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창립 17주년 기념 후원의 날’ 행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나 문 대표는 야권의 핵심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호남에서 지지율이 5%에 그쳤다. 박 시장이 호남에서 26% 지지율을 기록하고, 새정연 안철수 의원이 14% 지지율을 얻는 등 전국 평균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것과 대비되면서 ‘호남이 문재인을 버렸다’는 얘기가 비주류 인사 사이에서 나왔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로 내년 총선에서 어떻게 민심을 담아낼 수 있겠느냐’며 문재인 사퇴 불가피론의 논거가 됐다.
호남이 문재인 버렸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발표 이후 새정연 일부 비주류 의원은 ‘문재인 사퇴 기자회견’을 감행하려 했다. 그러나 비주류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면서 무기한 연기됐다. 비주류 내부 속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문재인 대표 사퇴 요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있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를 두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며 “내년 총선과 관련해 선출직평가위원회가 구성돼 활동에 들어간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문 대표 사퇴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표적 평가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인식이 문재인 사퇴 요구 선봉에 서기를 꺼리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새정연 혁신위원회가 마련한 혁신안에 따르면 선출직평가위원회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은 하위 20%의 현역의원은 내년 총선 때 공천 탈락 대상이 된다.
한국갤럽 여론조사가 문재인 대표를 공격하는 ‘창’ 구실을 했다면, 비슷한 시기 발표된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문 대표를 엄호하는 ‘방패’가 됐다. 중앙일보는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전국 성인남녀 2300명 가운데 새정연을 지지한다고 답한 응답자 7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야당 일각의 요구대로 문재인 대표가 사퇴해야 하나’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65.6%가 ‘사퇴해선 안 된다’고 답한 것.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은 24.1%에 그쳤다.
중앙일보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뒤 문 대표 측 인사들은 “우리 당 지지자 가운데 3분의 2가 문 대표 사퇴를 반대하고 있다”며 ‘사퇴 불가’ 근거로 이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특히 중앙일보 설문조사에서 ‘새정연에서 내년 총선을 지휘할 적임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문 대표라는 응답이 46.1%에 이르고, 그다음으로 안 의원이 21.5%로 뒤를 이었다.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는 문 대표가 주장하는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등 이른바 ‘문-안-박 연대’ 제안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비주류 측에서는 “우리 당이 처한 문제의 원인이 결국 문 대표에게 있다는 점을 간과한 주류 측의 아전인수식 해석일 뿐”이라는 반박이 나왔다. ‘새정치연합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중앙일보 설문조사에 새정연 지지자 가운데 35.4%가 ‘주류와 비주류의 계속되는 대립’을 꼽았고 ‘주목할 만한 미래 지도자가 부재하다’는 응답이 18.4%, ‘비주류의 문재인 대표 흔들기’ 15.8%, ‘수권정당으로서의 비전 제시 미흡’이 14.7%,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 부재’가 11.0%에 이른다는 점에서다. 즉 비주류 측은 ‘비주류의 문재인 대표 흔들기’란 응답을 제외한 나머지 응답은 당대표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당을 통합해내지 못한 문 대표에게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
비주류 진영 한 인사는 “사즉생의 절박한 심정으로 새정연 지지자들이 문 대표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귀담아들어도 부족한 상황에서 문 대표는 자신에 대한 비주류의 문제제기를 ‘대표 흔들기’로만 여긴다”며 “문 대표가 비주류의 요구를 당내 권력투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가 문 대표를 겨냥한 ‘창’으로 기능하고, 중앙일보 설문조사가 문 대표를 엄호하는 ‘방패’ 구실을 한 데는 새정연에 대한 지지율 격차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새정연 지지율은 22%였지만 중앙일보 설문조사에서는 31%로 나타나 한국갤럽 여론조사보다 9%p 높았다.
무소속 천정배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1월 18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오른쪽)와 함께 웃고 있다.
4·29 재·보궐선거(재보선) 참패 이후 문재인 대표는 혁신위원회를 출범해 ‘대표직 사퇴’란 예봉을 피했고, 10·28 재보선 패배 이후 또다시 당대표 사퇴 요구가 제기될 조짐을 보이자 문-안-박 연대를 앞세워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문 대표 등 주류 측에서 총선까지 버티기 모드에 돌입한 것은 ‘시간은 내 편’이란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문 대표와 주류 측에게 공천과 관련해 훨씬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개연성이 높다. 선출직평가위원회 평가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 맞춰 현역의원을 대거 탈락시키고 새 인물을 영입해 개혁공천을 선보이면 민심을 돌려세울 기회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문-안-박 연대가 현실화하면 총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문 대표가 오롯이 떠안는 상황도 피할 수 있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문 대표가 제안한 문-안-박 연대는 권한도 나누지만 책임도 함께 지자는 제안”이라며 “총선 결과에 대한 위험을 문-안-박 연대로 사전에 분산해두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주류 일각에서 문 대표의 문-안-박 연대를 두고 ‘총선 승리’를 위한 연대라기보다 ‘총선 패배’에 대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비주류 측 한 핵심 인사는 “문 대표가 당내 비주류의 쇄신 요구를 외면하는 사이 새정연의 주요 지지기반인 호남은 사분오열하고 있다”며 “주요 지지기반인 호남 출신 인사를 배제한 문-안-박 연대로 내년 총선에서 등 돌린 호남 민심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은 “영남 출신 인사가 모인 문-안-박 연대는 비(非)호남 연대”라고 일침을 가했다. 새정연이 주류, 비주류로 나뉘어 끝 모를 갈등을 지속하는 사이 무소속 천정배 의원은 11월 18일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준비위원회’ 출범식을 갖고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돌입했다. 문 대표 등 새정연 친노(친노무현) 주류에 실망하고 문-안-박 연대론에 소외감을 느낀 호남 유권자들이 천 의원의 ‘나 홀로 창당’에 얼마만큼 기대감을 보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