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영화‘타이타닉’의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할리우드가 아닌 시드니에서 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0세기의 영화산업을 주도하면서 수많은 화제작을 만들었던 20세기폭스사가 21세기폭스영화사로 명찰을 바꿔 달면서 메인 스튜디오를 시드니로 옮길 예정이기 때문이다.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11월7일 4억5000만달러의 거대한 예산이 투입된 ‘폭스스튜디오 오스트레일리아’가 화려한 개관 행사를 가지면서 세계 영화계에 출생신고를 마친 것이다. 시드니 한복판에‘호주의 할리우드’를 만들려 했던 호주 출신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머독 “호주의 할리우드로 만들겠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톰 크루즈는 시드니에만 오면 싱글벙글댄다. 시드니가 그의 처가 동네이기 때문이다. 본인이나 아내 니콜 키드먼의 출연작품 대부분의 시사회를 시드니에 직접 와서 열 정도로 아내사랑이 지극한 톰 크루즈는 이번 개막 행사에서도 역시 니콜 키드먼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4000여명의 축하객들에 둘러싸인 그는“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상황에 부닥친 할리우드는 더이상 세계 영화산업의 메카일 수 없다. 시드니가 21세기 영화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반(反)할리우드성(?) 발언을 해‘호주의 사위’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톰 크루즈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시드니는 ‘영화산업의 말기 환자’로 취급받는 할리우드의 대안으로 떠오를 만한 충분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비가 그 첫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20세기폭스사가 시드니에서 제작한‘스타워즈 에피소드1’의 경우,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스타워즈 시리즈들에 비해 40% 정도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TV시리즈물인 ‘X파일’의 경우도 예산절감 측면에서 크게 성공한 사례로, 호주 영화업계의 성가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영화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은 물론 고용창출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호주 당국도 영화 및 비디오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매년 20억달러가 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공공시설물의 장기대여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샤인’ ‘피아노’ ‘베이브’등이 호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제작된 영화들이다.
뉴스리미트사(News Ltd)의 루퍼트 머독 회장은 런던 타임스(The Times) 등 세계적인 신문사와 폭스TV, 스카이TV 등을 소유하고 있는‘미디어 황제’다. 그러나 그가 21세기의 주력사업으로 신문이나 TV보다는 영화산업을 꼽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투자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그가 폭스스튜디오에 4억5000만달러라는 거대자본을 쏟아붓는 등 영화산업에 전에 없는 열의를 보이고 있어 그 배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일부 호주 언론들은 그가 호주 태생이며 호주를 기반으로 사업에 성공한 기업가이면서도 세금 등을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에서 모국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가, 영화사업을 계기로 이를 해소하려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작년에 재혼한 중국계 부인과 함께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한 일석이조의 사전포석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머독의 진정한 속내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호주 정부가 영화산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스튜디오를 큰돈 들이지 않고 세울 수 있다는 이점을 백분 활용했을 뿐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는 24ha가 넘는 거대한 폭스스튜디오를 시드니 한복판에 세우면서 토지구입과 관련해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주 정부가 고용창출을 이유로 50년 장기대여라는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호주에 잘 훈련된 영화인력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도 영화왕국을 꿈구는 루퍼트 머독에의 장래에 플러스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영화인‘크로커다일 던디’나‘매드 맥스’가 순 호주산 영화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호주 출신의 월드스타들인 멜 기브슨, 폴 호간, 니콜 키드먼 등을 배출한 시드니 소재 드라마 학교는 영화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조차 유학을 올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스튜디오 개관 행사에서 “‘타이타닉’같은 대작을 순 호주산 영화로 제작하고 싶다”고 말한 머독의 발언에서도 호주영화계에 대한 그의 강한 신뢰감을 읽을 수 있다.
천혜의 항구도시 시드니에 폭스스튜디오가 들어선 것은 호주의 영화산업뿐만 아니라 관광산업에도 단단히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폭스스튜디오가 영화만 제작하는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각종 이벤트행사를 여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장소는 딱 한곳. 전문가들이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페셔널 스튜디오다. 여기에는 특수촬영 스테이지 등 6개의 촬영장이 마련돼 있는데 공상과학영화일 경우 이곳에서만도 영화 한편을 만들어낼 수 있다.
폭스스튜디오측은 프로페셔널 스튜디오에 대한 일반인들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이와 유사한 시설을 일반 공개용으로 만들어 특수영화 촬영기법 등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20세기폭스사가 제작한 20세기 최고의 흥행작‘타이타닉’과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는 TV만화영화‘심슨’은 이곳에서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는 마력을 발휘한다.
특히 타이타닉호의 처녀 항해를 재현하는 코너에서 직접 단역배우로 참여해보는 것도 흥미 만점이다. 배가 거대한 빙산에 부딪치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과 끝내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는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다 보면 메가폰을 잡고 있는 감독이 마술사처럼 보인다.
‘X파일’ ‘워터 레이트’등의 TV시리즈물 촬영장면을 관람할 수 있는 TV투어에서도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가졌던 많은 궁금증들을 해소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TV에서 가장 사랑받는 가족인 심슨 패밀리들과 함께 ‘찧고 까불면서’ 환상적인 현대 만화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이색체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폭스스튜디오를 구경하다 보면 팔자에 없는 단역배우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곳에서는 늘 영화나 TV 시리즈물을 촬영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캐스팅돼 직접 분장도 하고 연기도 펼쳐 보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분장을 지우고 나서 여러가지 효과음향과 배경음악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들어보는 사운드 스테이지를 구경하고 나면 영화가 첨단과학을 최대한 활용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즘 호주와 뉴질랜드는 뉴 밀레니엄에 관한 행사들 때문에 치열하게 물밑경쟁을 벌이고 있다. 날짜 변경 선에서 가장 가까운 국가인 뉴질랜드는 뉴 밀레니엄 특수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중이다.
호주 역시 ‘새 천년을 맞는 첫 대륙’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각종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부분의 행사들을 폭스스튜디오측에서 기획하고 있다. 특히 폭스스튜디오 안에 설치된 대형 공연장에서 펼쳐질 신년 축제는 호주 최대의 뉴 밀레니엄 행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9월에 개막되는 시드니올림픽 문화행사에서도 폭스스튜디오 기획팀은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 라고 한다. 올림픽 기간에 개최될 각종 오락프로그램도 그들의 몫이고 올림픽을 관람하러 오는 외국관광객들을 위해서도 폭스스튜디오는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토지를 무상 장기대여하는 등 폭스스튜디오측에 각종 혜택을 베푼 시드니시 당국은 세계적인 영화사를 유치하면서 얻게 될 막대한 시너지 효과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루퍼트 머독이 뜻한 바대로 ‘폭스스튜디오 오스트레일리아’가‘호주의 할리우드’로 성장할 만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