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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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책임투자 선도 부탁해

착한 투자로 기업의 사회적책임 독려 위해 법개정 추진

  •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argos68@naver.com

    입력2013-07-15 09: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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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연금’ 책임투자 선도 부탁해

    7월 2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연금기금의 책임투자 토론회에서 발표자들이 발표하고 있다.

    돈은 투자 행위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엔진과 윤활유 구실을 한다. 그래서 돈을 소유하거나 위탁받아 운용하는 기관들이 어떤 투자 철학과 방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사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영화 ‘스파이더맨’의 명대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기본적 명제를 종종 망각하거나 심지어 쓰레기통에 구겨 넣어버린다.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그런 무책임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의 터널 속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사건이다.

    미국의 대표적 사회책임투자(SRI) 지수인 ‘도미니 사회지수 400’(DSI400)을 창안한 에이미 도미니도 세상이 이토록 궁색해진 것은 투자자들이 책임감을 갖지 않아서라고 통렬히 비판하면서, 투자를 바람직한 가치와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사회책임투자 혹은 책임투자(RI)는 바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탄생한 투자 철학이자 방법이다.

    국민연금은 스파이더맨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은 투자계의 스파이더맨이다. 2013년 3월 기준 기금 405조9000억 원을 운용하며, 일본과 노르웨이의 공적연금인 GPIF와 GPF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를 자랑한다. 내년 말 기금 규모는 482조4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주식투자에 111조1000억 원(국내 75조6000억 원), 채권투자에 260조 원(국내 채권 240조9000억 원), 대체투자에 34조3000억 원을 배분했다. 2018년까지는 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을 각각 30%와 10%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세계 금융기관들은 국민연금 자산을 운용하고 싶어 하고 기업들은 투자를 받고 싶어 한다. 대통령이 가는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글로벌 금융기관 수장들이 국민연금 이사장이 가면 나타난다는 말은 국민연금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국민연금이 어떤 투자 철학을 가지고 어떤 투자 전략을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국민연금 수익률을 넘어 투자 대상인 기업, 더 나아가 국민 경제, 사회 변화와 연동돼 있다.

    사실 국민연금은 한국에서 사회책임투자를 선도해왔다. 2006년 최초로 사회책임투자 방식으로 기금 일부를 자산운용사에 위탁운용하면서 3월 말 현재 5조5390억 원을 투자한다. 연기금과 공모펀드 등을 포함한 사회책임투자 시장 전체 규모인 7조5000여억 원의 73% 이상이 국민연금기금이다. 국민연금은 ‘2012 국민연금 기금운용 보고서 개정판’을 통해 사회책임투자 규모를 더욱 확대해 금융시장과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책임투자 선도 부탁해

    국민연금기금의 책임투자 토론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발표자들의 토론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

    또 ‘2012 국민연금 사회책임경영 보고서’에서는 내외부 이해관계자 모두 사회책임투자 확대를 공단의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국민연금은 이미 2009년 12월 의결권 행사 지침에 사회책임투자 요소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고려한다는 원칙을 명시하고 올해 3월 책임투자팀도 신설해 사회책임투자 확대를 위한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다. 7월 10일 현재 2000개 기관이 가입한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에 국민연금도 2009년 7월 서명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양적·질적 측면에서 노르웨이 GPF, 네덜란드 ABP, 미국 캘리포니아 공공근로자연금(CalPERS) 등 선진국 연기금에 비해 부족하다. 또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기반도 미비하다.

    7월 2일 이목희 민주당 의원이 주최하고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유엔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가 공동 주관한 ‘국민연금기금의 책임투자와 공시 법제화를 위한 대토론회’는 책임투자와 관련해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자리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법 제102조(기금의 관리 및 운용)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을 관리 및 운용하는 경우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요소 등을 고려할 수 있고,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각 요소의 고려 여부와 고려 정도를, 그리고 만일 고려하지 않는 경우 그 합리적인 이유에 대해 공시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이 의원은 이날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민연금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책임투자 선도 부탁해
    따르거나 아니면 설명하라

    사실 이 의원의 법안은 직접적으로 책임투자를 강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민연금기금을 운용할 때 책임투자 고려 요소인 ESG 관련 내용을 공시하자는 것이다. 즉 모범 기준을 ‘따르거나(comply)’ 아니면 이유를 ‘설명하라(explain)’는 내용의 법안인 셈이다. 이 의원은 “규모 확대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사회책임투자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법으로 공시의무를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법안은 사회책임투자뿐 아니라 전체 자산 운용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려는 인프라적 성격이 강하다. 2009년에도 이와 유사한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초기라는 점과 추진 주체의 여건 미비 등으로 무산된 바 있다.

    양성일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국장은 “기금 운용 시 책임투자를 고려하는 방향은 긍정적이며, 이를 통해 국민연금의 안정적 수익을 달성하고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국내 자본시장이 선진국에 비해 미성숙 단계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ESG 공시 관련법을 수용하지 못할 만큼 미성숙 상태는 아니라는 점을 정부도 인식하는 것이다.

    해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2000년 7월 발효한 영국의 개정연금법이 대표적이다. 종목 선정, 보유, 투자 이익 실현 등에서 수탁자(기금운용자)가 어느 정도로 환경적·사회적·윤리적 측면을 고려하는가, 그리고 투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권리 행사(의결권 행사 포함)와 관련된 정책이 있는가 등에 대해 공시하라는 내용이 이 법안의 골자다. 이 의원의 법안은 영국의 개정연금법과 흡사하다.

    프랑스의 파블뢰법(2001년 2월)과 독일의 아일제르그(2002년 2월)도 연금제도가 환경적·사회적·윤리적 측면을 고려해 투자하는지에 대한 공시를 의무화한다. 호주에서는 연기금펀드 등 투자 상품 제공자가 상품설명서에 노동기준, 환경, 사회, 윤리적 고려사항이 투자 선택, 유지, 취득에 어느 정도 고려되는지 공시할 것을 재정서비스법(2002)에 명시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금융 선진국을 중심으로 책임투자 관련 공시를 의무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기도 하다.

    국민연금은 수익성, 안정성, 공공성, 유동성, 운영 독립성이라는 다섯 가지 원칙에 근거해 기금을 운용한다. 특히 국민의 노후 보장을 위한 기금이라는 점 때문에 고갈 우려와 함께 수익성, 안정성이 초미 관심사다. 그러면서도 다수 국민의 돈으로 형성된 기금이라는 점 때문에 공공성 또한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될 원칙이다. 사회책임투자는 국민연금의 전체 기금운용 원칙에 위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투자 철학이자 방법이다. 투자 대상 기업의 재무적 성과와 ESG 성과를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기업의 보이지 않는 위험을 예방하고 기회를 통찰함으로써 많은 투자 수익을 장기적으로 올릴 수 있다.

    사실 재무와 비재무, 시장과 비시장의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다. 남양유업 사태는 왜 기업이 사회적책임(CSR)을 다해야 하며, 왜 투자자는 그런 기업에 투자해서는 안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책임투자의 부산물은 놀랍게도 지속가능한 사회 만들기에 대한 기여다.

    ‘국민연금’ 책임투자 선도 부탁해

    미국 캘리포니아 공공근로자연금(CalPERS) 본사.

    수익성, 안정성, 공공성 세 마리 토끼 잡기

    사실 국민연금기금을 운용할 때 ESG 요소를 고려하고 이를 공시토록 하는 것은 사회책임투자를 활성화하는 출발점이다. 이런 기초적인 공시를 외면하고 사회책임투자 활성화를 논한다는 건 허공 위에 성을 구축하는 일과 같다. 이 법안은 단순한 공시 규정이지만 엄청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먼저 국민연금기금 운용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면서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수익성 및 공공성을 보장하고 더 나아가 자본시장 전체의 투명성 제고에도 기여한다. 또한 기업 가치를 높여야 하는 장기투자 기관의 특성상 신의 성실한 수탁자의 책무에도 부합한다. 또 가장 시장친화적으로 사회적책임을 독려함으로써 경제민주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지난해 6월 기준으로 국내 전체 상장기업 가운데 567개 기업에 투자하고 있으며, 그중 182개 기업은 지분율 5% 이상이다. 또한 해마다 주식투자 비중을 늘린다. 국민연금은 사회책임투자를 주식만이 아니라 채권과 부동산 등 대체투자에도 단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사회적책임을 더욱 빠르게 정착할 수 있다. 도미니의 사회책임투자 홈페이지(www.dominiadvisor.com)에는 아래와 같은 불가사리 이야기가 올라와 있다.

    “불가사리 수천 마리가 해변으로 쓸려 올라왔다. 한 어린 소녀가 불가사리를 살리려고 바다로 다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애쓰지 마라.’ 소녀의 엄마가 말했다. ‘그래봐야 달라질 게 없단다.’ 소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 손에 든 불가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불가사리는 살릴 수 있어요.’”

    국민연금은 기금 운용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ESG 고려 여부와 그 정도에 대한 공시 그 자체만으로도 이 소녀보다 더 많은 불가사리를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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