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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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이 마을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8-28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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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 이 마을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리처드 부스(아래)

    여기, 가진 거라곤 ‘대책 없이’ 낙천적인 성격밖에 없는, 유난히 헌책을 좋아하는 한 인물이 있다. 뚱뚱하고 엉뚱한 소리 잘하는 어쭙잖은 청년 리처드 부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영국의 명문 대학인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도 촌구석인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에 헌책방을 열었다.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시골에서 코딱지만한 가게 하나 꿰차고 앉아 있는 외아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는 “리처드 때문에 미치겠어요”라며 마을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다녔다. 마을사람들도 리처드를 ‘정신 나간 놈’쯤으로 여기고 비웃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헤이온와이에는 책을 사 읽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그가 헤이온와이에 눌러앉은 가장 큰 이유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용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뱀 머리가 되고 싶었다. 아무런 사업수단도 없고 돈도 부족했지만 그는 책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화려한 표지에 근사한 삽화가 곁들여진 아름다운 책 자체도 좋아했다. 사 모은 책들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것 또한 즐겼다. 헌책방은 그와 천생연분이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그는 의외로 쉽게 이 마을에 적응했다. 그가 ‘먹물’ 특유의 오만함을 버리고 대부분이 육체노동자인 마을사람들과 하나가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이웃들과 외지에서 온 능력 있는 중간상들의 도움으로 영국의 각 대학들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책을 모을 수 있었다.

    책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 때였다. 그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고서적들을 처분하고 싶어 안달이 난 대저택 주인들로부터 금빛으로 번쩍이는 책들을 사 모았고, 간혹 어마어마한 가격의 초판본들을 손에 넣어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성공담이 전해지면서 인구 1500여명의 이 자그마한 마을에 40개가 넘는 서점이 들어섰다. 공업이나 상업은 물론이고 농업조차 변변히 발달하지 못했던 퇴락한 시골마을 헤이온와이가 세계적인 책마을로 도약한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리처드는 괴짜다. 헤이온와이가 세계 최초의 책마을로 각광받기 시작하자 1977년 만우절을 기해 그는 ‘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마을을 독립국으로 선언하고, 스스로 책마을을 지배하는 ‘왕’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는 장관 같은 요직이 돌아갔다.

    재미로 시작한 이 일이 그에게 결국 엄청난 행운을 안겨줬다. 이 사건이 지역언론의 주목을 받자 그는 독립국 황제의 자격으로 영국의 잘못된 지방행정과 관광정책 및 관료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타고난 자유주의자 기질과 반골 기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 책에서 헌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아닌 시원한 재스민향이 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흥미로운 일화들 때문이다. 헤이온와이에서 평생 40km에 달하는 책장을 만들어온 목수 프랭크, 자기가 한 농담에도 지붕이 들썩거릴 만큼 웃어대는 ‘택시’, 개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며 개 관련 책만 읽는 ‘개 아범’ 클리퍼드, 고서화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자랑하는 군인 출신의 날라리 책방 주인 키릴 등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헌책방 주인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

    헤이온와이가 세계적인 책마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자기만의 수준 높은 단골손님을 확보한 ‘동업자’들이 없었다면, 리처드의 서점이 단일 헌책방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을지 몰라도 결코 헤이온와이가 헌책방 마을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마을이 한창 책마을로 명성을 얻어가던 1980년대에 경영 악화로 파산에 직면했을 만큼 리처드에게는 사업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운 좋게도 1990년대 초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 헤이온와이를 본뜬 책마을이 잇따라 생기면서 다시 한번 그에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고, 그는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 책은 시작부터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 바짝 정신차리지 않으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놓치기 쉽다. 이런 단점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저자 특유의 낙천주의가 길어 올린 수많은 유머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는 그토록 사랑하는 헌책들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그런 유머를 배우지 않았을까.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 리처드 부스 지음/ 이은선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펴냄/ 416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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