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2

2005.07.05

아랫사람 보살펴주는 푸근한 곳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5-07-01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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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사람 보살펴주는 푸근한 곳

    남사고 무덤에서 바라본 앞산.

    “근래에 쓸모없는 늙은 농사꾼 되어시냇물 흐르는 산간에서 헛되이 늙어갑니다.가뜩이나 병든 몸, 수심도 가득한데가을바람에 날리는 서릿발 수염, 차마 볼 수 없군요.”

    조선 명종 때의 명풍수 남사고(南師古, 1509~71)가 남긴 시 한 편이다. 천문과 지리에 능통해 문정왕후의 죽음, 남명 조식의 죽음, 선조 임금 즉위, 임진왜란 발발 등을 예언했다는 남사고의 시치고는 너무 쓸쓸하다.

    그가 당시 여러 사건을 예언한 것은 율곡 이이나 상촌 신흠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19세기 초 승려 출신 풍수 일이승은 “불교계를 제외하고 유교계의 풍수 가운데 탁월한 사람은 오로지 남사고뿐이다”고 평했으니, 비범한 풍수가였음이 확실하다.

    아랫사람 보살펴주는 푸근한 곳

    남사고의 고향(울진군 근남면 내성산동). 남사고가 아홉 차례나 이장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남사고 아버지의 무덤(위부터).

    남사고의 삶은 어떠했을까. 대체로 당대 최고의 풍수 실력을 인정받으면 왕실뿐만 아니라 돈 많은 사대부들의 후원을 받아 살림살이가 비교적 넉넉했다. 그러나 그는 곤궁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병든 몸에 죽음을 걱정하고, 추운 날씨에 옷이 없어 친구 조문조차 못 갈 정도였다. 이러한 형편은 그가 친구 최향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남사고는 명종 때 잠깐 사직참봉을 했고, 울진군 근남면 구산 4리 내성산동 마을로 이사하여 말년을 보내다가 선조 임금 초(1569년) 천문 교수로 특채되어 다시 벼슬로 나아갔다. 천문 교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 태사성(별)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나이 든 상관이 자기 명이 다한 것으로 짐작하고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자, 남사고가 웃으면서 “죽을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다. 얼마 후 남사고 자신이 죽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1571년). 서울의 친구들이 돈을 걷어 울진까지 운구, 집 옆에 안장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남사고의 무덤은 바로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남사고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지지만 대개는 사실과 다른 것들이다. 아버지 무덤을 아홉 차례 이장했다는 구천십장(九遷十葬) 전설, 예언서 ‘격암유록’ ‘격암비록’ ‘마상록’ 등을 남겼다는 이야기, 그 자신이 절손될 터로 아버지 무덤을 이장했고 자신도 절손할 터에 묻힌 까닭에 절손이 되었다는 등 다양하다.

    그만큼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 가탁(假託)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 무덤을 두 번밖에 이장하지 않았다(현재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한티 소재). 그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격암유록’ 등은 대한제국 말의 사이비 종교가나 술사들이 그의 이름에 가탁한 것이다. 그의 저서는 화재로 인해 시와 편지 몇 편만이 전해올 뿐이다. 그는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아들이 일찍 죽어 사실상 절손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관련, 천하의 명풍수 남사고의 풍수 실력은 어디서 드러난 것일까. 그가 말년에 이사를 와 살았던 내성산동 마을 터와 그의 무덤 터일 것이다. 마을 자체는 앞산이 왼쪽으로 한 바퀴 빙 돌아서[풍수 용어로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 한다] 만들어놓은 작은 분지에 있어 난리를 피하기 좋은 땅이다. 또 웅장한 앞산이 그의 무덤을 내려다보는데, 전혀 위압적이지 않고 마치 고관대작이나 웃어른이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나 아랫사람을 편안하게 보살펴주는 형상이다.

    비록 후손은 없지만 언제까지나 숱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또 그의 풍수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무덤과 집터뿐만 아니라 아버지 무덤까지 찾아오게 하는 매력도 아마 그와 같은 터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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