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모양의 디캔터. 오래된 와인의 침전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공기 접촉이 적은 좁고 긴 디캔터를, 브리딩을 위해서는 공기 접촉이 많은 넓은 디캔터를 쓰는 것이 좋다.
디캔팅을 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오래된 와인 안에 생긴 침전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레드 와인 안에는 색소와 타닌이 고운 입자 상태로 고루 퍼져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입자들이 조금씩 뭉치는데, 더는 와인 안에 녹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 찌꺼기가 돼 병 안에 쌓이게 된다. 침전물이 몸에 나쁜 것은 아니지만, 미관상 좋지 않고 입안에 들어가면 거칠고 쓴맛을 내기 때문에 걸러내고 마시는 게 좋다.
침전물을 제거하는 디캔팅을 할 때는 먼저 마시기 하루 전부터 와인병을 세워둬 찌꺼기가 와인병 바닥에 모이도록 한다. 와인을 열 때는 병 바닥의 찌꺼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찌꺼기가 없는 윗부분만 천천히 디캔터에 붓는다. 이때 작은 손전등이나 촛불을 병목 부분에 비추면 찌꺼기가 병목으로 다가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어 와인을 어디까지 따라내야 하는지 판단하기에 편하다.
디캔팅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와인의 맛과 향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생산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와인은 타닌이 강해 떫은맛이 나거나 가지고 있는 향을 다 발산하지 못한다. 마치 단단하게 뭉쳐 있는 꽃봉오리 같다. 이런 와인을 디캔팅하면 와인이 공기에 노출되면서 빨리 피어난다. 이 과정을 브리딩(breathing)이라 하는데, 와인이 숨을 쉬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만화 ‘신의 물방울’ 1권에서 주인공 칸자키 시즈쿠가 명주실을 뽑는 듯한 환상의 디캔팅 실력을 과시하는 모습.
와인 맛이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병 숙성 기간은 와인마다 다르다. 대체로 값이 싸거나 타닌이 적은 와인일수록 빨리 숙성되고, 비싸거나 타닌이 많은 와인일수록 오랜 숙성 기간을 필요로 한다. 같은 와인도 보관 상태에 따라 숙성 정도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무조건 디캔팅하기보다 와인을 열고 조금 맛을 본 다음 디캔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충분히 숙성된 와인을 디캔팅하면 오히려 와인이 빨리 시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활짝 핀 꽃도 예쁘지만 꽃은 피어나는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와인도 피어나는 단계마다 맛과 향이 다르므로 디캔팅을 하지 않고 조금씩 잔에 따라 충분히 잔을 돌려가며 음미한다면 와인을 마시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오늘 다 피어나지 않았다면 남은 와인을 코르크 마개로 막아두고 다음 날 또 마셔보는 것도 좋다. 어떤 와인은 최고의 맛을 보여줄 때까지 며칠이 걸리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인을 마실 때면 왠지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수줍은 애인을 만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