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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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ELS 억대 손실 사연 들어보니… “예금하러 갔더니 VIP실로 안내 후 가입 권유”

투자성향 조작·답변 지정·대리 가입 사례까지… 불완전판매 인정되면 투자금 일부 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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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아 기자

    island@donga.com

    입력2023-12-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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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서구에 사는 조규봉 씨(76)는 2년여 전 자신의 선택을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2021년 1월이에요. 33년 공직 생활을 하며 마련한 집을 전세 놓으면서 목돈이 생겼어요. 2억5000만 원 정도. 그 돈을 예금에 넣으려고 주거래 은행인 국민은행에 찾아갔는데, VIP실로 안내하더라고요.”

    당시 KB국민은행 직원은 조 씨의 예금 가입을 만류했다. “예금상품에 목돈을 넣어봤자 금리가 1%도 채 안 되는데, 연 4% 이상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주가연계증권(ELS)이 훨씬 낫지 않겠냐”며 홍콩H지수 연계 ELS 상품 가입을 강하게 권유한 것이다.

    “15년간 한 번도 손실 난 적 없다”

    “‘중국이 엄청나게 성장하는 것 아시잖아요’라면서 ‘15년 동안 한 번도 손실 난 적이 없으니 저 믿고 가입하셔도 된다’고 하대요. 이율이 4배인데 안전하다고까지 하니까 나도 그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거죠.”

    조 씨는 상품 가입을 위한 서명과 녹취에도 의심 없이 응했다.



    “요식 행위라는 듯이 말하더라고요. 병원에서 맹장 수술만 받아도 수술동의서를 쓰지 않냐고….”

    하지만 직원의 말과 달리 조 씨는 내년 1월 억 단위 손실을 볼 위기에 처했다. 조 씨가 가입한 ELS 상품은 만기 시점에 추종하는 지수가 가입 당시의 60~70%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원금 손실을 입는 ‘녹인(knock-in)형’이다. 2021년 1월 홍콩H지수는 1만1800 수준으로, 조 씨의 경우 원금을 지키려면 이 지수가 8000을 넘겨야 한다. 11월 29일 기준 홍콩H지수는 5818.87이다.

    “지난해부터 원금 손실 어쩌고 하면서 문자메시지가 오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몇 번 은행에 쫓아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중도 해지하면 손실이 확정되는 건 물론이고, 5% 수수료까지 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가입시킬 땐 손실의 시옷자도 꺼내지 않다가…. 내가 ‘노인 이용해서 장사하냐’며 고함을 막 쳤더니 지수가 다시 오를 수 있으니까 기다려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우리 세입자가 1월에 나간다고 연락이 왔는데, 보증금 못 돌려줄까 봐 정말 앞이 깜깜해요. 연금 생활하는 노인이 무슨 수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겠냐고요.”

    경기 고양시에 사는 주 모 씨(50)도 2021년 2월 KB국민은행 직원의 권유로 홍콩H지수 연계 ELS에 2억1000만 원을 투자했다.

    “무조건 안전한 상품으로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ELS에 가입하라고 하더라고요.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괜찮다’면서. 웬걸. 최근에 알아보니 2016년에도 홍콩H지수가 반토막 난 적 있습디다. 상품설명서를 안내해줄 때는 그런 설명 하나 없이 이율이나 장점에만 형광펜 쭉쭉 긋고 넘어가니까 서명한 거죠.”

    11월 30일 기준 주 씨의 예상 손실률은 52%다.

    “지금 생각해보면 석연찮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안전한 상품인데 투자성향분석을 왜 새로 해야 하는지 그땐 몰랐죠. 당시 내 점수가 60점으로 ‘안정추구형’이었거든요. 근데 ELS는 초고위험 상품이고 ‘공격투자형’이 안 나오면 가입시킬 수가 없으니까 다시 하라고 했던 거예요.”

    직원 말에 억대 투자한 고령자 다수

    내년 상반기 홍콩H지수 연계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의 만기가 대거 도래할 예정인 가운데, 은행권이 소비자에게 관련 상품을 불완전판매한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내년 상반기 홍콩H지수 연계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의 만기가 대거 도래할 예정인 가운데, 은행권이 소비자에게 관련 상품을 불완전판매한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홍콩H지수 연계 ELS 가입자 대부분이 이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 “안전한데 수익률이 높다”는 시중은행 직원의 설명을 믿고 상품에 가입했다가 홍콩H지수가 폭락하면서 투자한 돈을 잃게 생긴 것이다. 가입자 중에는 억대를 넣은 고령자가 많아 상황은 더 심각하다.

    홍콩H지수 연계 ELS 가입자는 이 같은 은행권의 상품 판매 과정을 두고 “명백한 불완전판매”라며 성토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 측은 “가입 고객으로부터 제공받은 서명, 녹취가 있는 만큼 불완전판매라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금소법)에 의거한 형식적 요건을 갖췄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은행권은 책임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홍콩H지수 연계 ELS 가입자들의 민원 사례를 통해 시중은행이 상품을 부실 판매한 정황이 속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입자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서는 은행 직원이 원금 손실 가능성을 축소한 것은 물론, 투자성향 조작을 유도했으며, 녹취 시 답변을 지정해주고, 대리 가입을 진행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한 가입자는 11월 28일 “80대 노모가 아들인 내 명의로 홍콩H지수 연계 ELS에 가입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며 “나는 지점에 방문하거나 통화 한 번 한 적 없는데, 본인 위임장 하나 없이 이게 가능한 일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행 금소법은 금융투자사업자가 일반투자자에게 투자를 권유할 때 지켜야 할 6가지 의무(적합성, 적정성, 설명의무, 불공정영업행위금지, 부당권유행위금지, 허위과장광고금지)를 명시하고 있다. 그 중 부당권유행위금지에는 △불확실한 사항에 대해 단정적 판단을 제공하거나 확실하다고 오인하게 할 소지가 있는 내용을 알리는 행위 △금융상품의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알리는 행위 △금융상품의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금융소비자에게 알리지 아니하는 행위 등이 포함돼 있다. 대리 가입의 경우 법률상 판매 계약 자체를 취소할 수도 있는 중대한 부실 판매 행위다.

    금융당국은 홍콩H지수 연계 ELS를 판매한 은행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1월 29일 ‘금감원·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 직후 “최근 일부 은행이 묻기도 전에 무지성으로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가 다 마련됐다고 운운하는데, 소비자를 보호했다기보다 자기 면피를 했다는 얘기로 들린다”며 “판매 과정에서 서명을 받고 녹취한 것 때문에 불완전판매가 아니라는 입장 같은데, 금소법의 본질적 취지를 살펴보면 그런 말을 쉽게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이 원장은 “나조차 잘 안 읽히는 수십 장짜리 상품설명서에 소비자가 ‘네, 네’라고 답변했다고 해서 은행이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감원은 현재 홍콩H지수 연계 ELS 관련 은행권에 대한 전수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복현 “은행들 자기 면피 급급”

    여론이 악화하자 5대 시중은행은 부랴부랴 ELS 판매 중단에 나섰다. NH농협은행이 11월 28일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가 지수 폭락으로 손실 가능성이 예상되면서 원금 손실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품은 판매 리스트에서 아예 제외하기로 했다”며 가장 먼저 판매 중단 사실을 알렸다. KB국민은행은 11월 30일부터 홍콩H지수 연계 ELS 상품 판매를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고, 하나은행은 12월 4일부터 이 같은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지난해부터 홍콩H지수 연계 ELS 판매를 멈춘 상태다.

    홍콩H지수 연계 ELS 가입자들의 피해는 내년 상반기 본격적으로 현실화할 전망이다.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실이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5대 시중은행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판매된 홍콩H지수 연계 ELS 미상환 잔액은 총 15조6168억 원이다. 이 중 8조4100억 원이 내년 상반기(1~6월) 만기를 맞는다. 은행별로는 KB국민은행 4조7726억 원, 신한은행 1조3766억 원, NH농협은행 1조4833억 원, 하나은행 7526억 원, 우리은행 249억 원이 내년 상반기 만기다. 녹인 구간에 진입한 잔액 규모와 현재 홍콩H지수 추이를 고려하면 손실 규모는 3조~4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와 관련해 이복현 원장은 11월 29일 “(금융사와 소비자 간) 어떤 책임 분담 기준을 만드는 게 적절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며 가입자 구제책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상반기 만기 예정액 8조 원

    원칙적으로 금융상품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다. 하지만 판매사가 불완전판매를 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투자금 일부를 보전받을 수 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불완전판매가 명확한 경우 최대 80%까지 책임을 부과한 적이 있다. 라임·옵티머스·헤리티지 등 3개 펀드 사태 때는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 법리를 적용해 투자금 전액을 반환하도록 판매사에 권고했다. 다만 이전에 파생상품 가입 전력이 있는 투자자는 향후 소송 등에서 불리할 수 있다. 2013∼2014년 증권사들이 판매한 원유 파생결합증권(DLS) 손실 사태의 경우 투자자들이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 등을 냈지만 대부분 패소했다. 이유는 원고 상당수가 파생상품 투자 경험이 풍부해 상품 위험도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법원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행법상 불완전판매가 인정될 경우 해당 상품을 판매한 금융사가 최대 80%까지 손실 책임을 지게 돼 있다”며 “가입자들이 속아서 투자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향후 손실이 확정되더라도 구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큰 고위험 파생상품을 증권사도 아닌 은행에서 판매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당국이 홍콩H지수 연계 ELS 관련 은행의 불완전판매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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