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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 서울 장위동 봉제공장촌의 겨울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과거 영광과 대박은 이미 전설… 공장도 기술자도 속절없이 한숨뿐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오진환(가명) 사장과 공장 직원들이 봉제공장 안 난로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 성북구 장위동 일대. ‘모자 재단’ ‘아르망’ 등 건물 곳곳에 걸린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북구는 서울에서 종로구, 중랑구에 이어 세 번째로 봉제공장이 많이 밀집한 지역이다. 특히 장위동은 1970~80년대 세 집 건너 한 집이 스웨터를 짜는 공장이라 할 정도로 스웨터 편직 봉제공장이 많았다.

2월 3일 오후 기자가 찾은 장위동 거리는 조용했다. ‘봉제공장이 많았던 과거 장위동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곳 첫인상은 평화롭기보다 이상했다. 공장이 한창 돌아갈 시간이었는데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일명 ‘판치카’라 부르는 실 짜는 기계 소리는커녕 징징 울리는 재봉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공장 간판을 둘러봐도 ‘스웨터 전문’이란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발버둥쳐도 일당 안 나와

봉제공장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봉제공장 사람들이 일이 끝나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아지트였다. 돌곶이로41길 사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색이 다 바랜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니코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한 담배냄새의 주인공은 스웨터 편직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오진환(60·가명) 사장이었다. 오씨는 지인과 함께 나물반찬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는 이게 전부예요.”라는 질문에 오씨는 “돈이 없당께”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20년 전부터 장위동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해온 오씨. 그는 19세 때 고향 전주에 있는 한 봉제공장에서 일을 처음 배웠다고 한다.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 봉제 기술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오씨가 기술을 배우던 1970년대만 해도 봉제공장은 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공무원(월급)은 게임도 안 됐어. 그때 공무원 월급이 1만 원이었는데 우리는 한 달에 2배는 벌었으니께. 2만 원은 넘게 벌었지.”

1980년대 2차 오일쇼크 여파로 전주 봉제공장이 파산했고, 90년대 서울에 공장을 열었을 땐 자동화 물결이 일었다. 오씨는 기계를 살 여력이 안 돼 수작업을 유지했다. 자연히 대량 주문은 자동화된 공장에 빼앗겼고, 오씨 봉제공장에서는 소량 주문을 받아 물건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 같은 경우는 (한 번 주문이 들어오면) 보통 물량이 100장 이하야. 조그마한 가게에서 받아서 하는 거지. 소량으로 짜면 아무래도 남는 게 덜하지. (대량으로 할 때보다) 실값이 비싸니께.”

봉제용 실은 종류별로 가격이 다르지만 3년 전에 비해 배 이상 상승했다. 원재료값은 상승했지만 납품단가는 20년째 변함없다. 오씨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1월까지 300만~400만 원을 벌었다. 이를 5명이 나누면 월세 내기도 빠듯하다. 결국 그는 10년 동안 살던 집에서 나와 지금은 지인 집에 머물고 있다. 일용직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2011년 여름 오씨는 제철소에서 일당 8만 원을 받으며 일했다.

“일하면 나도 술 안 먹고 (일하니) 걱정도 안 할 텐데…. 어저께 한숨도 못 잤어.”

경영 악화는 오씨만의 일이 아니다. 다음 날 식당에서 만난 김영애(67) 씨 역시 1976년 편직 봉제공장을 시작했지만 90년대 파산했다. 서울 수유리에서 공장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매일 일감이 1000장 이상 들어왔다. 직원들과 수입을 나누고, 월세를 내도 김씨 손에 매달 70만~80만 원이 쥐어졌다. 그때 번 돈으로 김씨는 두 자녀를 학교에 보냈다. 90년 초반 인건비가 급격히 오르면서 공장 사정이 어려워졌다.

인건비 상승과 스웨터 공장의 파산

“옛날엔 1000원을 3명이 나누면 직원 2명이 300원씩 받고, 내가 400원을 가졌지. 한데 점점 반대로 가는 거야. 나중엔 직원이 더 많이 가져갔어요.”

인건비가 싼 해외 공장으로 일감이 몰렸고, 김씨는 공장 문을 닫았다. 그러자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쌀이 없어 밥 먹기가 힘들었어요. 김장할 때 보통 배추 겉잎은 버리잖아요. 그거 구해서 김장하고 그랬어요.”

생활비를 벌고자 김씨는 남편과 택시를 닦았다. 한 대에 200원. 끼니를 거르며 하루에 택시 100대를 닦았다. 이후 김씨는 식당을 전전하다 여성복 전문 봉제공장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봉제공장의 몰락은 장위동 한 지역의 얘기가 아니다. 전국적으로 1993년 4만2000개에 달하던 봉제공장이 2011년 기준 2만3507개로 줄었다. 경영 악화로 문을 닫은 것이다.

반면, 해외 공장에 대한 의존도는 1993년부터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의류 수출은 93년 61억6600만 달러에서 2012년 19억1300만 달러로 감소한 반면, 수입은 같은 기간 3억6000만 달러에서 62억6800만 달러로 17배 이상 증가했다. 인건비가 싼 해외로 공장들이 옮겨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노양호 서울북부섬유봉제협회장은 봉제공장의 급감과 관련해 “중국, 미얀마 등 인건비가 싼 해외로 (공장이) 이전해 국내에 일감이 감소해서”라고 말했다.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한 봉제공장 내부. 일이 없어 회사기(실을 감는 기계)에 실이 걸려 있지 않다(왼쪽). 점심시간인데도 장위동 한 식당에서 봉제공장 직원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봉제공장 몰락의 또 다른 원인은 원재료값 상승이다. 오씨 말처럼 원재료값은 상승한 반면, 납품단가는 하락했다. 수익성이 악화할 수밖에 없었고, 봉제공장은 망하거나 해외로 옮겨갔다. 실제 한국섬유개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원재료값의 경우 2012년 6월 기준으로 전년에 비해 폴리에스테르직물은 2.2%, 면직물은 13%, 나일론과 복합교직물은 20% 이상 증가한 반면, 2013년 국내 봉제공장 가운데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받은 곳은 43.2%에 달했다.

봉제공장이 몰락하면서 사장도 힘들어졌지만 전문직 근로자도 말 못 할 고초를 겪고 있다.

“힘들어 죽은 사람 많아. 이혼도 하고.”

김씨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봉제공장 사장 송영만(53·가명) 씨는 봉제공장 노동자의 어려움을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장위동에는 스웨터 편직 봉제공장이 사라진 후 ‘메리야스뜨기(니트)’ 원단으로 옷을 만드는 일명 ‘다이마루’ 봉제공장이 늘어났다. 송씨가 운영하는 여성복 전문 봉제공장 역시 주로 국내에 물건을 납품하는 다이마루 업체다.

망하거나 해외로 가거나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서울 장위동 한 봉제공장 안에서 직원이 횡평기로 옷을 짜고 있다.

송씨에 따르면 2년 전까지만 해도 다이마루 봉제공장에 비수기는 없었다. 바쁠 땐 하루에 주문이 5000벌 가까이 들어왔지만 지금은 절반으로 줄었다. 가격 경쟁에서 해외 공장에 밀린 탓도 있지만 불경기 여파로 의류 소비가 줄면서 시장 주문량도 줄었다. 1인당 평균 150만 원 월급을 주고 나면 송씨 수중에 남는 돈이 별로 없다.

저녁 7시 장위동 거리를 걸으며 주위 봉제공장을 살펴봤지만 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공장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와 거리를 환하게 비추던 그곳. 하지만 2014년 1월 장위동 밤길은 캄캄했고 조용했다.

김왕시 한국의류산업협회 산업진흥팀 부장은 “오씨나 김씨처럼 의류제조업 분야 노동자는 서민이다. 봉제공장이 어렵다는 건 곧 서민 생계 역시 위태롭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열약한 근무 환경은 젊은 인력이 봉제업을 기피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현재 국내 봉제공장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49.8세다. 이들이 퇴직하면 사업을 승계할 사람이 없는 공장도 많다. 2013년 기준 국내 봉제공장의 57.9%가 마땅히 승계 대상이 없다. 패션산업의 ‘생산’을 담당하는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이다.

2월 5일 오후 오씨 공장을 다시 찾았다. 실제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기 위해서다. 공장은 3층짜리 건물 지하에 있었다. 100㎡ 남짓한 공간. 난로 주위에 오씨와 공장 직원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장 한쪽엔 실이 쌓였고, 횡평기(실로 옷을 짜는 기계)엔 먼지가 수북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 내부에선 쾌쾌한 담배냄새가 진동했다. 오씨 옆에 있던 직원 이경미(54·가명) 씨가 말했다.

“원래 회사기(실을 감는 기계)에도 실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봐, 하나도 없잖아. 일이 없으니께.”

패션산업 한 축이 무너져

사흘간 장위동 취재를 마치고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 거리 곳곳엔 구인 전단지가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붙어 있었다. ‘시다 ○명, 미싱사 ○명.’ 전단지를 보니 문득 송씨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가 더 문제야. 젊은 사람이 없으니깐. 요새 대학 나온 누가 기술 배우려고 해. 뒤(미래)가 없어.”

의류제조업 몰락은 한국 패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김왕시 부장은 “아무리 훌륭한 디자인도 생산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의류제조업이 몰락하면 그 많은 주문 물량을 어떻게 맞출 건가”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와 고용노동부에선 작업 환경 개선, 기계 임대, 고용 지원 등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했지만 실제 혜택을 받는 공장은 드물다.

모든 혜택은 사업자등록을 한 업체가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는데, 2013년 기준 국내 사업자등록을 한 업체는 56.7%밖에 안 된다. 결국 절반이 넘는 업체는 혜택에서 제외되는 셈이다. 설령 혜택을 받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대다수 봉제공장이 임가공에 의존하는 한 해외 공장과의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김왕시 부장은 “근본적으로 기존 임가공 중심의 사업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디자이너와의 연계를 강화해 자기 브랜드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터뷰 | 도시형 소공인 지원법 발의 전순옥 민주당 의원

“몰락하는 의류제조업 기술력 살려내야”


차갑게 식는 ‘패션 한국의 손발’
서울 성북구 장위동 봉제공장의 잇따른 파산은 의류제조업 전체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산’ 축이 무너지면 한국 패션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봉제공장을 살릴 수 있을까. 봉제공장의 산증인이자 지난해 12월 도시형 소공인 지원법을 대표 발의한 전순옥 민주당 의원(사진)에게 그 답을 물었다. 다음은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

도시형 소공인 지원법을 만든 동기는 무엇인가.

“2001년부터 봉제공장이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고민해왔다. 현장(서울 창신동)에 나가 보니 경쟁력이 분명 있었다. 우리나라 의류산업은 노하우나 인프라가 많다. 기술자들이 쌓아온 노하우로 지금까지 봉제공장을 꾸려온 것이다. 또 현장에 가면 기술에 대한 노동자의 자긍심이 느껴졌다. 일하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 봉제공장의 미래도 충분히 밝다고 생각한다.”

도시형 소공인 지원법이 시행되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도시형 소공인 지원법은 50개 이상 공장이 있는 지역을 집적화해 지방자치단체(지자체)와 중앙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한다. 또한 봉제공장이 대부분 5인 이하의 영세 규모라서 스스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힘들다. 그래서 함께 생산하고 공동 브랜드와 매장을 만들도록 지원한다. 또 중소기업청장이 도시형 소공인을 양성하고 숙련 기술 지원 사업도 추진할 수 있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책(기계 임대, 작업 환경 개선 등)이 실질적으로 봉제공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정말 도움을 받아야 할 현장은 현실적으로 도움을 못 받고 있다. 안전보건공단에선 작업 환경을 개선해주는 사업을 하지만 지원받는 곳은 1년에 10곳도 안 된다. 서울시에서 신용대출을 해줘도 신용 담보가 없으면 받을 수 없다. 현장 직원들이 어떤 지원제도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중소기업청에 소상공인을 위한 예산이 있지만 현장 근로자는 이를 알지 못한다. 정보를 현장에 잘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업자등록이 없어 정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공장도 많다. 이들을 양성화할 방안은.

“사업자등록을 안 내는 이유는 주로 세금 때문이다. 사실 매출 8000만 원 이하 작은 규모의 공장은 보통 간이계산서를 떼는 정도로 세금이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부터 현장에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봉제공장을 살릴 근본 대안이 있다면.

“‘메이드 인 코리아’ 브랜드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요즘 한류 열풍이 불고 한국 브랜드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봉제공장이 지금까진 서울 동대문이나 남대문 등 저가시장에 물건을 납품해왔다면 이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마케팅과 디자인을 지원해야 한다. 체계적으로 기술을 제고하는 노력 역시 중요하다. 최소한 동대문에 오는 관광객이라도 잡아야 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 프리미엄 상가를 만들어 물품을 납품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간동아 2014.02.17 925호 (p44~47)

  • 오소영 동아일보 인턴기자, 한양대 교육공학과 졸업 pangky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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