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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집권은 美 ‘그레이트 게임’…韓도 체스판 한 축

美, 탈레반이 위구르 독립운동 지원해 中 흔들기 원해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탈레반 집권은 美 ‘그레이트 게임’…韓도 체스판 한 축

2006년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사건 협상에 나선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오른쪽)과 한국 협상 대표. [동아DB]

2006년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사건 협상에 나선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오른쪽)과 한국 협상 대표. [동아DB]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점령하자 한국 정치가 요동치고 있다. 국민의힘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은 미국이 미군을 철수시키자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것에만 주목해, 정의용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문재인 정권이 미국과 북한은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한 저의가 무엇이냐”고 공격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이용선 의원은 6·25전쟁 초기 서울을 떠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탈레반의 진공이 임박하자 카불을 버리고 아랍에미리트(UAE)로 망명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에 빗대어 “도망쳤다”고 해 빈축을 샀다.

CNN “한국, 탈레반과 복교한다”

8월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 이승만 전 대통령을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 빗대어 빈축을 산 더불어민주당 이용선 의원. [뉴시스]

8월 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 이승만 전 대통령을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에 빗대어 빈축을 산 더불어민주당 이용선 의원. [뉴시스]

아프간 문제는 정치적 논쟁이 아닌, 국익 차원에서 살피고 대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탈레반 정권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을지 말지다. 미국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동의하에 미군 철수 및 대사관 폐쇄를 진행했다. 따라서 대사관을 다시 열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 아프간 사태는 미국이 탈레반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혼돈을 정리하려고 만든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대사관을 폐쇄하고 철수했으니 재개도 미국과 같이할 수 있다. 미국 CNN은 “한국은 탈레반 정권의 아프간에 대사관을 열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냥 열 수는 없다. 탈레반 정권과 받을 것은 받고 복교(復交)해야 한다. 미국이 아프간을 상대로 ‘불굴의 자유’ 작전을 펼치던 2007년 7월 19일 버스를 타고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던 한국인 23명(남자 7명, 여자 16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됐다. 그때 한국은 동의(의무)·다산(공병)부대를 파병하고 있었지만, 아프간을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진 않았다. 경기 성남시 샘물교회 소속이던 이들은 선교를 위해 7월 14일 그곳에 들어갔다 붙잡힌 것이다. 이들을 인질로 삼은 탈레반은 한국군 완전 철수와 아프간 정부에 포로로 잡힌 탈레반 23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최종 협상 시한을 22일 07시로 제시했다.

이때 한국은 철군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두 부대를 2007년 말 철수시키려 한다”며 탈레반을 달랬다. 그리고 7월 22일이 무사히 지나갔기에 ‘그린라이트’가 켜졌나 했지만, 탈레반은 25일 배형규 목사, 30일 심성민 목사를 살해했다. 샘물교회는 전혀 대응할 수 없었기에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국정원) 원장이 나섰다. 국민 보호는 정부가 해야 할 고유 임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을 상대한 탈레반은 8월 13일 여성 2명을 석방해 성의를 보이더니 납치 42일 만인 8월 31일 남은 이들을 전부 풀어줬다. 국정원은 공식 확인을 거부했지만, 이 타결을 위해 특수활동비 378억 원을 탈레반에 제공했다고 한다. 이 타결이 있기 직전 우리는 비로소 여권법을 바꿔 여행금지국가 지정을 도입했다.

우리는 북한과 경쟁 때문에 1973년 북한과 함께 아프간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또 1975년 북한과 동시에 카불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하지만 1979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해 공산정권을 세우기 직전 대사관을 폐쇄하고 철수했다. 이로써 아프간이라는 무대를 북한에 빼앗기게 됐다. 1989년 소련은 아프간에서 철수하더니 이듬해 동유럽의 공산당 정권 붕괴와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소(反蘇)세력인 무자헤딘은 공세를 강화해 1992년 카불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새 정부를 세웠다. 이듬해 우리도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2001년 미국이 ‘불굴의 자유’ 작전을 펼치자 우리는 대사관을 폐쇄했고, 미국이 신아프간 정부를 세운 다음인 2002년 9월 다시 대사관을 설치했다.



아프간 외교에는 대북 경쟁 요소 있다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킨 다음인 2003년 2월엔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했다. 아프간 전역이 안정화된 2006년에는 부대를 철수할 계획이었는데 샘물교회 선교단이 탈레반에 붙잡힌 것이다. 우리는 애초 방침대로 2007년 12월 14일 두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탈레반과 약속이기도 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올해 탈레반이 다시 아프간을 접수하자, 우리는 미국을 따라 대사관을 폐쇄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관 철수는 탈레반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제스처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지금 미국은 중국을 가장 큰 적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무슬림 원리주의자인 탈레반이 무슬림이 많은 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독립을 지원할 것이라 보고 탈레반 정권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이를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탈레반 정권과 가까워야 한다. 이번 사태로 미국은 탈레반을 적에서 동지로 전환시켜 반중(反中)전선에 참여시키려 한다. 비유해 말하면 ‘쿼드 플러스’를 하는 것이다.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탈레반 정권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미국에 선수를 빼앗겼다. 중국은 미국의 대전략을 막고자 탈레반 정권과 관계 개선에 전력해야 하는데, 이러한 중국의 반미 노선은 북한 국익과도 일치한다. 북한 역시 1992년 폐쇄한 아프간 대사관을 다시 열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이를 막으면서 먼저 대사관을 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인도주의 원칙 지키면서 책임자 처벌 요구해야

물론 국가의 명예가 있으니 탈레반과 바로 외교할 수는 없다. 응어리를 푼 뒤 복교해야 한다. 풀어야 할 응어리는 첫째, 2007년 샘물교회 목사를 살해한 이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질 석방을 이유로 돈을 받아간 것은 국제범죄이니 그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 최빈국 아프간이 돈을 내놓을 가능성이 낮다면 책임자 처벌과 사과라도 받아내고 그 돈은 미리 원조한 것으로 전환하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셋째는 아프간에서 우리에게 협력한 사람 가운데 원하는 이는 안전하게 빼내는 것이다. 이들은 탈레반 정권에서 탄압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는데 391명을 한국에 입국시켰다. 넷째는 취업이나 학업 등을 위해 한국에 와 있는 아프간인 200여 명의 체류비자를 연장해주는 일이다. 비자가 만료돼 아프간으로 돌아간다면 이들도 처벌받을 공산이 매우 크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를 미리 막는 것이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행정사회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옛 출입국관리국)를 상대로 주한 아프간인 비자 연장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김 회장은 “민주국가로서 우리는 탈레반 정권에 의해 탄압받는 아프간인은 보호하고, 우리 국민을 살해하고 돈을 받아간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과를 받은 후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프간 문제를 정쟁 소재로 쓰지 말고 국익을 증대하는 요소로 활용하라는 주문이다. 아프간 사태는 국익 앞에선 어제의 적도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한민국 명예는 반드시 지키면서 외교를 해야 한다.

對아프간 외교 반면교사… 김선일 참수 사건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이 일어났다. [‘알자지라’ TV 방송화면 캡처]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이 일어났다. [‘알자지라’ TV 방송화면 캡처]

탈레반이 이끌게 된 아프가니스탄과 복교할 때 참고해야 할 것이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을 겪은 후 이라크와 다시 외교관계를 맺게 된 과정이다.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자유’ 작전을 감행한 미군은 개전 두 달도 안 된 5월 1일 이라크군을 전멸시키고 이라크 전역을 석권했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전투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자 알카에다와 궤를 같이하는 무슬림 세력이 이라크 주민들과 섞인 상태로 게릴라 투쟁에 나섰다. 미군은 이들을 제압하는 데 애를 먹었다. 동맹국에 참전을 요청했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호응했다. 2003년 4월 2일 국회가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을 통과시키자 노무현 정권은 바로 의료지원단 ‘제마’와 건설지원단 ‘서희부대’를 파병했다. 그리고 2004년 2월 23일 특전사 여단을 모태로 한 8000명 규모의 전투부대 ‘자이툰 사단’을 창설해 추가 파병에 들어갔다. 그때 김선일 씨 참수 사건이 일어났다.

2004년 6월 21일 새벽 5시 10분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2인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끄는 것으로 보이는 세력에게 납치된 한국인 김선일(1971년생, 당시 33) 씨가 이라크 팔루자에서 무장 3인조에 둘러싸인 채 영어로 “살고 싶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 한국은 이라크에 파병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모습과 납치세력이 “철군 요구를 한국이 24시간 안에 들어주지 않으면 김씨를 참수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장면을 2분간 방송했다. 당시 우리는 여행금지국가 제도가 없었다. 가나무역은 팔루자에 진출해 인근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 식자재를 납품했는데, 한국이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하자 저항세력은 직원인 김씨를 표적으로 삼아 납치했다.

한국 측 답변이 없자 이들은 다음 날인 6월 22일 김씨를 참수했다. 알자지라는 복면 5인조에 둘러싸인 김씨 모습을 보여준 뒤 “김씨가 참수됐다. 참수한 이들은 ‘알타우히드 왈지하드(유일신과 성전)’ 소속”이라고 보도했다. 잠시 뒤 신봉길 외교부 대변인은 “이라크 시간으로 6월 22일 17시 20분 바그다드로부터 팔루자 방향 35㎞ 지역에서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다고 미군이 우리 군에 연락해왔다. 이라크 주재 우리 대사관은 피살(참수)된 김선일 씨의 사진을 e메일로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은 속수무책이었지만 자이툰 부대를 파병했다. 테러세력에게 밀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이라크 외교관계는 한국-아프간 외교관계 이상으로 국제정치에 따라 출렁거렸다. 1963년 우리는 이라크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이라크에 총영사관을 설치한 것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출범(1979)한 다음인 1981년이다. 대사관을 설치한 것은 이란-이라크전쟁이 끝난(1988) 이듬해인 1989년이다. 이 시기 우리는 이라크에 근로자를 보내 적잖은 오일머니를 벌어들였다. 가나무역 관계자 역시 이 경험이 있었기에 ‘이라크 자유 작전’ 때 이라크에 들어가 미군 부대에 식자재를 보급하는 사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 8월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이에 맞서 이듬해 초 미국이 1차 걸프전을 펼치자 우리는 이라크 공관을 폐쇄했다. 그리고 ‘이라크 자유 작전’으로 미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신이라크 정부를 세운 다음인 2003년 5월 17일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이때 우리는 신이라크 정부측에 김씨 참수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신이라크 정부가 알타우히드 왈지하드와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라크가 안정화되자 한화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진출해 전후 특수를 누렸다.

미국은 2011년 이라크에서 완전 철수했다. 당시 이라크는 아프간과 같은 급변을 겪지 않았다.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같은 저항세력이 생겨났지만 신이라크 정부를 뒤집진 못했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한 아프간에서는 가니에서 탈레반으로 급격한 ‘정권교체(regime change)’가 일어났다. 이 교체는 미국이 미국에 맞서온 탈레반을 아프간 새 주인으로 삼아 중국을 흔들려는 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한 복교와 탈레반 정권을 대상으로 한 복교는 이렇게 같고 다른 점이 있다.





주간동아 1304호 (p4~7)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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