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송주 문화관이 자리한 ‘명가원’ 마당. [사진 제공 · 명욱]
함양의 중심에 개평한옥문화체험휴양마을(개평한옥마을)이 있다. 수백 년 전 지어진 한옥 6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입구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합류하고 그 사이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그래서 ‘개평(介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의 고향으로, 함양일두고택(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을 비롯한 여러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함양 쌀과 솔로 빚은 선비의 술
1 솔송주가 발효되는 모습. 함양의 쌀과 물, 함양에서 채취한 송순과 솔잎을 넣어 빚는다. 2 소줏고리에서 솔송주를 내려 받는 박흥선 명인. 3 명가원 뒷마당에 놓인 소줏고리.
그런데 이곳에 와서 고택들만 둘러보고 간다면 이 마을의 매력을 절반만 보고 간 셈이 된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공간이 있는데, 바로 ‘솔송주 문화관’이다. 일두 선생의 16대손 며느리인 박흥선 명인(전통식품명인 27호·경남무형문화재 제35호)이 솔송주를 시연하는 곳으로, 조선시대 고택과 선비 가문이 평소 마시는 술을 동시에 체험해볼 수 있다. 솔송주는 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500년 전통의 가양주(家釀酒)인 송순주를 복원한 술이다. 송순주는 조선 성종에게 진상했다고도 전해진다.
솔송주 문화관은 조선시대 제천현감을 지낸 눌재 정재범의 자택을 350년간 원형 그대로 보존한 고택 ‘명가원’에 자리한다. 명가원은 함양일두고택 바로 맞은편에 있어 일두고택을 둘러본 뒤 찾아가기 좋다. 명가원 마당 사진이 한국의 고택과 야생화를 설명한 책 ‘야생화 전통조경’(기의호 지음/ 주택문화사/ 2017)의 표지로 쓰였을 정도로 보존이 잘돼 있다. 나지막한 기와, 푸른 잔디와 소나무, 정갈한 화단 등으로 꾸며진 마당에 서면 절로 평온한 기분에 감싸인다. 마당 뒤편으로는 전통주 체험에 쓰이는 소줏고리가 놓여 있다.
솔송주의 대표 제품은 ‘솔송주’와 ‘담솔’이다. 솔송주는 송순(소나무 순)과 솔잎을 넣어 두세 달 숙성시켜 빚는 맑은 약주고, 담솔은 솔송주를 증류해 2년 이상 저온 숙성시킨 고급 증류주다. 술을 잘 빚기로 이름났던 박 명인이 경남무형문화재에 오른 뒤 주변의 권유로 아예 마을 밖에 양조장을 세우고 솔송주를 생산, 보급하면서 이 술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가 됐다. 박 명인은 “우리 전통주와 함양의 농산물을 되살리겠다는 생각이 컸다”고 말한다. 솔송주는 2018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건배주로, 지난 설날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유공자 등 1만 명에게 전달할 선물로 선정돼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솔송주를 담글 때는 함양에서 생산된 쌀과 함양의 맑은 물, 그리고 함양에서 채취한 송순과 솔잎만 사용한다고 한다. 솔송주에는 그 어떤 감미료도 들어가지 않는다. 담솔에는 꿀이 첨가돼 자극적이지 않은 단맛을 살짝 더한다. 술에 송순과 솔잎을 넣는 이유는 특유의 향긋한 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천연방부제 구실을 해 술의 산패를 막아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솔잎과 송순을 따는 시기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솔잎은 이른 봄, 송순은 늦봄에 채취한다. 솔잎은 이른 봄에 향이 좋고, 송순은 늦봄에 생명력이 높기 때문이라는 게 박 명인의 설명이다.
솔송주는 한식, 담솔은 한과와 함께
경남 함양 개평한옥마을에는 수백 년 된 한옥 60여 채가 보존돼 있다. [사진 제공 · 함양군청]
솔송주 문화관에 미리 예약하고 가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소줏고리로 소주 증류를 해볼 수 있고, 전통주 칵테일을 만들 수도 있다. 칵테일은 담솔에 얼음과 탄산수, 민트, 레몬, 블루 큐라소 등을 넣어 만든다.
솔송주가 마음에 쏙 들었다면 한두 병 사갖고 와 진득하게 마셔보고 싶을 것이다. 솔향이 나는 솔송주는 불고기, 잡채 등 한식과 잘 어울린다. 특히 함양은 연잎밥이 유명하므로 연잎밥에 솔송주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담솔의 알코올 도수는 40도가량이다. 따라서 식사 도중보다 식후에 한과와 함께 한두 잔 마실 것을 권한다. 담솔은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기에도 좋다.
솔송주는 옛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체험해볼 수 있는 술이다. 사시사철 푸르러 선비의 충절을 상징하던 소나무의 정신을 오롯이 표현한 술이기 때문이다. 정치 공작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죽고, 이후 부관참시까지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켰던 일두 선생의 정신이 술을 통해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것이다.
함양에는 학사루(學士樓)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는 조선 건국에 기여한 훈구파 사대부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훈구파와 대립하던 사림파의 김종직이 현감으로 오면서 시 철거를 명했고, 이로 인해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림파에 원한을 갖게 된다. 이후 사림파의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올린 것이 1498년(연산군 4년) 발생한 무오사화의 직격탄이 된다. 사림파에 앙심을 품었던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문제의 조의제문이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의 왕위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고했고, 이에 격노한 연산군은 김일손을 처형한 뒤 이미 사망한 김종직까지 부관참시한다. 일두 정여창 역시 귀양지에서 사망하게 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한다. 그러나 원칙을 중시한 사림파의 철학은 이후 조광조로 이어지고, 거듭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결국 역사의 승자가 된다.
아침 새소리, 냇물 소리에 ‘감탄’
화림동 계곡의 ‘팔담팔정’ 가운데 하나인 농월정(왼쪽)과 상림에 조성된 연꽃단지. [사진 제공 · 함양군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는 함양군 남계서원(왼쪽)과 담솔로 칵테일을 만드는 모습. [사진 제공 · 함양군청]
또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는 ‘상림(上林)’이라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들어 ‘천년의 숲’이라는 애칭으로도 통한다. 400여 종의 수목과 봄꽃,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한여름에 가보면 공원 주변으로 조성된 연꽃단지에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혹시 시간이 허락한다면 개평한옥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보길 바란다. 함양일두고택뿐 아니라 명가원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다산이 권한 매미 소리를 들으며 소나무 우거진 한옥의 풍경을 오후, 저녁, 한밤에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아침 일찍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와 냇물 소리를 통해 왜 이곳 함양 땅에서 선비들이 수백 년간 살았는지를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솔송주 문화관
주소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50-6
체험비 단순 시음은 무료. 소주 내리기 및 칵테일 체험은 인당 3만 원. 예약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