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 필리핀에서는 사상 최초로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이날 회담 결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경제현안을 해결하고 상호협력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3개국이 공동연구에 착수키로 합의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방안의 주창자가 김대중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국내 언론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물론 공동연구 합의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3개국간의 정책 공조로 발전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식민지배라는 아픈 상처를 씻고 동북아 지역협력체를 구성할 수 있는 초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의 외교적 지형을 감안할 때 공동연구가 단기적인 정책 공조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 또한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中-구미, 日-동남아 외교 치중 … 아시아 외교 대책 세워야
첫째, 우선 공동연구 프로젝트의 최우선 과제로 합의된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따른 상호이익 극대화 방안을 검토해 보자. 아직 중국은 WTO 가입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다. 미국과의 협상이 타결되면서 고비는 넘겼지만 다른 WTO 회원국들과의 쌍무협상 등을 감안할 때 실제 중국의 가입 시기는 내년 상반기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 시점에서 중국이 WTO 가입에 따른 동북아 지역 국가들간의 협력관계를 우선적으로 검토할 여유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3개국간의 공동연구가 진행된다고 해도 정책상의 공조로 발전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둘째, 동북아 지역의 국제질서는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3개국간의 이해상충을 조정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군사적으로는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앞서고 있지만 아직 그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따라서 중-일 양국은 동북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일종의 우회로를 걷고 있는 셈이다. 동남아 지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동북아 지역에서의 위상 확대를 꾀한다 는 얘기다. 이미 일본은 70년대 후반부터 막대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동남아 지역에 대한 외교 공세를 강화해 왔으며 중국도 최근 이 지역에 대한 전방위 외교를 펼치고 있다. 지난 98년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통화기금(AMF) 설립을 반대했던 중국이 아세안(ASEAN)+3 정상회의에서 지지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 한 가지 사례다.
원칙적인 입장 표명이기는 하지만 중국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AMF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은 그만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양국의 적극적인 동남아 외교의 승패가 판가름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결국 WTO 가입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중국이 동북아 지역보다는 구미와의 관계를 중시할 것이라는 점, 중-일 양국이 동북아보다는 동남아 지역과의 관계 강화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김대중대통령의 구상이 단기간내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고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이번 3개국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식의 평가에서 벗어나 아시아 외교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워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을 확고하게 주도할 수 있는 일관된 계획이 필요하다. 이것마저 못해낸다면 우리 외교의 미래는 없다.
다음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국제질서가 결국 중-일 양국의 전략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만큼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동북아 지역의 협력 관계를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도 이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세안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서둘러야 한다. 동티모르에 파병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다음의 행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당국자들은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