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여당, 밤에는 야당.”
지금 정치권에 돌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다. 현재 청와대나 정부의 주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일부의 성향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국회의 한 인사는 “현재 정부에 몸담고 있는 인사 중 겉으로는 정부 여당에 협조하는 체하면서도, 실제로 모이기만 하면 김대통령과 정부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이들 중에는 심지어 ‘3년만 참고 기다리자’고 말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최근의 김대중정부가 처한 어려움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이같은 일부 인사들의 이중적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과 정부를 위해 몸을 던져 일하기는커녕 오히려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사가 많은데 국정이 어떻게 원활하게 돌아가겠느냐는 것이다.
구여권과 핫라인 … 고급정보 흘러나가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김대통령이 12월1일 국민회의 지도위원급 이상 당 간부들과의 오찬에서 ‘애당심’이란 표현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절박한 상황 인식에서 나온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신당의 후보 공천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능력과 애당심, 당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이 그동안 공천의 잣대로 제시했던 것은 △당선 가능성 △의정활동 △지역 여론의 세 가지 항목. 그러나 이날 ‘애당심’이라는 항목을 새로이 추가함으로써 국민회의 관계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 것. 또 김대통령은 이날 “당을 사랑하고 당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사람이 당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나는 이로울 때나 불리할 때나 당에 몸을 던져 민주화 투쟁을 해왔다”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옷로비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며 “앞으로 공천이나 당정개편에서 제일 중요한 기준은 ‘로열티’(충성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우선 지금 진행중인 청와대개편작업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현재 비서실 체제를 새롭게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그동안 충성도에 문제가 있는 일부 비서관이나 행정관을 교체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 안에도 낮에는 여당이지만, 밤에는 야당인 사람이 있는 듯하다”면서 “한광옥 신임 비서실장 주도하에 대대적인 물갈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 역시 “과거 정권에 몸담았던 비서관이나 행정관, 심지어 여비서까지 일부가 아직 남아 있긴 하다”면서 “현재의 청와대 숙정 작업이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전했다.
사실 청와대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정권 출범 때부터 말이 많았던 것이 사실. 모 비서관의 경우는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를 지원했다가 정권이 교체되자마자 동교동계 ‘실세’들에게 재빠르게 붙어 청와대로 진입했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지난 5월에는 ‘구 여권과 밀착했던 일부 청와대 인사들이 고급 정보를 한나라당과 특정 언론에 흘리고 있다’는 ‘적과의 동침설’이 여권을 긴장시킨 적도 있다. 지난 10월 한나라당이 신임 천용택 국가정보원장에게 공세를 펼쳤던 당시에도 한나라당 이부영총무가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조직과 편제 일부를 공개해 여권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정부 조직이나 청와대에서 이러저러한 잡음들이 나왔던 것은 정권교체에 따른 통치 기반의 조기 정착, 영남을 고려한 김중권비서실장 체제 도입 등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권 보위’를 위한 충성심이 강한 인사들보다는 관료적 실무형 스타일의 인사들로 내각이나 비서실을 충원한 데 따른 허점이었던 것. 장기간의 야당 경험에 따른 인적 자원의 빈곤이 통치력 약화로 이어지는 원인이 됐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여권 핵심에서는 그동안 구 여권 인맥과 현 야당 사이의 ‘핫 라인’을 어떻게 근절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왔다. 최근의 옷로비사건은 이러한 기류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김대통령이 자각하는 계기가 된 셈이라는 관측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나 정보기관의 정보 유출 파이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또 어떤 돌발 악재가 터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이 김태정 전 법무장관에게 옷로비사건과 관련된 ‘사직동 보고서’를 건네주는 등 ‘기강 해이’ 현상이 벌어진 것 역시 그 일차적 원인은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의 부족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여권 핵심의 인식. 박전비서관이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을 생각하는 공적 입장에 앞서 김전장관과 이리 저리 얽힌 ‘사적 인연’에 흐트러진 것이나,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사건에 대해 몸을 던져 막으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쓰며 거짓말로 일관한 것 역시 결국 ‘깊지 못한’ 충성심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이번 청와대의 숙정 작업은 내년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생길 수도 있는 ‘레임 덕’ 현상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 김대통령으로서도 이번이 ‘마지막 공천’이 될 것이고, 총선 이후 16대 의원들은 김대통령의 공천 장악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김대통령의 통치력이 상당 부분 허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 여권 핵심은 청와대 비서실마저 그런 정황에 휩쓸리게 되면 잔여 임기 3년 동안 힘을 제대로 집중시키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뜬 채 세월만 보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한광옥비서실 체제는 이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구축된 셈이다.
그러나 청와대 숙정 작업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권의 비주류 그룹은 “그렇지 않아도 모든 일이 대통령 친위그룹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대통령마저 충성심을 강조하고 나서면 민주적인 당 운영은 더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발한다. 또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충성심으로 재단하는 구시대적 정치 행태가 다시 횡행할 수 있고, 이런 기준이 중심이 되는 공천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비판론도 제기된다.
어찌 되었든 이런 논란과 상관없이 지금 청와대에서 비서실 사람들의 ‘솎아내기’ 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바야흐로 여권 전체가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