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긴 한달. 통역사들은 올해 10월이 “우리나라 통역 역사상 가장 바쁜 달이었다”고 말한다. 26개국 정상들이 참석했던 제3차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을 비롯해 세계지식포럼 등 각종 국제회의가 봇물을 이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통역사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빗발쳐 급기야 외국어대 통역대학원 2년생들이 동원됐을 정도다.
국제회의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면서도 가장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통역사다. 특히 경력 5년 이상의 베테랑들인 일급 통역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나 국제 외교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최근 일급 통역사들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킨 것은 ASEM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26개국 정상들이 쓰는 언어가 무려 16종류나 됐기 때문이다. 11개 언어를 사용하는 유럽연합(EU) 의회의 경우 발언 하나가 다른 나라 말로 두번, 세번 번역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잘못 전달돼 발언 당사자가 곤욕을 치르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11개 언어를 한번 통역하는데 110회의 통역과정을 거쳐야 할 정도로 업무의 비효율성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서울 ASEM은 무난하게 통역절차를 치러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YS 부정확한 발음에 진땀나는 순간
이번 ASEM에서 활약한 일급 동시통역사는 모두 60명(유럽연합 37명, 한국 중국 일본 각 6명, 태국 3명, 베트남 2명). 이들은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정상들이 묵는 호텔의 독방을 쓰면서 같이 묵었고 청와대 경호실에서 발급한 붉은색의 최고급 통행카드를 받았다. 삼엄한 경호가 펼쳐진 와중에도 이들은 회의장을 어디든 무사 통과하는 특권을 누렸다.
고위급 인사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일상화된 일급 통역사의 생활은 언뜻 보면 화려해 보인다. 유명한 사람들, 최고급 호텔, 좋은 식사…. 그러나 한순간의 실수가 회의 자체를 망쳐버릴 수 있고 계약 내용을 바꿀 수 있기에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보통 2명이 한 조를 이루지만 ASEM처럼 중요한 회의에는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일인당 10분씩 통역한다.
고위급 인사들과 일을 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여간한 게 아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관급 인사들 옆에서 진행하는 VIP 통역의 경우 예상치 못했던 일이 허다하게 발생하므로 뛰어난 순발력과 정확한 판단력을 요구한다.
예상치 못한 일로 통역사들을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YS). 우선 부정확한 발음과 어투부터 문제였다. YS 정부 초기 때의 일이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YS는 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행과… 간습은…”이라고 답변을 시작했다. 말을 빨리 했더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간행’과 ‘간습’ 사이에는 한참의 공백이 있었다. 이 말을 통역할 통역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간행? 간행이 뭔가. 여기서 이런 답변이 나올 차례가 아닌데…. 통역사 얼굴에서 진땀이 흐르고 몇 분처럼 느껴지는 수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헤매고 있던 와중에 ‘간습’이라는 말이 뒤따랐고 그제서야 통역사는 ‘간행과 간습’이 ‘관행과 관습’의 불명확한 발음임을 알아듣고 통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연설자의 말이 느리고 발음이 불투명하면 전체 의미 파악이 힘들어 통역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이 통역사의 증언이다.
사실 YS의 국제적 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93년 11월 경주에서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에서의 일은 그 중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가 한국 어선의 일본 영해 불법 조업 때문에 일본 정부가 아주 곤란을 겪고 있다면서 불법 조업을 근절해 달라고 주문하자 YS는 외교 용어를 무시한 채 “국제 사회에서도 불법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법 조업을 근절하겠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통역사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진상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하겠다’는 식으로 적당히 통역했지만, YS 말을 알아들은 일본측 통역사가 호소카와 총리에게 한국측 통역이 잘못됐다고 귀띔하는 바람에 결국 YS는 원래대로 재차 다짐을 해야 했다.
YS는 퇴임 후인 지난 4월 미국 방문 때 아메리칸 대학에서의 강연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나머지 효과’로, ‘유동화’를 ‘유통화’로 잘못 읽었지만, 연설문을 미리 받아 본 통역자가 원고대로 통역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통역사들로부터 인기가 좋은 편이다. 김대통령은 이미 배포된 연설문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는 말을 내놓아 통역사들이 “긴장하면서도 통역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 살아 있는 표현, 생생한 비유를 많이 섞어 연설하기 때문이다. 한 베테랑 통역사는 이를 “challenging하다”고 표현했다. 또 김대통령의 연설은 그대로 옮기면 한편의 논설문이 될 정도로 논리 정연하기로 소문나 있다. 통역사들이 좋아할 요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VIP 통역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급통역사 O씨는 “특히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외국 귀빈을 만나 이동할 때 통역에 어려움이 많다. 경호원들은 경호원대로 밀착경호하고 통역사는 통역사대로 밀착해야 통역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통역사가 연약한 여성들이기에 이런 경우 통역사들은 육체적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어떤 때는 말한 사람의 잘못을 통역사들이 뒤집어쓰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 경제관련 회의 등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일급 통역사 K씨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경제관련 부처 장관이 숫자를 잘못 얘기해 나중에 그것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관은 통역사 잘못으로 돌렸다. 기밀회의여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양국 장관말고는 통역사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관이 회담중에 적어놓은 노트에 잘못 얘기한 숫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밝혀져 명예는 회복됐지만 담당 통역사는 상당한 마음고생을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다보니 통역사들은 노트에 필기를 하며 혹 있을지 모를 실수에 대비한다.
일급 통역사들은 “외국어를 잘하는 것과 통역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다음 얘기는 통역업계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6공화국 당시 노태우 전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우리측에서는 러시아어를 잘하기로 소문난 S교수를 통역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방문 기간중 우리측 통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소련측에서 고용한 통역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자 S씨는 현장을 뛰쳐나와 기자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등 소동을 빚었다.
지난해 7월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을 때 벌어진 사건은 국제관계에서 일급 통역사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다. 세 나라 장관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던 동시통역이 갑자기 30초간 멈춘 데 이어 미국측이 선정한 통역사의 탄식 같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어법에도 맞지 않는 한국어가 이어폰을 통해 더듬더듬 흘러나왔던 사건이다. 이 일로 외교부는 혼이 났다. “미국측이 유능한 동시통역사라고 해서 믿었다”고 해명했지만 “외교부는 사전 점검도 안 하느냐”는 비판에 시달렸다.
지난 98년 11월23일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했는데 “미국측 동시통역사가 너무 부실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제기됐던 것. 김대통령이 질문에 답변을 시작한 지 40초가 지나서야 동시통역이 나오기 시작했고 중간에 여러 차례 끊기는 등 문제가 많았던 것. 98년 11월21일 김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할 때도 “미국측의 한국어 통역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 한국측에서 나왔다. 당시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측에 한국어 통역이 부실하다고 몇 차례 얘기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VIP들을 상대하다 보니 ‘특별한 요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일급 통역사 B씨는 “야당 시절의 김대통령과 측근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통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측근들 중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은 그 분이 핵심 인사가 되었다. ‘국회의원 몇 명과 함께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가르쳐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나는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B씨는 최근 민주당 모 최고위원을 주빈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통역했는데 그 최고위원이 “나를 위해 일해달라”고 부탁해 난처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일급 통역사들은 자부심도 대단하다. 특히 EU(유럽연합) 소속 일급 통역사들의 꼬장꼬장함은 국제 통역업계에 유명하다. 이들은 지난 ASEM 때도 회의 시작 며칠 전에 선발대를 보내 통역부스의 크기를 재고 “국제규격에 모자란다”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뒷벽을 커튼으로 가려달라” “의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 사항을 내세워 실무자들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애를 먹었다. 청와대 경호팀과 유럽연합 소속 일급 통역사들이 가장 치열하게 밀고 당겼던 것은 ‘온도’ 문제였다. 우리 경호팀에서는 이른바 ‘대통령 온도’(27∼28도)를 고집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장 좋은 온도로 회의장 온도를 맞추려고 했던 것. 그러나 결국에는 “통역부스의 온도가 높으면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통역할 수 없다”며 온도를 낮춰줄 것을 요구하는 유럽연합 통역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한 일급 통역사는 “통역을 하고 나오면 통역사들의 얼굴이 빨갛다. 사람들은 통역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런 줄 아는데 사실은 통역부스 안이 덥기 때문이다. 선풍기나 에어컨을 사용하고 싶어도 소음이 이어폰을 통해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내온도가 높을 경우 통역사들은 완전히 ‘찜통’ 속에서 사우나를 하는 느낌이라는 것.
외국어대 통역번역연구소 영어팀장 안인영씨는 “우리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로 일급 통역사들의 역할을 설명했다. 이번 ASEM의 개회식과 폐막식 사회를 맡았던 동시통역사 배유정씨는 “이제 통역사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 경제전쟁의 최첨병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통역사 육성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세심한 정책이 필요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국제회의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면서도 가장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통역사다. 특히 경력 5년 이상의 베테랑들인 일급 통역사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나 국제 외교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최근 일급 통역사들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킨 것은 ASEM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26개국 정상들이 쓰는 언어가 무려 16종류나 됐기 때문이다. 11개 언어를 사용하는 유럽연합(EU) 의회의 경우 발언 하나가 다른 나라 말로 두번, 세번 번역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잘못 전달돼 발언 당사자가 곤욕을 치르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11개 언어를 한번 통역하는데 110회의 통역과정을 거쳐야 할 정도로 업무의 비효율성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서울 ASEM은 무난하게 통역절차를 치러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YS 부정확한 발음에 진땀나는 순간
이번 ASEM에서 활약한 일급 동시통역사는 모두 60명(유럽연합 37명, 한국 중국 일본 각 6명, 태국 3명, 베트남 2명). 이들은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정상들이 묵는 호텔의 독방을 쓰면서 같이 묵었고 청와대 경호실에서 발급한 붉은색의 최고급 통행카드를 받았다. 삼엄한 경호가 펼쳐진 와중에도 이들은 회의장을 어디든 무사 통과하는 특권을 누렸다.
고위급 인사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 일상화된 일급 통역사의 생활은 언뜻 보면 화려해 보인다. 유명한 사람들, 최고급 호텔, 좋은 식사…. 그러나 한순간의 실수가 회의 자체를 망쳐버릴 수 있고 계약 내용을 바꿀 수 있기에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보통 2명이 한 조를 이루지만 ASEM처럼 중요한 회의에는 세 명이 한 조를 이뤄 일인당 10분씩 통역한다.
고위급 인사들과 일을 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여간한 게 아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관급 인사들 옆에서 진행하는 VIP 통역의 경우 예상치 못했던 일이 허다하게 발생하므로 뛰어난 순발력과 정확한 판단력을 요구한다.
예상치 못한 일로 통역사들을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YS). 우선 부정확한 발음과 어투부터 문제였다. YS 정부 초기 때의 일이다.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YS는 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행과… 간습은…”이라고 답변을 시작했다. 말을 빨리 했더라면 그나마 다행인데 ‘간행’과 ‘간습’ 사이에는 한참의 공백이 있었다. 이 말을 통역할 통역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간행? 간행이 뭔가. 여기서 이런 답변이 나올 차례가 아닌데…. 통역사 얼굴에서 진땀이 흐르고 몇 분처럼 느껴지는 수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헤매고 있던 와중에 ‘간습’이라는 말이 뒤따랐고 그제서야 통역사는 ‘간행과 간습’이 ‘관행과 관습’의 불명확한 발음임을 알아듣고 통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연설자의 말이 느리고 발음이 불투명하면 전체 의미 파악이 힘들어 통역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이 통역사의 증언이다.
사실 YS의 국제적 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93년 11월 경주에서 열렸던 한일정상회담에서의 일은 그 중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가 한국 어선의 일본 영해 불법 조업 때문에 일본 정부가 아주 곤란을 겪고 있다면서 불법 조업을 근절해 달라고 주문하자 YS는 외교 용어를 무시한 채 “국제 사회에서도 불법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법 조업을 근절하겠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난처한 입장에 빠진 통역사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진상을 파악해 적절히 대처하겠다’는 식으로 적당히 통역했지만, YS 말을 알아들은 일본측 통역사가 호소카와 총리에게 한국측 통역이 잘못됐다고 귀띔하는 바람에 결국 YS는 원래대로 재차 다짐을 해야 했다.
YS는 퇴임 후인 지난 4월 미국 방문 때 아메리칸 대학에서의 강연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나머지 효과’로, ‘유동화’를 ‘유통화’로 잘못 읽었지만, 연설문을 미리 받아 본 통역자가 원고대로 통역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통역사들로부터 인기가 좋은 편이다. 김대통령은 이미 배포된 연설문에 얽매이지 않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는 말을 내놓아 통역사들이 “긴장하면서도 통역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 살아 있는 표현, 생생한 비유를 많이 섞어 연설하기 때문이다. 한 베테랑 통역사는 이를 “challenging하다”고 표현했다. 또 김대통령의 연설은 그대로 옮기면 한편의 논설문이 될 정도로 논리 정연하기로 소문나 있다. 통역사들이 좋아할 요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VIP 통역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급통역사 O씨는 “특히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외국 귀빈을 만나 이동할 때 통역에 어려움이 많다. 경호원들은 경호원대로 밀착경호하고 통역사는 통역사대로 밀착해야 통역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통역사가 연약한 여성들이기에 이런 경우 통역사들은 육체적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어떤 때는 말한 사람의 잘못을 통역사들이 뒤집어쓰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 경제관련 회의 등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일급 통역사 K씨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 “경제관련 부처 장관이 숫자를 잘못 얘기해 나중에 그것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관은 통역사 잘못으로 돌렸다. 기밀회의여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양국 장관말고는 통역사밖에 없었다. 다행히 장관이 회담중에 적어놓은 노트에 잘못 얘기한 숫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밝혀져 명예는 회복됐지만 담당 통역사는 상당한 마음고생을 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다보니 통역사들은 노트에 필기를 하며 혹 있을지 모를 실수에 대비한다.
일급 통역사들은 “외국어를 잘하는 것과 통역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다음 얘기는 통역업계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6공화국 당시 노태우 전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우리측에서는 러시아어를 잘하기로 소문난 S교수를 통역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방문 기간중 우리측 통역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소련측에서 고용한 통역사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자 S씨는 현장을 뛰쳐나와 기자들에게 눈물을 보이며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등 소동을 빚었다.
지난해 7월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을 때 벌어진 사건은 국제관계에서 일급 통역사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다. 세 나라 장관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던 동시통역이 갑자기 30초간 멈춘 데 이어 미국측이 선정한 통역사의 탄식 같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어법에도 맞지 않는 한국어가 이어폰을 통해 더듬더듬 흘러나왔던 사건이다. 이 일로 외교부는 혼이 났다. “미국측이 유능한 동시통역사라고 해서 믿었다”고 해명했지만 “외교부는 사전 점검도 안 하느냐”는 비판에 시달렸다.
지난 98년 11월23일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했는데 “미국측 동시통역사가 너무 부실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제기됐던 것. 김대통령이 질문에 답변을 시작한 지 40초가 지나서야 동시통역이 나오기 시작했고 중간에 여러 차례 끊기는 등 문제가 많았던 것. 98년 11월21일 김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할 때도 “미국측의 한국어 통역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는 지적이 한국측에서 나왔다. 당시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측에 한국어 통역이 부실하다고 몇 차례 얘기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VIP들을 상대하다 보니 ‘특별한 요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일급 통역사 B씨는 “야당 시절의 김대통령과 측근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통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측근들 중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은 그 분이 핵심 인사가 되었다. ‘국회의원 몇 명과 함께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가르쳐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라 ‘나는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B씨는 최근 민주당 모 최고위원을 주빈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통역했는데 그 최고위원이 “나를 위해 일해달라”고 부탁해 난처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일급 통역사들은 자부심도 대단하다. 특히 EU(유럽연합) 소속 일급 통역사들의 꼬장꼬장함은 국제 통역업계에 유명하다. 이들은 지난 ASEM 때도 회의 시작 며칠 전에 선발대를 보내 통역부스의 크기를 재고 “국제규격에 모자란다”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뒷벽을 커튼으로 가려달라” “의자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 사항을 내세워 실무자들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애를 먹었다. 청와대 경호팀과 유럽연합 소속 일급 통역사들이 가장 치열하게 밀고 당겼던 것은 ‘온도’ 문제였다. 우리 경호팀에서는 이른바 ‘대통령 온도’(27∼28도)를 고집했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가장 좋은 온도로 회의장 온도를 맞추려고 했던 것. 그러나 결국에는 “통역부스의 온도가 높으면 머리가 아파서 제대로 통역할 수 없다”며 온도를 낮춰줄 것을 요구하는 유럽연합 통역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한 일급 통역사는 “통역을 하고 나오면 통역사들의 얼굴이 빨갛다. 사람들은 통역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런 줄 아는데 사실은 통역부스 안이 덥기 때문이다. 선풍기나 에어컨을 사용하고 싶어도 소음이 이어폰을 통해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내온도가 높을 경우 통역사들은 완전히 ‘찜통’ 속에서 사우나를 하는 느낌이라는 것.
외국어대 통역번역연구소 영어팀장 안인영씨는 “우리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로 일급 통역사들의 역할을 설명했다. 이번 ASEM의 개회식과 폐막식 사회를 맡았던 동시통역사 배유정씨는 “이제 통역사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 경제전쟁의 최첨병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통역사 육성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세심한 정책이 필요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