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20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 슈뢰더 총리는 함부르크 공항에까지 나가 푸틴 대통령을 직접 영접했다. 그외에도 극진한 의전으로 푸틴 대통령을 대접했다. 많은 우호적인 언사가 오갔으며, 두 나라 청소년의 교류 강화라든지 해양보호에 관한 조약이라든지 하는 실무적인 일이 순조롭게 처리됐다. 이 기간 슈뢰더는 우크라이나나 체첸 문제 등 푸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말은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의 이번 독일 방문을 통해 세계는 독일과 러시아가 얼마나 깊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다른 한편 2005년 2월 말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예정돼 있다. 이때도 물론 두 나라 정상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를 추켜세우는 언사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 무엇을 논의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회담 장소조차 미국 측에서는 하이델베르크 혹은 로텐부르크처럼 경관이 수려한 곳을 원하는 데 반해, 독일은 옛 동독 지역의 한 도시를 점찍어놓았다. 정상회담 실무 관계자들은 벌써부터 독-미 간 어려운 협상을 예상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독일 정부는 부시의 방문이 독일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굳이 강조한다.
독일의 외교 관계가 변하고 있다. 러시아 및 동유럽에 대한 호감이 날로 늘어나는 반면, 미국 쪽으로는 경색 국면이다. 한때 ‘원수의 나라’였던 러시아에 대해 슈뢰더는 “우리의 동반자”라고 불렀다. 아데나워 서독 초대 총리 이래로 역대 모든 총리들이 “우리는 친구”라고 불렀던 미국에 대해서는 다소 정감 없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동맹’이란 호칭이 새로 붙여졌다. 수십년간 관행으로 여겨져왔던 외교 관계의 무게 중심이 조용히 바뀌고 있는 것이다.
‘원수’ 러시아가 ‘우리의 동반자’
물론 슈뢰더 총리가 공식적으로 하는 말만 들으면 대미 관계에서 특별히 이상한 조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교 실무 선으로 들어가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독일에 머무는 미국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현재 두 나라 관계가 ‘무덤덤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독일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마저도 “독-미 관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일례로 2004년 12월 초 독일 외무부 차관 클라우스 샤리옷이 미 펜타곤에서 미 국무차관 더글러스 페이스를 만나 곤혹을 치른 일이 있었다. 페이스는 독일의 인권단체가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을 독일 연방 검찰청에 고발한 일, 독일이 이라크 문제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점 등을 들며 샤리옷을 질책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독일이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기 위해 애쓰는 일을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많은 외교전문가들은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 확보에 미국이 장애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의 러시아 사랑은 각별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우선 슈뢰더와 푸틴은 독일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말 그대로 단독 회담이 가능한 상대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서민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슈뢰더는 푸틴에 대해 “흠잡을 데 없는 민주주의자”라고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푸틴은 슈뢰더 부부가 러시아 어린이를 입양하고자 할 때 중재자 구실을 했고, 독일은행이 러시아 석유회사 인수에 나섰을 때도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친밀한 정치 지도자를 둔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고 증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반면 슈뢰더는 부시에게 처음부터 불편한 느낌을 가졌다. 슈뢰더에게 워싱턴의 위압적인 분위기는 언제나 불쾌한 것이었다. 부시 역시 슈뢰더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슈뢰더가 미국의 이라크 정책 문제를 2002년 총선의 주제로 끌어들이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어겼다는 것이다. 실제 슈뢰더는 2002년 총선 때 이라크전쟁에 대해 반대를 선언했고, 이것이 슈뢰더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슈뢰더 정부의 현 외교 정책은 한편으로 독일 국민 다수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반미, 반부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실 지난 총선에서 사민당-녹색당 연합의 승리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았는데, 선거 막판에 이라크 문제와 관련해 친미와 반미 구도가 벌어지면서 대역전이 펼쳐졌다.
이 같은 독일 외교 정책의 변화는 국익에도 부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엄청난 잠재 가능성을 지닌 나라이며, 향후 20년 뒤 독일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일은 일단 러시아를 잡으면 동유럽권으로의 활동 범위를 더욱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사 슈뢰더 총리가 미국을 다소 쌀쌀하게 대한다 한들, 독일과 미국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아니면 원수지간이 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따라서 슈뢰더의 중도 외교 정책은 어찌 보면 대미 관계에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또 독일이 국제무대에서 더욱 넓은 활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묘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익을 이유로 진정한 우방 국가를 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슈뢰더 정부가 러시아를 동반자라 부르면서 매우 호의적으로 대하는 태도에는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에 대한 공통 견제라는 목적이 들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 관계는 깨지기 쉽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실한 우호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도 노선 우려와 비판 목소리
반면 역사적으로 독일은 미국이 독일과의 동맹 관계를 도덕적인 의무로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덕분에 많은 이득을 봐왔다. 일례로 60년대 말 빌리 브란트가 과감한 동방정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은 우려의 눈길 속에서도 그를 인정해주었다. 브란트는 일찌감치 자신이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이유를 워싱턴에 가서 설득했는데, 미국은 이러한 독일의 행보가 비록 당시 미국의 이해에 부합되지 않을지라도 가로막지 않았던 것이다.
슈뢰더 정부의 외교 정책은 현재 중도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독일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러한 행보가 과거 더할 나위 없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미국에는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 결과 독일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국제 질서 속에서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작은 국익을 내세우다 혹 혈맹을 잃는 것은 아닌지.
다른 한편 2005년 2월 말 부시 미국 대통령의 독일 방문이 예정돼 있다. 이때도 물론 두 나라 정상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를 추켜세우는 언사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 무엇을 논의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회담 장소조차 미국 측에서는 하이델베르크 혹은 로텐부르크처럼 경관이 수려한 곳을 원하는 데 반해, 독일은 옛 동독 지역의 한 도시를 점찍어놓았다. 정상회담 실무 관계자들은 벌써부터 독-미 간 어려운 협상을 예상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독일 정부는 부시의 방문이 독일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굳이 강조한다.
독일의 외교 관계가 변하고 있다. 러시아 및 동유럽에 대한 호감이 날로 늘어나는 반면, 미국 쪽으로는 경색 국면이다. 한때 ‘원수의 나라’였던 러시아에 대해 슈뢰더는 “우리의 동반자”라고 불렀다. 아데나워 서독 초대 총리 이래로 역대 모든 총리들이 “우리는 친구”라고 불렀던 미국에 대해서는 다소 정감 없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동맹’이란 호칭이 새로 붙여졌다. 수십년간 관행으로 여겨져왔던 외교 관계의 무게 중심이 조용히 바뀌고 있는 것이다.
‘원수’ 러시아가 ‘우리의 동반자’
물론 슈뢰더 총리가 공식적으로 하는 말만 들으면 대미 관계에서 특별히 이상한 조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교 실무 선으로 들어가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독일에 머무는 미국 외교관들은 한결같이 현재 두 나라 관계가 ‘무덤덤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독일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마저도 “독-미 관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일례로 2004년 12월 초 독일 외무부 차관 클라우스 샤리옷이 미 펜타곤에서 미 국무차관 더글러스 페이스를 만나 곤혹을 치른 일이 있었다. 페이스는 독일의 인권단체가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을 독일 연방 검찰청에 고발한 일, 독일이 이라크 문제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점 등을 들며 샤리옷을 질책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독일이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를 얻기 위해 애쓰는 일을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많은 외교전문가들은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 확보에 미국이 장애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슈뢰더 총리의 러시아 사랑은 각별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우선 슈뢰더와 푸틴은 독일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말 그대로 단독 회담이 가능한 상대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서민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슈뢰더는 푸틴에 대해 “흠잡을 데 없는 민주주의자”라고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푸틴은 슈뢰더 부부가 러시아 어린이를 입양하고자 할 때 중재자 구실을 했고, 독일은행이 러시아 석유회사 인수에 나섰을 때도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친밀한 정치 지도자를 둔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깊어지고 증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반면 슈뢰더는 부시에게 처음부터 불편한 느낌을 가졌다. 슈뢰더에게 워싱턴의 위압적인 분위기는 언제나 불쾌한 것이었다. 부시 역시 슈뢰더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 슈뢰더가 미국의 이라크 정책 문제를 2002년 총선의 주제로 끌어들이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어겼다는 것이다. 실제 슈뢰더는 2002년 총선 때 이라크전쟁에 대해 반대를 선언했고, 이것이 슈뢰더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슈뢰더 정부의 현 외교 정책은 한편으로 독일 국민 다수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반미, 반부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실 지난 총선에서 사민당-녹색당 연합의 승리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았는데, 선거 막판에 이라크 문제와 관련해 친미와 반미 구도가 벌어지면서 대역전이 펼쳐졌다.
이 같은 독일 외교 정책의 변화는 국익에도 부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엄청난 잠재 가능성을 지닌 나라이며, 향후 20년 뒤 독일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일은 일단 러시아를 잡으면 동유럽권으로의 활동 범위를 더욱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설사 슈뢰더 총리가 미국을 다소 쌀쌀하게 대한다 한들, 독일과 미국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아니면 원수지간이 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따라서 슈뢰더의 중도 외교 정책은 어찌 보면 대미 관계에서 선택의 폭을 넓히고, 또 독일이 국제무대에서 더욱 넓은 활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묘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익을 이유로 진정한 우방 국가를 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슈뢰더 정부가 러시아를 동반자라 부르면서 매우 호의적으로 대하는 태도에는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 초강대국에 대한 공통 견제라는 목적이 들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 관계는 깨지기 쉽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실한 우호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도 노선 우려와 비판 목소리
반면 역사적으로 독일은 미국이 독일과의 동맹 관계를 도덕적인 의무로까지 중요하게 생각한 덕분에 많은 이득을 봐왔다. 일례로 60년대 말 빌리 브란트가 과감한 동방정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은 우려의 눈길 속에서도 그를 인정해주었다. 브란트는 일찌감치 자신이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이유를 워싱턴에 가서 설득했는데, 미국은 이러한 독일의 행보가 비록 당시 미국의 이해에 부합되지 않을지라도 가로막지 않았던 것이다.
슈뢰더 정부의 외교 정책은 현재 중도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독일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러한 행보가 과거 더할 나위 없이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미국에는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 결과 독일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국제 질서 속에서는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작은 국익을 내세우다 혹 혈맹을 잃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