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5

2014.07.07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있나

3色 엘리트 드라마

  • 배선영 텐아시아 기자 sypova@tenasia.co.kr

    입력2014-07-07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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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있나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한 정치 엘리트들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정치인상을 고민하게 한 KBS 드라마 ‘정도전’.

    6월 안방극장에는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6월 29일 50회로 종영한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은 여말선초 혼란스러운 시기 위민정치의 꿈을 품고 새 나라를 건국한 정도전(조재현)과 조선 1대 왕 이성계(유동근), 그리고 이인임(박영규), 정몽주(임호), 이방원(안재모) 등 역사 속 정치 엘리트들을 깊숙이 들여다본 드라마다. 역시 6월 종영한 MBC 드라마 ‘개과천선’은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김석주(김명민)를 비롯한 법조계 엘리트에 대해 이야기했고, KBS 2TV ‘골든크로스’는 경제 관료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 분야 소수 엘리트의 숨겨진 실체를 다뤘다.

    엘리트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에는 통상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가거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를 말한다.

    많은 사건 사고로 유독 어지러웠던 2014년 상반기, 사회 구성원이 각자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가 엘리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엘리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도전’에는 주인공 정도전을 비롯해 다양한 역사 속 실존 인물이 등장했다. 이들을 비교해봄으로써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돌아볼 수 있었다. 먼저 고려 권세가 이인임은 오랜 기간 권력의 맛을 보며 고려를 곧 자신으로 정의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 곧 고려의 안위라 생각한 이인임의 독선은 이런 세계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치엔 선물이라는 게 없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주는 뇌물만 있을 뿐” 등 이인임의 입에서 나온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정치관은 스스로는 노련함이라 변명하겠지만, 실은 타락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이인임은 현실과 쉽사리 타협한 정치 엘리트의 비겁한 맨얼굴을 볼 수 있게 해줬다.

    어지러운 시대 지도층 역할과 책임



    아버지의 형제와도 같은 정몽주나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의 친형제도 피바람 속에 몰아넣은 뒤 왕좌를 가로챈 이방원은 야망과 야욕에 지배당한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려 충신’으로 기억되는 정몽주를 통해 시청자는 이들과는 반대 지점에 선 엘리트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우직한 충정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마음 역시 보는 이의 가슴을 울렸다.

    이인임의 간교한 노림수에도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은 정도전에게서는 자신이 품은 이상을 실현하고자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젊은 엘리트의 기개를 봤다. 정몽주를 믿고 따르며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다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뒤에도 진심과 열성을 다해 소통하려고 애쓰는 이성계를 통해서는 고매한 인격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적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하고 헐뜯기 바쁘거나 초심을 잃고 권력만 좇는 오늘날 정치인의 모습과 다른 이들이 곧 이상적 정치 엘리트들이다.

    권력과 유착해 타락한 변호사 김석주가 기억상실을 기점으로 과거 자신이 저지른 일들의 무게를 깨닫고 사회적 책임을 느끼는 내용을 담은 드라마 ‘개과천선’은 좀 더 직접적으로 엘리트의 비도덕성을 겨냥한 메시지를 드러냈다(관련 기사 74쪽 참조).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있나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해 법조계 엘리트의 실상을 다룬 MBC 드라마 ‘개과천선’(왼쪽). 사회 각 분야 엘리트가 모여 조직한 비밀 클럽 골든크로스를 통해 우리 사회 엘리트의 뒷모습을 보여준 KBS 드라마 ‘골든크로스’.

    ‘골든크로스’는 제목 자체가 한국 상위 0.001%의 비밀 클럽이라는 뜻이다. 사회 각 분야 엘리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세습하고자 똘똘 뭉친 조직이다. 그 조직의 일원인 서동하(정보석)는 경제부총리에 지명되기까지 한 인물이지만, 그에게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이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성상납과 살인이라는 흉악한 범죄를 손쉽게 은폐하며 권력을 남용하고 자신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 앞에서는 굽실거리는 행태를 보였다. 펀드매니저 마이클 장(엄기준)은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잔인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졌다. 윤리 의식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엘리트들의 추악한 이면을 확인하게 한 드라마였다.

    이들 세 드라마는 인터넷 세상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대중이 공감했다는 것은 허구의 이야기에서 현실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비교적 긴 호흡의 50부작 ‘정도전’의 경우 백성과 나라를 위한 이상 실현이라는 책임 의식으로 분투하는 정도전의 모습, 그리고 노선이 다를지언정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이성계와 정몽주의 인격이 시청자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는 점에서 600년 전이나 현재나 여전히 유용한 이상적인 엘리트상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허구에서 적나라한 현실 반영

    ‘개과천선’이나 ‘골든크로스’는 직접적으로 오늘날 엘리트의 책임감 부재나 윤리 의식 부재를 꼬집었다. 정의로운 인물이 승리하고 타락한 기득권층이 몰락하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통해 시청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이들 드라마를 통해 ‘엘리트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 역시 다시 해보게 됐다. 과거엔 학벌이나 지적 수준 등이 엘리트를 규정하는 절대적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책임 의식이나 윤리 의식 역시 엘리트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3편의 드라마는 그렇게 우리 사회가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유 하나로 정의나 윤리보다 욕심과 야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지는 않았는지 한 번쯤 되새겨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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