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정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정찬용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자 (왼쪽부터)
“경무관(8명)만이라도 인사를 하겠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여권 핵심부는 이 안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런 상황이 알려지면서 여권 핵심부와 최 청장의 인사 갈등설이 터져나왔다.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된 최 청장은 세 번째 중재안을 던졌다고 한다.
“인사가 급한 총경 이하만이라도….”
최기문 청장 사퇴 놓고 뒷말 무성
그러나 이마저도 제동이 걸렸다. 이때부터 최 청장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시각에 이상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평가했던 최 청장의 인사 스케줄에 대해 “자기 사람 심으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와 억측이 뒤따르기 시작한 것. 2~3일 고민하던 최 청장은 12월27일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마주앉은 최 청장은 ‘짧지만 긴 여운’이 담긴 사퇴의 변을 밝혔다.
“3월21일이 청장 임기이고 (임기가 보장된) 초대 청장이 임기를 채우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청장 임기가) 경찰 인사 주기와 맞지 않아 사퇴한다.”
언론이 평가한 자의 반 타의 반 사퇴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는 인사와 관련해 “갈등을 보인 적이 없다”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집권 중반기,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가 다시 화제로 떠올랐다. 앞서 언급한 최 청장의 퇴진과 박기정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의 재선임 반대 배경에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공기업에 대한 고강도 인사를 예고해놓고 있다. 이미 관련 부처에 공기업 임원들에 대한 조사 내용이 통보된 상태다. 내각과 청와대 등도 연말연시를 맞아 인사설로 뒤숭숭하다. 정찬용 대통령인사수석은 “(장관직 등을) 오래 해 지치고 힘든 분들이 많다”며 연초 개각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참여정부의 인사 방법과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남은 임기 3개월에 애착을 보였던 최기문 청장의 사퇴 과정에서 터져나온 파열음은 시스템 인사라는 참여정부의 인사 원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12월23일 이사회에서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에 재선임된 박기정씨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임명 제청 거부도 마찬가지. 언론계에선 “박 이사장이 참여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아 거부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에 앞서 통합 증권거래소 이사장 인선 때는 정건용 전 산업은행 총재 등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관료 출신 3명이 인사추천위원회 후보로 선정됐으나 청와대에서 “모피아(재경부 관료) 출신은 안 된다”며 거부, 3명 모두 자진 사퇴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두 기관 모두 법적인 인사추천기구인 이사회와 인사추천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를 선정했거나 선정 직전이었다.
이와 관련, 정치권에서는 여권이 ‘보은(報恩)’ 차원에서 염두에 둔 후보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라고 분석한다. 청와대와 여권이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으로 민다는 얘기가 나온 서동구씨는 대선 당시 노 대통령후보 언론정책고문을 역임했고, 통합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 밀었다고 알려진 한이헌씨는 대선 직전 치러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전력이 있다. 한이헌 대안이 불발로 끝난 뒤 통합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최종 낙점된 이영탁 전 국무조정실장은 17대 총선 열린우리당 출마자(경북 영주)다.
홍석현 회장 기용에 ‘실용’ 성향도 엿보여
보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은 2004년 10월 노 대통령이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이재정 전 의원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2004년 10월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발탁된 한행수씨는 2004년 4·15 총선 때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 우리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선배. 그의 발탁이 보은 인사라는 비판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10월27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에 기용된 이용훈 전 대법관은 판사로서 엄정한 법 해석 및 판결, 그리고 공직자로서 강직한 생활 자세를 보여 법조계 안팎의 신망이 두터웠다. 언론은 이런 그의 경력을 임명 배경으로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기용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봄 노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법률 대리인단 11명 중 한 사람으로 적극적인 변론을 폈다.
8월에 임명된 최홍건 중소기업특별위원장과 공민배 대한지적공사 사장도 2004년 총선 낙선자 배려 사례에 해당한다. 최 위원장은 총선 때 경기 이천-여주에 출마해 낙선했고, 공 사장은 창원시장직을 버리고 출마했다 장렬히 전사했다. 4월 총선 때 대구에서 출마해 낙선했던 윤덕홍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2004년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에 임명됐고, 6월 초대 소방방재청장으로 임명된 권욱씨는 경남 의령-함안-합천에서 낙선했던 사람이다. 박재호 국민체육진흥공단 감사도 대통령 정무2비서관으로 있다가 부산에 출마해 낙선한 인물이다. 박양수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은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DJ)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전직 비서관은 “측근들의 전진 배치는 집권 후반기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흔히 활용된다”며 “참여정부가 보은 정실인사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측근들을 대거 발탁하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당 관계자는 “변화와 개혁이란 참여정부의 코드로 무장한 사람들이 결국 그들 말고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노 대통령의 중반기 인사가 코드와 보은인사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실용주의적 성향도 엿보인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내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실상 노 대통령과 홍석현 주미대사 내정자의 조합은 ‘파격(破格)’에 가깝다. 삼성가(家)와 관계가 있고 보수 신문의 사주인 그의 발탁을 놓고 여권 내부에서마저 ‘신(新)정경유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이런 지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청와대는 공기업 인사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연초에 10명 넘는 공기업 임원들이 옷을 벗을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임기가 6개월여 남은 보건복지부 산하기관 모 이사장의 경우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업무 수행에 문제가 있어 임기 만료 전 참신한 인물로 교체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환경부 산하 한 공단의 임원도 사생활 관련 추문이 사정기관에 잡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