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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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황장엽·이연길씨 95년 첫 만남 … 흉금 없는 대화·편지로 신뢰 쌓아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1-06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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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1997년 1월30일 일본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 마중나온 조총련 관계자들이 준 꽃다발을 받아들고 있다.

    황장엽 비서가 망명을 결행한 배경에는 황 비서와 이연길 회장 사이의 인간적인 신뢰 관계가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 가까워졌을까. 한 사람은 일생을 ‘반공투사’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난 50년간 북한 체제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해온 북한 내 대표적인 지식인이어서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성실과 정직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접근 외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각각의 지식과 지혜, 열정, 그리고 사소한 마음 씀씀이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던져 만난 덕택에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단단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것.

    미국의 선교 단체 움직여 의약품 마련, 황 비서 통해 북에 제공

    1952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 회장은 1965년부터 78년까지 일본 기술을 도입해 자동문을 생산하는 동원기계상사를 운영했고, 82년까지는 접이식 칸막이벽을 제작하는 동원상사를 경영했다. 83년 고향인 원산 명예시장에 위촉되고, 이어 고향 출신 2세를 위해 원산장학회를 설립했다. 비교적 ‘여유 있는 황혼’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92년 한-중 수교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필생(畢生)의 사업’인 북한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94년 장원흥업을 세워 ‘대표 이연길’이라는 명함을 들고 중국을 드나들다 조선족 사업가 A씨를 통해 당시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 여광무역 총사장 김덕홍씨를 만났기 때문.



    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이연길 회장이 사전에 입수했던 황 비서의 일본 체류 일정표.

    김씨와 대화를 나눠본 이 회장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무역회사 사장이라는 사람이 무역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김씨와 인간적인 접촉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회장은 마침내 “나는 한국에서 북한민주화협의회 회장을 하는 사람”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김씨도 “나도 김정일 체제에 염증을 느낀다. 북한은 민주화되어야 한다”며 호응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부터 두 사람은 의기투합, 북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폴리(이연길)’와 ‘폴김(김덕홍)’으로 부르기로 했다. 폴김은 이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서울에 있는 폴리에게 전화나 팩스로 호소했고, 그때마다 폴리는 주저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날아가 김씨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김씨가 개인적으로 감동한 것은 당연지사.

    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황장엽 비서가 한국영사부로 가는 택시를 탔던 주중 북한대사관 정문.

    이 회장이 95년 3월 황 비서를 베이징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김씨를 통해서였다. 김씨는 황 비서를 평소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 후 김씨는 황 비서가 중국에 나올 때마다 이 회장에게 이를 알려줬고, 이 회장은 곧바로 중국에 날아가 황 비서와 흉금을 터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나중에는 북한 민주화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도 이뤄졌다. 황 비서와 이 회장은 김씨의 사무실이나, 황 비서를 존경하는 조선족 사업가 B씨 사무실에서 주로 만났다.

    얼마 후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장문의 메모를 건네주기도 했다. 황 비서가 대화 시간이 짧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메모를 보면 철학자인 황 비서의 관심사는 ‘평화’임을 알 수 있었다. 황 비서는 북한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꼼꼼히 메모해두었다가 이 회장에게 건네준 것.

    카터 재방북 불발되자 황 비서 미국 방문 추진

    이 회장은 이 메모를 읽어보고 밤새 화답의 글을 썼다. 이 회장은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백성을 사랑하고 민중을 구제하는 학문을 하고자 하는 현인(황장엽 비서)의 풍모에 삼가 존경의 노래를 올린다’는 내용의 한시를 지어 황 비서의 열의를 칭송했다(사진 참조). 해방 전 이미 상당한 경지의 한학(漢學)을 수학한 황 비서는 한눈에 이 회장의 뜻을 알아보았다.

    이 무렵 베이징에 나와 있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들이 이 회장에게 접근해왔다. 그가 황장엽 비서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북한 민주화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황 비서가 알려준 북한 내부 첩보를 적어 이들에게 넘겨주었다.

    96년 말 어느 날, 황 비서는 이 회장에게 재미교포 백영중씨가 쓴 메모를 보여주며 돈을 받아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황 비서의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이때 황 비서가 건네준 메모는 앞 기사에서 밝혔듯 황 비서 망명을 성공시키는 결정적인 소재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김덕홍씨도 개인적인 부탁을 해왔다. 91년 12월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북 정주에 살고 있는 누이동생에게 주고 갔다는 수표를 그린 그림을 갖고 와, “만약 이 수표 원본을 갖고 나오면 한국에 가져가 달러로 바꿔다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던 것.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단호히 “그 일은 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돈 문제가 끼어들면 두 사람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황장엽 비서가 세계 평화와 북한 민주화에 대한 생각을 적어 이 회장에게 건네준 메모.

    대신 이 회장은 다른 사안으로 황 비서를 돕기로 했다. 이 회장은 미국에 있는 선교 단체를 움직여 컨테이너 2대 분량의 의약품을 마련해 황 비서를 통해 북한에 제공했다. 이 회장은 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다시 방문해 94년 10월 제네바합의(94년 10월) 이후 경색돼 있던 북미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해주면 황 비서가 김정일 위원장의 신임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 이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 무렵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따른 후속 회담을 거듭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것저것 따지고 나오는 바람에 북한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 회장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카드로 카터·김정일 회담을 생각해낸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카터는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이 공군기를 동원해 북한 영변 등지에 있는 핵시설을 폭격하는 작전계획 5026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북한 방문을 자처해 사태를 한순간에 반전시킨 주인공. 클린턴 정부는 카터의 방북을 지켜본 뒤 공습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카터를 만난 김일성 주석은 미국과 대화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망명 결심때까지 지성으로 도와 … “진짜 공작은 성실·정직으로”

    이후 미국은 북한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일성이 사망했으나(94년 7월10일), ‘숨통이 트인’ 미-북 대화는 계속 이어져 그해 10월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제네바합의가 나오게 되었다. 덕분에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사망, 93년부터 계속돼 300여만명의 아사자를 낳은 대기근,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기사회생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김정일 위원장은 카터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회장은 사람을 넣어 카터재단 측에 “제네바합의 이후 다시 경색돼 있는 미-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카터씨가 다시 북한을 방문해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그러나 카터재단은 단호히 “노”라는 대답을 보내왔다.

    이 회장은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그렇다면 황 비서가 카터재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해 미국 측에 김정일의 의사를 전달하는 특사 구실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카터재단에 황 비서를 미국으로 초청해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황 비서가 망명하기 한 달여 전인 96년 말과 97년 초 사이 이뤄진 논의였다.

    北 체제 전복 ‘의기투합’1년 뒤 망명 거사로 ‘결실’

    이연길 회장이 황장엽 비서에게 보냈던 한시와 편지.

    당시 언론도 이런 사실을 포착했다. 97년 1월6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이 ‘조만간 황 비서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할 것 같은데, 미국 방문은 카터 센터의 초청으로 이뤄질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황 비서의 일본 방문은 성사되었으나(이 방문을 끝낸 뒤 황 비서는 망명했다), 미국 방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황 비서가 망명을 결심할 때까지 이 회장은 지성으로 황 비서를 도우려 했다. 이러한 배려가 신뢰라고 하는 ‘거대한 그물’을 낳았다. 이 회장은 “진짜 공작은 성실과 정직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을 잡지 않고 몸만 잡는 공작은 성공하기 힘들다. 우리 국정원도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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