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1

2005.02.01

‘연예인 X파일’ 후폭풍 누구 덮칠까

자료 만든 제일기획, 소문 흘린 기자들 ‘원초적 책임’ … 마구 퍼나른 누리꾼도 큰 문제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5-01-26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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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 X파일’ 후폭풍 누구 덮칠까
    일상적인 작업입니다.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0억원에 이르는 모델료 때문이 아니라,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을 투자한 제품의 운명이 달린 중대사이기 때문에 광고기획사는 CF 모델 선택을 위해 거의 모든 정보와 루머까지 빠짐없이 수집합니다.”(C광고회사 8년차 과장)

    1월 셋째 주, ‘광고모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사외전문가 심층인터뷰(Depth Interview)’란 제목의 112장짜리 파워포인트 문서 하나가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 굴지의 광고기획사인 제일기획이 의뢰하여 동서리서치가 제작한 이 보고서는, 제목에서 풍기는 도도함과 달리 속 내용은 깜짝 놀랄 만큼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누리꾼(네티즌)들은 ‘연예인 X파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나라 안팎으로 전송하는 것은 물론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분위기다.

    ‘연예인 A는 향정신성 의약품에 관대하고, B는 룸살롱 출입이 잦다, C는 게이라는 소문이 있고, D는 중년의 스폰서가 있다, E는….’

    단 한 번이라도 접한 이라면 외부에 떠들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도배돼 있는 이 ‘고급 치라시(정보지)’는 외부로 유출된 직후, P2P(일대일 파일공유)와 메신저 등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 단 이틀 만에 수천만 누리꾼들에게 전달됐다. 역설적으로 왜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인터넷 강국인지를 증명할 정도로 신속한 정보 전파력을 입증해낸 셈이다.

    연예인 사생활에 대한 비정상적 스토킹



    ‘한류 열풍’으로 대한민국 연예계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발돋움하려는 상황에서 터진 이 사건은 그간 우리 연예계의 고질병으로 지적돼온 언론과 누리꾼들에 의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한 비정상적인 스토킹’의 절정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다양한 추문이 일거에 폭발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정화(淨化)’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의견도 있지만, ‘한류 열풍’과 연예인들의 행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책임 소재를 놓고 상당한 갈등이 예상된다. 우선 연예인과 광고계, 그리고 언론계와 누리꾼이 얽힌 복잡한 법정소송이 한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이들 간에 새로운 신사협정이 맺어질지 여부도 주목거리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 광고기획사(자본)에 의해 대규모로 데이터베이스(DB)화됐다는 점이 충격이고, 누리꾼들이 아무 죄책감 없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확대 재생산한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예 기자들이 불법적 개인정보 수집에 가담해 공신력을 더해줬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습니다.”(경희사이버대 민경배 교수)

    이 사건이 안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 가운데 인터넷 도입 이후 매번 지적돼온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는 또 한번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과거처럼 ‘인터넷이 가장 큰 문제’라는 편향된 의견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제도적인 보완을 통해서라도 확실하게 처벌 규정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크게 늘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리꾼 전체의 법적 책임을 묻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각성 촉구’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도 많다.

    결국 문서를 작성하고 실수(?)로 이를 유출한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일단 제일기획은 머리 숙여 사죄하고 있지만 “광고업계의 관행이었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피해 연예인 59명은 21일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의 대표이사와 담당자를 명예훼손과 모욕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피해 연예인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낼 가능성이 높아 이번 소송은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광고계 인사들은 “광고모델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광고주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평가작업은 일상적인 일이다”며 제일기획을 두둔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제일기획처럼 대규모로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매우 드문 사례기 때문에 이번 사태의 피해가 광고계 전체로 미쳤다는 데 더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제일기획은 2004년 10월부터 체계적인 데이터 확보를 위해 일반 소비자 1000여명을 상대로 광고모델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했고, 그와 별도로 광고모델을 자주 접하는 방송사 리포터와 스포츠지 연예기자 10명의 소견까지 집대성해 고급(?) 자료를 만들었다. 특히 이 보고서는 인터뷰한 기자들의 이름과 소속, 인터뷰 실시 일자까지 상세하게 기재돼 있어 파문을 확대시켰다는 분석이다.

    속보 경쟁 벌인 인터넷 언론사 책임론도

    이 사건의 최대 논란거리는 취재 중에 얻은 정보를 사적인 이익(10만원권 백화점 상품권 2장)을 위해 사용한 해당 기자들의 책임 여부다. 기자들이 빈번하게 심층 인터뷰에 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K광고기획사의 한 과장은 “대개 한 시간에 10만원씩 주고 기자나 외부 전문가들의 심층조사를 벌이곤 한다”고 증언했다. 해당 기자들에게 억울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에 대한 확인 작업 없이 외부로 흘렸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인터넷에서는 이번 대형 사고의 책임 소재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다수의 누리꾼들은 자료 수집을 지시한 제일기획과 정보 관리의 허술함으로 자료를 유출한 동서리서치에 화살을 집중시키고 있지만 소문으로만 떠돌던 인터넷 루머를 메인 화면 톱(Top) 뉴스로 격상시킨 ‘포털 뉴스’(다음미디어, 네이버뉴스 등) 들도 여론의 도마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밖에 속보 경쟁에 몰입한 인터넷 언론사들의 책임문제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이런 민감한 사건은 기사화보다 먼저 확산 방지에 힘써야 했다는 아쉬움의 발로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이 자료가 담고 있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정보가 대중에게 점차 객관적인 사실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광고회사에서 근무했던 김창범씨(32)는 “대개의 광고기획사는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 연예인들에게 불리한 뒷정보 수집에만 열을 올릴 뿐 검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번에 공개된 ‘소문들’ 역시 사실 여부는커녕 검증 시도조차 불가능한 술자리 방담 수준의 악담이었지만, 국민 다수에게 배포되고 사회적 이슈로 돌변하면서 점차 진실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합법이냐 불법이냐, 피해액수가 얼마냐라는 문제를 뛰어넘어 우리 연예계, 아니 우리 얼굴에 똥물을 끼얹은 거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자라나는 애들 보기에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연예인을 너무나 좋아하는 초등학교 아이를 둔 한 부모의 걱정처럼 한국 사회 전반에 적색 경고등이 켜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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