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감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삶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바닷가에 떠밀려온 어린아이 시신이 세상을 움직였다고 하지만, 전혀 다른 대륙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난민 문제는 여전히 먼 일이다. 인간이 가진 공감력은 동병상련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병을 앓는 정도는 돼야 그 고통에 조금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디판’은 우리에게 깊은 공감력을 요구한다. 주인공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프랑스로 온 난민이다. 난민심사를 받을 때 통역자가 디판에게 어느 편이었는지 묻는다. ‘북부 출신 반군’이라는 답이 어떤 의미인지, 사실 우리에겐 정확히 와 닿지 않는다. 1930년대 만주 출생 한국인의 의미를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할 것이다. 디판의 사정은 우리와 별 상관없는, 아주 먼 문제일 뿐이다.
영화 ‘디판’은 이처럼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남이었던 디판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오는 힘을 가졌다. 무릇 좋은 작품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어떤 사람의 삶을 애정을 담아 깊이 있게 조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객도 그의 삶에 동화되게 마련이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스리랑카 출신 디판을 통해 이 어려운 작업을 이뤄낸다.
스리랑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디판은 망명하고자 가짜 가족을 만든다. 망명이란 공동 목표를 가진 여자와 아이가 가짜 가족을 자처한다. 망명 후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가족이란 거짓은 필요하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가족 행세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프랑스인은 거의 모르는 완전한 이방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거의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가족같이 지낸다.
그런데 가족 같은 것과 진짜 가족의 차이는 뭘까. 디판과 가짜 아내, 그리고 가짜 딸은 낯선 곳, 낯선 환경 속에서 점차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다. 낯선 언어를 쓰는 다른 피부색의 이방인을 멸시하는 주위 사람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똘똘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외부의 위협 앞에서 가짜 가족이던 세 사람은 진짜 가족으로 거듭난다. 영화 포스터처럼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을 때, 그 공간이 곧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서로의 체온을 안락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가족이 언제나 따뜻한 위안이 될 수 없듯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가족이야말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최후의 방어선이지 않을까. 결국 ‘디판’은 가족 같은 것에서 출발해 진짜 가족에 이르게 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압축된다.
남남으로 시작해 가족으로 끝나는 이 여정을 통해 관객은 스리랑카어를 쓰는 낯선 타인 디판을 그 나름의 사연을 지닌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난민이라는 추상적 덩어리가 아니라 디판이라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를 추구한다. 뭉개진 언어는 정치의 것이며 삶은 구체적인 명명과 호명으로 지탱한다. 난민이 아닌 디판, 고유명사를 가진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바로 ‘디판’이 지닌 영화적 가치다.
그런 점에서 영화 ‘디판’은 우리에게 깊은 공감력을 요구한다. 주인공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프랑스로 온 난민이다. 난민심사를 받을 때 통역자가 디판에게 어느 편이었는지 묻는다. ‘북부 출신 반군’이라는 답이 어떤 의미인지, 사실 우리에겐 정확히 와 닿지 않는다. 1930년대 만주 출생 한국인의 의미를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할 것이다. 디판의 사정은 우리와 별 상관없는, 아주 먼 문제일 뿐이다.
영화 ‘디판’은 이처럼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남이었던 디판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오는 힘을 가졌다. 무릇 좋은 작품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어떤 사람의 삶을 애정을 담아 깊이 있게 조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객도 그의 삶에 동화되게 마련이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은 스리랑카 출신 디판을 통해 이 어려운 작업을 이뤄낸다.
스리랑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디판은 망명하고자 가짜 가족을 만든다. 망명이란 공동 목표를 가진 여자와 아이가 가짜 가족을 자처한다. 망명 후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가족이란 거짓은 필요하다. 이들은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가족 행세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프랑스인은 거의 모르는 완전한 이방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 사람은 거의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되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가족같이 지낸다.
그런데 가족 같은 것과 진짜 가족의 차이는 뭘까. 디판과 가짜 아내, 그리고 가짜 딸은 낯선 곳, 낯선 환경 속에서 점차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다. 낯선 언어를 쓰는 다른 피부색의 이방인을 멸시하는 주위 사람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똘똘 뭉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외부의 위협 앞에서 가짜 가족이던 세 사람은 진짜 가족으로 거듭난다. 영화 포스터처럼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을 때, 그 공간이 곧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서로의 체온을 안락하게 여기는 건 아니다. 가족이 언제나 따뜻한 위안이 될 수 없듯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가족이야말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줄 최후의 방어선이지 않을까. 결국 ‘디판’은 가족 같은 것에서 출발해 진짜 가족에 이르게 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압축된다.
남남으로 시작해 가족으로 끝나는 이 여정을 통해 관객은 스리랑카어를 쓰는 낯선 타인 디판을 그 나름의 사연을 지닌 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난민이라는 추상적 덩어리가 아니라 디판이라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를 추구한다. 뭉개진 언어는 정치의 것이며 삶은 구체적인 명명과 호명으로 지탱한다. 난민이 아닌 디판, 고유명사를 가진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바로 ‘디판’이 지닌 영화적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