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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사이판·팔라우 현지 취재-위안부 그 생생한 증거들 02

태우고 없애고 은폐하고 ‘강제 연행 증거 대라’는 뻔뻔함

일본 국제법 위반 논란 피하려 위안부 강제 동원 조직적 대응

  • 윤명숙 강원대 강사·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한일관계사, 일본 근현대사 전공)

태우고 없애고 은폐하고 ‘강제 연행 증거 대라’는 뻔뻔함

태우고 없애고 은폐하고 ‘강제 연행 증거 대라’는 뻔뻔함

전선이 이동해 일본군 트럭에 실려가는 위안부들.

“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왔다는 증거가 없다.”

‘오사카 유신회’라는 정치단체 대표이자,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하시모토 도루(43) 오사카 시장이 8월 24일 한 발언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강제성을 부정하는 일본 정치인의 발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군위안부가 국가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끊임없이 주장해온 내용이다. 군위안부는 ‘공창’이라거나 ‘상행위’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위안부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온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온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니 표현만 다를 뿐 결국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하시모토 시장은 강제 연행의 증거(문헌자료)가 없으니 강제성을 주장하는 한국에서 그 증거를 내놓으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네덜란드인 피해자의 경우 군이 강제 연행했다는 문헌자료가 남아 있다. 같은 식민지였던 대만총독부의 문헌자료(이송과 관련한 자료이긴 하지만)도 있다. 그렇다면 왜 조선총독부 문헌자료는 없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은 내놓기가 간단치 않다. 현실이 그만큼 복잡하게 꼬여 있기 때문이다. 먼저 조선총독부 자료는 일제 패망 직후 일본과 조선에서 몇 날 며칠에 걸쳐 소각됐다. 그나마 남은 자료 가운데 일부가 현재 공개한 자료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 정부가 은폐하는 자료가 적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내무성(경찰) 자료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내무성 후신인 총무성과 후생노동성, 경찰청, 국토교통성 등의 자료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가 두 차례에 걸친 정부 조사 때 적당히 정리하고 넘길 수 있는 내용만 발표하고 핵심 자료는 오히려 꽁꽁 숨겨둔 게 아닌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조선에선 국제법 위반 단속 안 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위안부를 강제 동원할 때 고의적으로 행정자료를 남기지 않았을 개연성도 높다. 여러 자료에 근거할 때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법을 위반해 논란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꺼렸던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국제사회에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일본 정부가 당시 어떻게 군위안소제도를 주도했으며, 또 그 사실을 은폐하고자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문헌자료가 있다. 먼저 1938년 2월 23일 발표한 내무성 통첩(내무성 경보국장 ‘지나 도항 부녀의 단속에 관한 건’)과 같은 해 3월 4일 육군성 통첩(육군성 병무국 병무과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 그것이다. 국제법 허용 조건을 전제로 일본 정부가 군위안부 징모를 허가하는 내용인 만큼 일본 정부가 군위안소제도를 주도했다는 증거가 된다.

내무성 통첩에서는 위안부 모집 대상을 21세 이상 ‘매춘’ 경험이 있는 자로 한정하고, 경찰은 부녀 매매 또는 약취 유괴 같은 형태로 ‘모집’하지 않도록 단속업무를 강화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국제법의 ‘부인 및 아동 매춘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에서 언급하는 연령 제한 및 일반 부녀에 대한 인신매매나 약취 유괴 등의 금지에 대해 인지하고, 국제법 위반 방지를 위해 노력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더해 육군성 통첩은 위안부 징모업자와 일반 소개업자를 엄격히 구별했으며, 군을 사칭하는 일반 소개업자의 위안부 징모(徵募·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음)를 엄하게 단속할 것과 징모할 때 해당 지역 경찰, 헌병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실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한 경찰 단속이 일본 내로 한정되고 조선에는 발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통첩에 따르면, 일본 내에서는 업자가 경찰, 헌병과 연계해 징모를 한다. 이 업자는 군이 선정한 업자여야 하며,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으로 징모해야 한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내무성 통첩이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군이 선정한 업자가 경찰, 헌병과 연계해 징모를 하면서도 업자가 고용한 일반 소개업자가 국제법을 위반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동원한다 해도 단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식민지 경찰은 업자의 위안부 징모에 협력하면서도 불법 행위에 대해 전혀 단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식민지 조선에서 위안부 동원 형태가 대부분 인신매매와 취업 사기였던 배경이다.

1938년 11월 8일 내무성 경보국 자료(‘남지 방면 도항 부녀의 단속에 관한 건’)는 일본 정부가 일본 내 위안부 징모에 어떻게 관여했으며, 국제법을 어떻게 의식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자료에서 몇 가지 사실을 추리면 내무성은 각 지역 경찰이 징모업자를 선정하되, 업자로 하여금 경찰과 연관 있다는 사실을 숨기도록 지시했다. 위안소 경영을 희망하는 업자는 경영자의 주소, 이름, 경력 및 인솔 부녀 수를 ‘은밀히’ 전화 등으로 내무성에 통보하도록 규정했다. 경찰이 위안부 징모에 적극 관여하면서도 그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한 것이다.

“은밀히 내무성에 통보하라”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일본 내에서도 일부 권력층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민간업자들이 위안부를 모집한 것으로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식민지에서는 위안부 징모 관련 불법 행위에 대한 단속 지침조차 내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위법, 불법 행위가 성행했을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이는 자료뿐 아니라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1942년 1월 10일과 13일 대만총독부의 미네타니 데라오 외사부장과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 주고받은 외무성 자료(‘남방 방면 점령지에서의 위안소 개설에 관한 건’ ‘남방방면 점령지에 대한 위안부 도항 방법 건’) 또한 일본 정부가 국제법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발발 후 군위안소 설치가 남방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남방으로 도항할 징모업자 및 위안부에 대한 여권발급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대만총독부가 대처 방법을 문의하자 외무성은 “여권을 발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문제 소지가 있는 단어) 군 증명서를 발급해 (군용선으로→문제 소지가 있는 단어) 도항하게 할 것”이라고 회신했다. 외무성이 위안소 관련 업자 및 위안부에게 여권을 발급하는 일이 논란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여권을 발급하지 않는 방법을 지시한 것이다(일본 정부는 문제 소지가 있는 단어에 두 줄을 그어 삭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 정부가 군위안소제도와 관련해 국제법을 강하게 의식했다는 사실은 당시 군위안소제도가 국제법을 위반하는 사안을 포함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을 일본정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담당 부처들이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관여와 적당한 은폐라는 두 얼굴로 대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한 위안부 강제 동원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태우고 없애고 은폐하고 ‘강제 연행 증거 대라’는 뻔뻔함

위안부들이 허가된 구역만 산책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어 놓은 일본군 문서(왼쪽). 일본군인, 군속만 위안소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적시한 일본군 문서.

강제 연행의 범위

유튜브에도 올라온 하시모토 시장의 위안부 관련 발언은 얼핏 청산유수처럼 들리지만, 결정적 문제가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점이 그것이다. 하시모토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은 조선인 위안부 강제 동원이 일제강점기였기에 가능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다.

먼저 고노 담화를 살펴보자. 1993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 관련 제2차 정부 조사 결과를 공표할 때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다.

“전쟁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별개로 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당시 조선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어서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총체적으로 본인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다.”

고노 담화가 중요한 이유는 명확한 문구는 아니지만 당시 조선이 식민지였던 만큼 위안부 동원 행태 대부분이 취업 사기나 인신매매였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감언과 강압의 주체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이며, 관헌은 ‘직접 가담했던 일도 있었던 것’으로 사실을 축소함으로써 강제 동원의 주체가 업자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하시모토 같은 정치인이 주장하는 ‘강제 연행’의 이미지는 봄날 들판에서 나물 캐는 숫처녀를 일본군이 총검을 앞세워 강제로 군용트럭에 태워 징집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조선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민지에서의 징모는 총검을 앞세운 무력 형태보다 취업 사기나 인신매매 방식이 훨씬 많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신매매와 취업 사기에 의한 징모가 많았던 배경엔 식민지 경찰이 있다. 아무리 식민지라도 인신매매나 취업 사기는 엄연한 불법인데, 경찰이 위안부 징모에 불법을 자행하는 업자들을 전혀 단속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를 이야기할 때는 강제로 트럭에 실려가는 식의 좁은 의미의 강제 연행이 아닌, 취업 사기와 인신매매, 납치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광의의 강제 연행을 포함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위안소 개설과 운영, 위안부 징모와 이송, 전후 처리 등 일본군위안소제도하에서 일어난 모든 피해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누가 위안부 피해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일본 정부와 군의 직간접적인 통제 감독 및 관여하에 위안부가 징모 및 이송되고, 1938년 3월 내무성 및 육군성 통첩(군·정부)에 의해 일본군위안소제도가 성립된 이후 일본군이 정책적으로 개설하고 운영, 통제, 감독한 위안소에 구속돼 성행위를 강요당한 모든 여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군위안부를 ‘공창’과 동일시하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일본군위안소제도 자체에 있다. 무슨 이야기냐면, 군위안소제도를 일본 근대 이후에 성립한 공창제도를 근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공창제도 운영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다. 비슷해 보이고,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하다 보니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위안소와 공창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먼저, 지역적 차이가 있다. 공창제도는 일본 식민지, 군위안소는 점령지에 개설했는데,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 급격히 확대된 점령지에 공창제도를 대신하는 위안소를 설치했다. 메이지유신 직후 군대를 근대화한 일본은 군위생정책 일환으로 성병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일본 육군 군의단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군은 정부가 유곽을 위생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여성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봤다. 그런데 점령지에는 식민지처럼 공창제도를 이식할 수 없으니, 가장 흡사한 형태의 위안소를 설치한 것이다.

공창제도는 내무성(경찰)이 업자에게 일본 내 혹은 식민지의 지정된 장소에서 영업하도록 허가를 내주고, 업자는 소개업자를 통해 창기 등을 고용해 해당 법률에 따라 영업했다. 고용된 창기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며 경찰이 이를 단속한다. 원칙적으로 공창제도에서는 업자가 법을 준수하면서 영업하는지를 단속하는 것이 국가 의무다. 국가와 업자가 단속의 주체와 객체로 구분되는 셈이다.

일본군위안소와 공창제도 운영 시스템을 비교해보면 닮은 점이 있다. 먼저 위안소를 운영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일본군이 직접 업자가 돼 위안소를 운영한다. 군직영위안소다. 둘째, 군이 업자를 선정해 영업을 허가하고 업자를 통해 위안소를 통제, 감독한다. 군전속위안소다. 셋째, 기존 매춘업소를 일본 병사용으로 지정한다. 군이용위안소다. 이 경우 군인과 민간인이 같은 장소를 이용하지만, 요일을 나눈다든지 해서 군인과 민간인이 같은 시간대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소는 원칙적으로 군인과 군속만을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위안부 피해자 증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형태는 군전속위안소다. 즉 업자를 통해 군이 위안소를 통제 감독한 경우다. 군전속위안소는 군위안소임에도 공창제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요소가 발견된다. 공창제도에서는 업자가 경찰에게 허가받아 창기를 고용해 영업하고 창기의 건강검진을 의무화하는데, 위안소제도에서는 업자가 군의 허가를 받아 위안소를 개설하고 위안부를 징모하며, 위안부에게 건강검진을 철저하게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말단 병사 눈에는 위안소를 이용할 때 업자가 있고, 여자가 있다는 식의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만으로 위안소와 공창제도의 유곽이 동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국가가 적극 관여한 일본군위안소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군위안소제도에서는 공창제도와 달리 국가(군·정부)가 직접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위안소 업자에 맡기더라도 일일 혹은 월말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등 운영을 직접 통제, 감독했다. 즉, 일본군이 직접 선정한 업자가 지역 경찰 및 헌병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위안부를 징모하고, 군 트럭이나 철도, 군함 등을 이용해 이송했다. 업자에게 군이 온갖 편의를 제공했던 것이다.

1969년생인 하시모토 시장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군의 관여를 인정하면서도 “위안소에 대한 위생상, 질서상, 전시라는 시대상황상 공적 관리를 한 것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위안소제도는 물론, 공창제도의 운영 방식조차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본군위안소제도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운영 및 감독했다는 점에서 불법 영업과 검진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관여한 공창제도와 확연히 다르다. 일본군위안소제도 피해자들이 사죄와 개인보상을 일본 정부에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를 국가의 성폭력으로 인식한 것은 기껏해야 20여 년 전 일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다.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결의안을 내놓는 등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했다.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보다 고양된 덕분이다.

그런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전보다 더 후퇴한 것도 있다.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가 전자라면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취소해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일본 정치인들의 인식이 후자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들끓었던 여론도 한 달여 만에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9월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일 정상의 짧은 스탠딩 토크 이후 한일관계도 ‘현상 유지’라는 대원칙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인다. 일본군위안소제도 피해 생존자들을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 사죄, 배상으로 이어지는 정의 실현이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한일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길임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태우고 없애고 은폐하고 ‘강제 연행 증거 대라’는 뻔뻔함
필자 윤명숙 박사는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일본군위안소제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1991년, 일본인 신문기자의 요청으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씨 인터뷰를 통역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구주제를 일제강점기하 지식인에서 가난한 하류층 여성으로 바꿨다. 그의 박사논문은 일본 학술진흥회로부터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논문으로 선정돼 2003년 ‘일본의 군대위안소 제도와 조선인 군대위안부’(아키시서점)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됐다.




주간동아 855호 (p14~17)

윤명숙 강원대 강사·히토쓰바시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박사(한일관계사, 일본 근현대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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