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대학입시부터 대학에 따라 제2외국어 성적이 전체, 또는 일부 모집단위 전형에 반영된다. 교육부에 따르면 대학입시에 제2외국어를 반영하는 학교는 전국 191개 대학 중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을 포함한 73개교. 전체 90만명을 헤아리는 대입수험생 중 70만명은 제2외국어를 준비해야 한다. 97년 대입과목에서 제외된 이래 고교 교육현장에서 홀대받으며 근근이 맥을 이어오던 제2외국어가 다시금 입시과목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지난 98년 교육부가 이 입시안을 발표했을때만 해도 교육계와 학계는 적극 환영했다. “영어 일변도로 치우치면서 날로 소홀해져 가던 제2외국어 교육이 비로소 정상화될 계기를 마련했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고교3년생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제2외국어 공부를 하게 되면서 점차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입시부담이 커진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다.
“주가 떨어지는 제2외국어에 왜 투자하나”
제2외국어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영어 하나도 제대로 못가르치는 나라에서 무슨 제2외국어냐”는 것으로 모아진다.
영어공용화론을 주창해 우리 사회에 일파만파를 일으킨 소설가 복거일씨. 그는 “세계의 문화권 자체가 영어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 상황에서 제2외국어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파격적 ‘무용론’을 내세운다.
“영어가 날로 득세하는 세상에서 제2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주가가 떨어지는 종목에 뒤늦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세상에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배워서 실생활에 쓸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영어 하나를 배우는 것도 힘이 드는데, 제2외국어까지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자원낭비입니다. 얼치기로 배우느니 아예 안배우니만 못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투자하는 편이 낫습니다.”
올해로 8년째 주한 영국문화원에 근무하는 최현경씨(34) 역시 마찬가지. 그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해서 대학입시를 치렀다. 대학에서의 전공도 불어불문학과였다. 하지만 정작 대학졸업 후 그가 선택한 길은 영국유학과 뒤이은 주한 영국문화원으로의 취직. 불문학이란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선택이었다. 프랑스어가 싫어져서도 아니고, 적성에 안맞아서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다만 프랑스어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의 선택폭이 좁다보니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동창들도 사회에서 제2외국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과정에서 필수과목으로 배운다고 해서 개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라고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서울대에서 불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프랑스어 전공만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 현재 지방대학에서 영문과를 복수전공하는 김모씨(33)는 아예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는 독문과나 불문과가 지나치게 많다. 인력낭비가 아닐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들은 철저히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제2외국어의 ‘쓸모’에 대해 회의하는 경우. 이들 외에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를 배우고 대입을 치렀지만, 사회에 나와 도통 사용할 일이 없다보니 단어마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세계 인구 중 영어권 인구가 3억2000만명인 데 비해 프랑스어 사용자는 7000만명, 독일어 인구는 9000만명, 스페인어 인구는 2억4000만명, 중국어 인구는 무려 10억명을 헤아린다. 20억명에 달하는 제2외국어 시장을 도외시하고 영어만 가르치는 것은 세계화에 역행하는 처사다” 는 주장이다.
설혹 실용적인 차원에서 제2외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충남대 불문과 정과리교수는 “언어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민족의 역사와 경험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그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비록 언어 자체는 시간이 지나 잊힌다 해도 언어를 통해 타문화를 접한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서울시립대 사회학과 강사 이진경씨는 “주변의 동료학자들 경우를 보면 학문을 계속하는 데 고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고 말한다. 그 자신 대학진학 후 보다 심화된 학문을 위해 독일어를 새롭게 공부하며 “고등학교 때 좀더 열심히 배워두었더라면…”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절실히 느껴지더라는 것.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프랑스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김은영씨(33)는 “학자가 될 생각이거나 전공할 사람만 선별해서 제2외국어를 배우면 된다고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적성이나 관심거리를 발견하는 것은 해당학문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접해볼 기회를 주는 것은 그래서 필요합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양대 정치학과 공성진교수는 ‘제2외국어 무용론’과는 또다른 입장에서 제2외국어 의무교육을 반대한다. 앞으로 세계가 ‘팍스 아메리카’ 문화로 재편될 것인지, 혹은 다양한 문명이 충돌하는 다원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따라 제2외국어의 필요성을 가늠한다면 자신은 후자를 지지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에 의해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반대라는 것.
“제2외국어 교육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떤 교육이든 국가가 개입해서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일괄적으로 대입에 제2외국어를 반영하도록 제도화하지 말고 대학에 자율적으로 맡겨, 중국학 커리큘럼이 잘 갖춰진 대학에서는 중국어를 입시에 포함시키는 방식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우리 교육이 ‘소품종 다량생산’에 집착해 실패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영어교육 역시 마찬가지. 국가 주도하에 너도 나도 영어라는 ‘소품종’ 학문에 ‘다량’으로 매달렸지만 결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간단한 영어회화조차 못하는 이들만 양산하는 실패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영어교육에 실패했는데, 또다시 ‘실패한 방식’을 제2외국어 교육에서 되풀이해야만 할까요. 제2외국어는 철저히 개인의 필요에 의해, ‘공적인 교육’이 아닌 ‘사교육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것이 ‘다품종 소량생산’식 교육입니다.”
제2외국어 교육을 국가가 아닌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복거일씨도 마찬가지. 사회가 ‘배워야 한다’는 당위론을 들고 나서서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배워야 할 필요가 생기면 개인이 적극적으로 배우려 들게 마련이란 것이 복씨의 생각이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보세요. 일본어를 굳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일본만화를 보고 싶고 일본노래를 듣고 싶으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일본어를 배워요. 시장이란 그런 겁니다. 누가 주도하지 않아도 필요가 수요를 낳는 것이에요.”
‘시장의 필요’에 따른다면 현재 고등학생들이 비교적 배우기 쉽고 쓰임새의 폭도 넓은 중국어나 일본어를 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러시아어보다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 그래서 서울산업대 사회학과 백욱인교수는 같은 제2외국어라고 해도 일본어-중국어와 유럽어 교육을 별개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한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가르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는 현 교육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공통적 지적. 다중언어의 조기교육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단국대 교육학과 이해명교수의 경우 실제 자신의 아들에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영어를, 중2 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친 결과 현재 아들은 두 개 언어룰 상당 수준으로 구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해 3년째 배우고 있는 독일어의 경우 학교공부의 효과를 그다지 보지 못하고 있다.
“외국어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만 학교를 통해 이뤄지는 외국어 교육이 실효를 거두려면 현재의 교육과정과 제도를 보다 정교하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중앙대 영문과 강래희교수 역시 “영어문화권의 패권주의를 막기 위해서 고등학교 과정의 제2외국어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운영상의 조절과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간 회사원 박숙경씨(32)는 지난해 초부터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이 언어의 매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를 위해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한 탓에 프랑스어가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입시를 위한 강제적 학습이 저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제 또래들에게 제2외국어에 대한 ‘염증’을 심어준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면 대입을 염두에 둔 고교 과정의 제2외국어 교육은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은 앞으로 시행될 대입 제2외국어 난이도를 상위 50% 학생이 100점 만점에 평균 75점 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쉽게 출제, ‘생활외국어로서 언어 사용능력을 길러주고 사고력을 평가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취지와 목표는 좋다. 그러나 박숙경씨의 경험담처럼 ‘강요’에 의해 이뤄진 제2외국어 수업이 안그래도 입시준비에 허덕이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이후 그들 삶의 자산으로 어떻게 남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지난 98년 교육부가 이 입시안을 발표했을때만 해도 교육계와 학계는 적극 환영했다. “영어 일변도로 치우치면서 날로 소홀해져 가던 제2외국어 교육이 비로소 정상화될 계기를 마련했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고교3년생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제2외국어 공부를 하게 되면서 점차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입시부담이 커진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다.
“주가 떨어지는 제2외국어에 왜 투자하나”
제2외국어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영어 하나도 제대로 못가르치는 나라에서 무슨 제2외국어냐”는 것으로 모아진다.
영어공용화론을 주창해 우리 사회에 일파만파를 일으킨 소설가 복거일씨. 그는 “세계의 문화권 자체가 영어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 상황에서 제2외국어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파격적 ‘무용론’을 내세운다.
“영어가 날로 득세하는 세상에서 제2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주가가 떨어지는 종목에 뒤늦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세상에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배워서 실생활에 쓸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영어 하나를 배우는 것도 힘이 드는데, 제2외국어까지 배운다는 것은 사회적 자원낭비입니다. 얼치기로 배우느니 아예 안배우니만 못해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투자하는 편이 낫습니다.”
올해로 8년째 주한 영국문화원에 근무하는 최현경씨(34) 역시 마찬가지. 그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공부해서 대학입시를 치렀다. 대학에서의 전공도 불어불문학과였다. 하지만 정작 대학졸업 후 그가 선택한 길은 영국유학과 뒤이은 주한 영국문화원으로의 취직. 불문학이란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선택이었다. 프랑스어가 싫어져서도 아니고, 적성에 안맞아서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다만 프랑스어를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의 선택폭이 좁다보니 어쩔 수 없이 택한 길이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동창들도 사회에서 제2외국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과정에서 필수과목으로 배운다고 해서 개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라고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서울대에서 불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프랑스어 전공만으로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 현재 지방대학에서 영문과를 복수전공하는 김모씨(33)는 아예 “현재 우리나라 대학에는 독문과나 불문과가 지나치게 많다. 인력낭비가 아닐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들은 철저히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제2외국어의 ‘쓸모’에 대해 회의하는 경우. 이들 외에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를 배우고 대입을 치렀지만, 사회에 나와 도통 사용할 일이 없다보니 단어마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이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세계 인구 중 영어권 인구가 3억2000만명인 데 비해 프랑스어 사용자는 7000만명, 독일어 인구는 9000만명, 스페인어 인구는 2억4000만명, 중국어 인구는 무려 10억명을 헤아린다. 20억명에 달하는 제2외국어 시장을 도외시하고 영어만 가르치는 것은 세계화에 역행하는 처사다” 는 주장이다.
설혹 실용적인 차원에서 제2외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충남대 불문과 정과리교수는 “언어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민족의 역사와 경험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그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비록 언어 자체는 시간이 지나 잊힌다 해도 언어를 통해 타문화를 접한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서울시립대 사회학과 강사 이진경씨는 “주변의 동료학자들 경우를 보면 학문을 계속하는 데 고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고 말한다. 그 자신 대학진학 후 보다 심화된 학문을 위해 독일어를 새롭게 공부하며 “고등학교 때 좀더 열심히 배워두었더라면…”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절실히 느껴지더라는 것.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프랑스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던 김은영씨(33)는 “학자가 될 생각이거나 전공할 사람만 선별해서 제2외국어를 배우면 된다고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적성이나 관심거리를 발견하는 것은 해당학문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접해볼 기회를 주는 것은 그래서 필요합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양대 정치학과 공성진교수는 ‘제2외국어 무용론’과는 또다른 입장에서 제2외국어 의무교육을 반대한다. 앞으로 세계가 ‘팍스 아메리카’ 문화로 재편될 것인지, 혹은 다양한 문명이 충돌하는 다원화 사회가 될 것인지에 따라 제2외국어의 필요성을 가늠한다면 자신은 후자를 지지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에 의해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반대라는 것.
“제2외국어 교육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떤 교육이든 국가가 개입해서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이 각자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일괄적으로 대입에 제2외국어를 반영하도록 제도화하지 말고 대학에 자율적으로 맡겨, 중국학 커리큘럼이 잘 갖춰진 대학에서는 중국어를 입시에 포함시키는 방식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우리 교육이 ‘소품종 다량생산’에 집착해 실패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영어교육 역시 마찬가지. 국가 주도하에 너도 나도 영어라는 ‘소품종’ 학문에 ‘다량’으로 매달렸지만 결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간단한 영어회화조차 못하는 이들만 양산하는 실패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영어교육에 실패했는데, 또다시 ‘실패한 방식’을 제2외국어 교육에서 되풀이해야만 할까요. 제2외국어는 철저히 개인의 필요에 의해, ‘공적인 교육’이 아닌 ‘사교육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것이 ‘다품종 소량생산’식 교육입니다.”
제2외국어 교육을 국가가 아닌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복거일씨도 마찬가지. 사회가 ‘배워야 한다’는 당위론을 들고 나서서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배워야 할 필요가 생기면 개인이 적극적으로 배우려 들게 마련이란 것이 복씨의 생각이다.
“요즘 중고등학생들 보세요. 일본어를 굳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일본만화를 보고 싶고 일본노래를 듣고 싶으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일본어를 배워요. 시장이란 그런 겁니다. 누가 주도하지 않아도 필요가 수요를 낳는 것이에요.”
‘시장의 필요’에 따른다면 현재 고등학생들이 비교적 배우기 쉽고 쓰임새의 폭도 넓은 중국어나 일본어를 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러시아어보다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 그래서 서울산업대 사회학과 백욱인교수는 같은 제2외국어라고 해도 일본어-중국어와 유럽어 교육을 별개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한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를 가르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는 현 교육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공통적 지적. 다중언어의 조기교육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단국대 교육학과 이해명교수의 경우 실제 자신의 아들에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영어를, 중2 때부터 일본어를 가르친 결과 현재 아들은 두 개 언어룰 상당 수준으로 구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해 3년째 배우고 있는 독일어의 경우 학교공부의 효과를 그다지 보지 못하고 있다.
“외국어는 반드시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만 학교를 통해 이뤄지는 외국어 교육이 실효를 거두려면 현재의 교육과정과 제도를 보다 정교하게 정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중앙대 영문과 강래희교수 역시 “영어문화권의 패권주의를 막기 위해서 고등학교 과정의 제2외국어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운영상의 조절과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간 회사원 박숙경씨(32)는 지난해 초부터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이 언어의 매력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고등학교 때는 입시를 위해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한 탓에 프랑스어가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입시를 위한 강제적 학습이 저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제 또래들에게 제2외국어에 대한 ‘염증’을 심어준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면 대입을 염두에 둔 고교 과정의 제2외국어 교육은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은 앞으로 시행될 대입 제2외국어 난이도를 상위 50% 학생이 100점 만점에 평균 75점 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쉽게 출제, ‘생활외국어로서 언어 사용능력을 길러주고 사고력을 평가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취지와 목표는 좋다. 그러나 박숙경씨의 경험담처럼 ‘강요’에 의해 이뤄진 제2외국어 수업이 안그래도 입시준비에 허덕이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이후 그들 삶의 자산으로 어떻게 남을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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