것이 문제”라는 진단을 내놨다. 김대중(DJ)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N씨의 지적도 비슷하다. 그는 DJ 정권의 예를 들며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 제도보다 인치(人治)에 무게 중심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부 출범 초기 노 대통령은 두 가지 대국민 약속을 했다. 첫 번째는 “정해진 방향에서 지속적 개혁을 추진할 부처는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게 좋겠다”는 것. 노 대통령은 해당 부처로 교육부총리를 꼽은 바 있다. 그러나 교육부총리는 집권 3년을 앞두고 네 번째 ‘주자’를 골라야 할 딱한 형편으로 전락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참여정부는) 국면전환용 인사는 하지 않겠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최근 말을 바꿨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의 교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1월4일 국무회의에서 “부득이 희생양을 두고 국민정서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교체 배경을 설명했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을 박홍수 장관으로 교체한 이유도 정치적 고려의 성격이 짙다. 참여정부 2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13차례나 땜질 개각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사원칙과 시스템’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인사 반복 움직임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인사가 반복되는 현상은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일부 비서관들이 핵심 비서관직을 돌아가며 맡는 데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이 보좌관 출신인 천호선 의전비서관은 국정상황실장에 발탁했다. 천 비서관은 참여기획비서관, 정무기획비서관 등 청와대 내 다른 요직도 거쳤다.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총무과장을 지냈던 박남춘 국정상황실장은 인사제도비서관에, 노 대통령의 고교 후배인 권찬호 제도개선비서관은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맡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은 이기준 파동 뒤 청와대 인사 시스템의 보완을 지시했다. 노 대통령이 지시한 인사 개선책은 크게 세 가지다. 주요 공직자의 경우 재산문제 검증을 위한 ‘사전동의서’를 받거나 국회 상임위에서 인사청문을 받는 방안, 또는 미니 청문회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한다. 박세일팀의 한 관계자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며 “인치가 아닌 시스템에 의한 통치일 때만 원칙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줄곧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문민정부의 인사는 망사(亡事)로 흘렀다. 시스템이 아닌 ‘현철’이라는 무소불위의 비선이 등장해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반환점을 돌기 직전의 참여정부가 타산지석으로 삼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례다.
2003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고위 관료가 사석에서 한 얘기다. 예상대로 노 대통령은 인사 시스템을 혁신했다. 대통령 비서실에 인사보좌관(현재는 인사수석)을 두어 인사 추천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과거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인사 추천과 검증을 함께하면서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기 때문에 검증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극복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서울대 박세일 교수(현 한나라당 의원)팀이 쓴 ‘대통령의 성공 조건’에서 상당 부분 차용한 아이디어였다. 전직 인사비서관을 지냈던 K씨의 설명이다.
“예전엔 (인사 추천과 검증을) 민정수석이 독식하면서 민정수석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그래서 문제가 많았다. 참여정부의 인사수석은 많은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전부다. 후보자는 그룹 토의를 통해 결정하기 때문에 투명하다. 외국에도 전례가 없는 제도다.”
전권 행사·비선에 의한 개입 시비는 없어
대통령 비서실장을 의장으로 정책실장, 시민사회, 민정, 홍보, 인사수석 등으로 인사추천위도 구성했다. 당연히 비서실장이나 민정수석, 인사수석 등 어느 한 사람이 인사에 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 또 과거 정부에서처럼 ‘비선(秘線)’에 의한 인사도 없어졌다. 참여정부 초기 ‘코드 인사’ 논란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정권 실세에 의한 인사 개입 시비는 없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인사 덕분이다.
노 대통령도 인사 시스템 정착에 적극 협조했다. 노 대통령은 장관급 이상 요직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기준 등 지침을 내린다. 그러나 그뿐이다. 대부분 인사추천위원회의 결론을 존중했다. 물론 인사를 놓고 노 대통령이 욕심을 부릴 때도 있다. 핵심부서 인사일 경우 특히 그렇다고 한다.
이럴 때 노 대통령은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성호 부패방지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발탁할 때 고사하는 그들을 청와대에 불렀다. 주미대사로 내정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도 몇 차례 직간접 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완기 인사수석(왼쪽)과 정찬용 전 인사수석.
그러나 최근 들어 인사와 관련한 잡음이 일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인사 시스템 혁신에 힘을 기울였던 참여정부이기에 더욱 그렇다. 취임 3일 만에 물러난 이기준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인사에서는 부실 검증으로 인사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을 받았다.
제도보다는 ‘인치’에 무게 중심 옮겨가는 시기
이에 대해 여권 일각에서는 “이미 예고됐던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시스템 인사를 위해 인사수석을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막상 이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정찬용 전 인사수석 혼자 뛰어다니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여권에서는 ‘이기준 파문’ 이후 대통령 국정상황실장에서 인사제도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박남춘 비서관의 역할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박 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총무과장으로 노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다면평가 등을 정착시킨 주인공.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이기준 파문’ 이후 박남춘 비서관을 직접 불러 저녁을 함께하면서 인사제도 보완을 지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의 인재 풀이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1월20일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이 민정수석으로 복귀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1월7일 물러난 이기준 교육부총리 후임 인선을 1월21일 현재까지 못하고 있다. 이날 김효석 민주당 의원에게 교육부총리 자리를 제안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민주당이 강력 반발하기도 했다.
파문은 당사자인 김 의원이 이날 노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하면서 고사의 뜻을 밝힘으로써 가라앉았다. 그러나 교육부총리 인선은 더 꼬이게 됐고, 뒷말은 무성할 수밖에 없게 됐다. 여당 인사들을 제쳐놓고 ‘남의 당의 대들보’를 빼내오려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처음 여성 교육부총리를 생각하고 후보자를 물색했으나 적임자가 없어 인간적으로나 정책적 차원에서나 신뢰하고 있는 김효석 의원에게 교육부총리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일부 산하기관 인사에서는 지난해 열린우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사들을 ‘배려’한 ‘보은 인사’ 논란도 있었다.
이에 대해 과거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집권 3년차 증후군’으로 설명한다. ‘집권 3년차 증후군’이란 집권 2년이 지나면서 조직이 느슨해지며 이완되는 현상을 말한다. YS정권 시절 청와대 부속실에서 일한 한 인사는 “이기준 파문의 본질은 ‘집권 3년차 증후군’이 몰고 온 매너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 보고서를 묵살하거나, ‘부적격 요소가 있더라도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의 ‘안일함’과 매너리즘이 ‘집권 3년차 증후군’의 대표적 현상이라는 것.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정치학자는 ‘이기준 파문’을 참여정부의 도덕적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학자는 “인사 시스템에 관한 한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다”면서 “다만 부적격 요소가 있어도 도덕적 우월성이 있는 참여정부가 불러다 쓰면 별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 화를 불렀다”고 분석했다.
1기 비서실 조직을 설계하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박세일팀’ 관계자는 “정권 내 인적 권력관계가 시스템의 핵심 개념보다 우위에 섰던 것이 문제”라는 진단을 내놨다. 김대중(DJ)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N씨의 지적도 비슷하다. 그는 DJ 정권의 예를 들며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 제도보다 인치(人治)에 무게 중심이 실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부 출범 초기 노 대통령은 두 가지 대국민 약속을 했다. 첫 번째는 “정해진 방향에서 지속적 개혁을 추진할 부처는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게 좋겠다”는 것. 노 대통령은 해당 부처로 교육부총리를 꼽은 바 있다. 그러나 교육부총리는 집권 3년을 앞두고 네 번째 ‘주자’를 골라야 할 딱한 형편으로 전락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참여정부는) 국면전환용 인사는 하지 않겠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최근 말을 바꿨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의 교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1월4일 국무회의에서 “부득이 희생양을 두고 국민정서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교체 배경을 설명했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을 박홍수 장관으로 교체한 이유도 정치적 고려의 성격이 짙다. 참여정부 2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13차례나 땜질 개각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사원칙과 시스템’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인사 반복 움직임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인사가 반복되는 현상은 노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일부 비서관들이 핵심 비서관직을 돌아가며 맡는 데서도 확인된다. 노 대통령이 보좌관 출신인 천호선 의전비서관은 국정상황실장에 발탁했다. 천 비서관은 참여기획비서관, 정무기획비서관 등 청와대 내 다른 요직도 거쳤다. 노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총무과장을 지냈던 박남춘 국정상황실장은 인사제도비서관에, 노 대통령의 고교 후배인 권찬호 제도개선비서관은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맡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은 이기준 파동 뒤 청와대 인사 시스템의 보완을 지시했다. 노 대통령이 지시한 인사 개선책은 크게 세 가지다. 주요 공직자의 경우 재산문제 검증을 위한 ‘사전동의서’를 받거나 국회 상임위에서 인사청문을 받는 방안, 또는 미니 청문회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한다. 박세일팀의 한 관계자는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며 “인치가 아닌 시스템에 의한 통치일 때만 원칙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줄곧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문민정부의 인사는 망사(亡事)로 흘렀다. 시스템이 아닌 ‘현철’이라는 무소불위의 비선이 등장해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반환점을 돌기 직전의 참여정부가 타산지석으로 삼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